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김우진이 셔츠 단추를 모두 풀고 상의를 벗을 때쯤에야 겨우 제정신을 차린 나는 급히 손을 들었다.
“잠깐, 잠깐!”
“……?”
같이 자겠다는 내 말을 듣고 김우진과 우서혁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대체 이 빌어먹을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지? 방금까지 멀쩡했던 머리에 두통이 밀려왔다.
“그런 게 아니라…….”
아무리 답답하고 황당해도 모든 게 낯설 김우진의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김우진은 자신을 철저하게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는 자신을 산 주인이자 왕국의 왕자였다. 그러니 저런… 이상한 오해를 하고도… 순순히 받아들인…… 진짜 거지 같네.
“그런 의미로 같이 자자고 한 거 아니야. 알겠어? 순수하게 좋은 침대에서 너 편하게 재우려고 한 거야.”
진심을 담아 해명하자 김우진이 처음 같이 자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놀랐다.
“저는… 바닥에서 자도…….”
“다친 몸으로 바닥에서 잤겠다고? 절대 안 돼. 그러니까 빨리 옷 주워 입고 올라와.”
“…….”
“손끝 하나 안 건드릴 테니까 올라오라고. 나 힘들다.”
힘들다는 그 얘기에 김우진이 더 고집부리지 않고 머뭇머뭇 침대에 올라왔다. 겨우 김우진과 나란히 눕게 된 나는 뻐근한 두 눈을 감았다.
길고양이처럼 주변을 경계하는 김우진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정 안 되겠으면 천사연과 하태헌을 다시 만나서 의논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잘 자, 김우진.”
긴장해서인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로 누워 있던 김우진이 내 인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신력에 한계가 온 나는 밀려오는 수마를 반갑게 맞이했다.
***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방을 찾아온 우서혁이 내 상태를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기분이 훨씬 좋으신 듯합니다.”
“잠을 잘 잤어.”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우서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뒤에 있는 김우진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김우진의 귓가가 발긋하게 물들었다.
김우진을 다른 방으로 보내지 않고 함께 잠을 잔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가장 걱정했던 김우진을 무사히 만나서 예전처럼 함께 잠을 잔 것만으로도 초조했던 마음이 훨씬 안정됐으니까.
그렇다 보니 의도치 않게 김우진을 껴안은 채로 잤지만… 그 정도야 뭐. 김우진도 화를 안 낸 걸 보면 별로 불쾌하지 않을 거다.
“어제 명령하신 서신은 약 두 시간 전에 남작가에 전달을 완료했고, 답장은 방금 도착했습니다.”
찻잔을 내려놓고 우서혁이 건네준 편지를 받아 열어 봤다. 새하얀 종이에 채워진 글씨는 굉장히 유려하고 익숙했다. 천사연의 필체였다.
「존경하는 왕자님께.
서신 잘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서신의 주인은 구박받는 입장이라 답장을 보낼 수가 없어 첫째인 제가 대신 펜을 들었습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김우진과 만나게 됐다니 다행입니다. 노예 신분인 건 좀 놀랐지만, 왕자님께서 잘 주워 가셨으니 한시름 놓였군요.
막내가 말하기를, 결혼식은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는 대로 다시 연락을 달라고 합니다. 왕자님께 이래라저래라 하는 꼴이 웃기지도 않습니다. 정말 저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내와 결혼하실 겁니까? 여러 면에서 제가 훨씬 나아 보입니다.
이곳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수록 상황이 나빠진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특히 민간인들이 받을 피해가 점점 커질 거로 예상됩니다.
저희 모두 왕자님께서 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왕자님께서 보내 주실 다음 서신을 즐거운 기분으로 기다리겠습니다.
ps. 전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할 수 있으니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씀 주십시오^^
신데렐라의 첫째 형이.」
‘미친놈인가?’
글만 읽는데도 천사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하태헌과 결혼을 해야 신데렐라 동화가 끝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자꾸 자기랑 하자고 조르는 거야? 서신에도 이럴 정도면 같이 사는 하태헌을 얼마나 놀리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피곤했다.
편지를 접으며 우서혁에게 물었다.
“어제 내가 부탁한 건 어때?”
“결혼식을 열흘 뒤에 진행하려면 도시 축제와 타 지역 귀족들의 참석을 제외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자.”
“결혼식도 필수적인 절차만 남기고 모두 넘겨야 합니다.”
“번거롭지 않고 더 좋네.”
“…일생의 단 한 번뿐인 결혼식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지. 결혼식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게 중요하지.”
