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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04화 (304/394)
  • 304화

    대체 이 왕국은 왕자의 침실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가. 두통이 밀려오는 느낌에 이마를 짚은 채로 조용히 대답했다.

    “오해입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김우진이랑 같이 자서 그런 소문이 난 것 같은데, 김우진은 발견됐을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그럼 왜 이런 건데? 당황한 나를 쳐다보며 뺨을 장난치듯 툭 건드린 하태헌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이해하는 거와 별개로 질투는 나니까. 그리고 넌 이렇게라도 표현을 안 하면 질투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왠지 내 탓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기분 탓인가?

    어쨌든 하태헌에게는 좀 미안했다. 아무리 가짜라지만 나와 결혼하기로 했는데 저런 소문이 퍼진 거였으니까.

    “죄송합니다. 혹시 다른 팀원들도 그 소문을 들었나요?”

    “중앙 수도에 퍼져 있는 소문이니 물론이다. 나와 천사연은 소문을 듣자마자 저 녀석인 걸 알아챘지만. 설마 다른 놈이 더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내가 하태헌에게 이 정도로 신뢰가 없었던가.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 얘기해 봤자 나만 손해이니 슬쩍 대화 주제를 바꿨다.

    “며칠 뒤면 결혼식이 시작될 텐데 추가로 얻은 정보 같은 거 있습니까?”

    “아니, 없다. 천사연도 별다른 말이 없더군.”

    정신 지배를 당한 민아린과 박건호, 권정한에게 구박을 받는 처지인 하태헌은 집 밖으로 나갈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비교적 자유로운 천사연이 대신 바깥으로 돌아다니며 정보를 찾아보고 있는데, 아무리 주변을 뒤져 봐도 이 공간과 동화에 관련된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면 결혼식을 진행하고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는 수밖에는 없네요.”

    “어쩔 수 없지.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다.”

    지난 일주일간 평화롭기만 해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결혼식을 기다리는 게 다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결혼 상대가 하태헌 씨라서 전 좋습니다.”

    이 공간에 들어오면서부터 해 온 생각이다.

    신데렐라 역할이 하태헌이 아니라 정신 지배를 당한 다른 팀원이거나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면 훨씬 복잡했을 거다. 결혼이 가장 가능성이 큰 해결책인 만큼 상대가 하태헌인 건 정말 행운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미소 지으며 한 말에 하태헌이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내 귀 끝을 붉힌 채로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 잠깐만요. 잠깐.”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려고 다가오는 하태헌의 얼굴을 기겁하며 손으로 막아 냈다. 하태헌이 불만을 담아 눈가를 찌푸렸다.

    “왜 또 이러세요?”

    “먼저 프러포즈를 해 놓고 왜 이러냐고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프러포즈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어이가 없다. 내 짐작대로 하태헌이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거지?”

    “예?”

    “김우진 말하는 거다. 계속 같이 잘 건가?”

    “다른 팀원처럼 신분이 괜찮았으면 걱정이 덜할 텐데 그게 아니라서 곁에 둬야 안전합니다. 어차피 결혼식까지 사흘 남았잖아요.”

    “마음에 안 드는데.”

    “어른이 되시죠, 하태헌 씨.”

    이번만큼은 질투가 난다 해도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라 단호하게 말하자 하태헌이 한쪽 입꼬리만 삐죽 올렸다.

    “그래. 결국 너와 결혼하는 건 나니까.”

    “…음, 하태헌 씨.”

    잠시 고민한 나는 하태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김우진과 제 사이를 그런 쪽으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우진은 제게 있어서 친구이자 지켜 줘야 할 동생입니다.”

    “…….”

    “그리고 여긴 만들어진 공간이고요. 솔직히 전 하태헌 씨가 왜 질투를 하시는지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마지막 얘기에 하태헌이 약이라도 삼킨 것처럼 쓰게 웃었다.

    “그래. 넌 당연히 모르겠지. 나를 애정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지 않나.”

    “저는…….”

    “물론 나는 네 질투를 원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다. 강요한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고.”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하태헌의 모습은 진심으로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한이결. 이것만큼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군. 김우진이 정말로 널 그저 친구로 보고 있을지.”

    머릿속 한구석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김우진도 그럴 거라고 반박하려 해도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나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서 몸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나도 남은 시간에는 성안을 좀 둘러보겠다.”

    “…알겠습니다.”

    “뭔가를 더 알게 되면 바로 찾아가겠다.”

    하태헌과의 대화는 찝찝한 감정만을 남기고 끝이 났다. 하태헌을 뒤로하고 응접실을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우진이 곧장 다가왔다.

    나를 올곧게 응시하는 고동색 눈동자를 보자 가슴 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김우진.’

    슬퍼 보이던 너에게 내가 어떤 위로를 했어야 하는지. 쉬고 싶다던 네 부드러운 거절을 듣지 말고 얘기를 더 나눠 봤어야 했나?

    만약 하태헌이 해 준 말대로 김우진이 내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김우진도 남자라는 사실은 이제 별 의미가 없었다. 성별에 상관없이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이제껏 경험으로 깨달았으니까.

    “왕자님?”

    내가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자 김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 위로 방에서 단둘이 따로 만났을 때 마주했던 김우진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으로 돌아가자.”

    “예.”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 공간을 빠져나가서 김우진이 정신 지배에 풀리게 되면 다시 물어보자.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애써 뒷일로 미뤄 둔 나는 김우진의 어깨를 툭 치고 앞서 걸어 나갔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눈 깜짝할 새에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꼭두새벽부터 방에 들이닥친 시종들에 의해 강제로 깨어난 나는 목욕을 한 뒤에 곧바로 치장을 시작했다.

    “결혼식은 낮에 하는데… 벌써부터 준비를 해야 해?”

    “7시간밖에 남지 않아서 촉박합니다.”

    “그럼요, 왕자님! 한 번뿐인 귀한 날인데 화려하게 꾸미셔야죠.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우서혁과 의욕에 가득 찬 시녀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피곤했다.

    “이봐, 거기. 상자에서 붓 좀 가져와.”

    “잠깐. 저 아이는…….”

    내게 화장을 해 주던 시녀 중 한 명이 옆에 서 있던 김우진에게 명령을 했다. 놀라서 그는 시종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김우진이 먼저 움직였다.

    시녀가 시킨 대로 붓을 가져다준 김우진은 그 후로도 계속 시종처럼 묵묵히 심부름을 했다. 그 행동에 불편해진 건 오히려 나였다.

    치장을 모두 마친 후에는 옷걸이에 걸린 여러 벌의 옷을 하나씩 입어 보며 가장 적당한 결혼복을 찾아야 했다. 그나마 줄이고 줄인 게 저 정도 양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시녀들이 알아서 옷을 입혀 주긴 했지만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던 터라 너무 부담스러웠다.

    “휴, 어떻게 시간 내에 끝이 났네요.”

    “왕자님 너무 멋있으세요!”

    “하얀색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향수는 왕자님께서 골라 주시면 바로 뿌려드리겠습니다.”

    지루했던 환복 과정은 새하얀 정장에 샛노란 토파즈 보석이 박힌 장신구와 왕국을 상징하는 금색 망토를 걸치며 끝이 났다. 향수는 대충 아무거나 고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다시 태어나도 이런 삶은 절대 못 살겠다.’

    차라리 평민으로 사는 게 낫지, 남한테 시중받으며 사는 건 영 성격에 안 맞았다. 제발 이번 동화는 결혼식과 함께 끝이 났으면 좋겠는데.

    “준비가 끝나셨으면 결혼식장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김우진도 데려가도 돼?”

    “…괜찮습니다만 식장 앞까지만 가능합니다.”

    “이리 와, 김우진.”

    내 시중을 돕느라 옷을 한 아름 안고 있던 김우진이 머뭇거리다가 소파 위에 옷을 내려 두고 재빨리 쫓아왔다.

    우서혁을 뒤따라 복도를 걷던 나는 일부러 우서혁과 거리를 조금 벌리고 김우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김우진, 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나서서 내 시중을 들 필요는 없어.”

    “예?”

    “나는 너한테 시종 일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주변의 눈치를 보거나 억지로 시중을 들지 않아도 돼.”

    그 얘기를 들은 김우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간 고민하듯 눈을 깜빡인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왕자님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생각입니다.”

    “…….”

    “시종 일도 싫지 않습니다. 일이라는 명분하에 당당하게 왕자님께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난 그런 걸 바란 적 없어. 나는 네가 내 친구로서 곁에 있기를 바라.”

    이게 김우진을 향한 내 진심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김우진과 나는 친구로서 아주 잘 지내 왔다. 그래서 김우진도 이 관계에 만족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자 김우진 또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장미 덩굴이 한가득 감겨 있는 외부 복도 벽 너머로 한낮의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

    “전 친구가 되어 드릴 수 없습니다.”

    햇살을 등진 채로 김우진은 그 방에서 했던 것처럼 내게 부드러운 거절을 남겼다.

    노예와 왕자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뜻이 분명할 텐데도 어쩐지 다른 의미로 들려왔다.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왕자님,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멈춰 서서 따라오지 않자 앞서가던 우서혁이 재촉을 해 왔다. 심장 부근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걸음 속도를 높였다.

    “갈게.”

    일단… 결혼부터 하자. 공간이 바뀌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여길 나가면 김우진이랑 다시 대화하자. 이번에는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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