괜히 테라스 바깥을 바라보며 연극 대본을 읊듯이 대답하자 우서혁이 결국 포기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응. 결혼식에 필요한 다른 문제들도 그냥 알아서 잘 처리해 줘.”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게 이런 주제는 너무나도 버거웠다.
어차피 다 가짜인데. 우서혁이 대충 알아서 진행해 줬으면 좋겠다.
“김우진, 쿠키 먹을래?”
결혼 같은 복잡한 일보다 김우진이랑 방에서 쿠키나 먹는 게 훨씬 편하고 좋았다. 지금은 노예 상태라서 의자에 앉으라고 해도 거부하고 저렇게 장승처럼 서 있지만, 아무튼.
내가 내민 쿠키를 머뭇거리다가 받아 간 김우진이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느긋한 우리 둘을 잠자코 지켜보던 우서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
결혼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
아무리 평화롭다 해도 여긴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세계이니 한 치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언제 어느 때에 위험한 사고가 터질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 달리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채로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너무… 한가한 거 아닌가?’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왕성에서 한낮의 티타임을 즐기던 나는 문득 차오르는 허탈함에 이마를 짚었다.
지난 일주일간 내가 한 일이라고는 결혼식 때 입을 의복을 만들기 위해 치수를 재거나 결혼식 관련 서류를 몇 가지 살펴본 게 다였다. 그 외에 시간에는 지금처럼 차를 마시거나 성 내부를 구경했다.
아무리 가짜 세계라지만 일국의 왕자가 이렇게 놀고먹기만 해도 되는 건가? 양심에 좀 찔릴 정도였다.
성 밖으로 나가서 여우를 찾아보려고 해도 도무지 허락이 내려지지 않았다. 왕자라는 신분과 코앞까지 다가온 결혼식 일정 때문이었다.
“머리가… 아프십니까?”
내가 이마를 짚은 채로 한참을 고민하자 곁에 서 있던 김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아니, 괜찮아.”
지난 일주일간 김우진과 24시간 붙어 있던 덕분에 저 존댓말도 슬슬 익숙해졌다.
친구처럼 대해 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김우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극히 불편해하는 탓에 나도 이젠 포기한 상태였다.
‘시종 일을 안 시키려고 해도… 이 정도면 이미 시종이 된 거 같네.’
내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보이면서 도와주고 뒤만 쫓아다니고… 혼자서 자유롭게 산책하고 와도 된다고 아무리 달래도 김우진은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가 뭐지? 낯설어서? 나를 따라 성으로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된 데다 신분제 세상이니 이해는 하지만.
“왕자님.”
하루빨리 여길 벗어나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는데, 다른 시종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약혼자가 도착하였습니다.”
하태헌이 결혼 준비를 위해 성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사흘 후에 결혼할 사이라 그렇게 부르도록 따로 명령해 둔 상황이었다.
“안내해 줘.”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김우진과 함께 시종의 뒤를 따랐다.
오늘부터 하태헌은 성에서 지내며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식이 끝나면 내 바로 옆방에 살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결혼을 하고서도 공간이 바뀌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참, 분위기 자체는 닥터가 만들어 낸 과거 공간보다 좋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연달아 벌어지니 까다로운 건 이쪽이 더 심했다.
천사연은 이곳을 아벨과 사마엘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는데. 확실히 닥터와는 모든 게 달랐다.
시종이 안내해 준 응접실로 들어서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하태헌이 뒤를 돌아봤다.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하태헌이 반가워서 재빨리 다가갔다.
“한이결.”
“하태헌 씨, 별일 없었습니까?”
내가 그랬듯 하태헌도 나를 찬찬히 살핀 후에 대답했다.
“그래. 너도 잘 지내고 있던 모양이군.”
“당연하죠. 우리 중에서 제가 제일 편할 겁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일주일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리고 이것.”
하태헌이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천사연의 서신이다. 결혼식 날 다른 세 명과 함께 왕성으로 오겠다는군. 자세한 내용은 안에 적혀 있다.”
“알겠습니다.”
그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천사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공간이 바뀔 수도 있으니 될 수 있으면 한자리에 다 같이 모여 있자는 거겠지.
하태헌은 내게서 시선을 들어 뒤에 서 있는 김우진을 확인했다.
“남은 한 명도 잘 지낸 것 같군.”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죠.”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김우진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단둘이 대화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
“그럴까요?”
“복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미처 내보내기 전에 나서서 복도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김우진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애초에 원래 김우진이라면 저렇게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지도 않았을 거다. 찝찝해진 기분에 닫힌 문을 보며 혀를 차는데, 갑자기 몸이 휙 떠올랐다.
“무, 무슨… 하태헌 씨?”
양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아 훌쩍 들어 올린 하태헌이 옆에 있는 소파에 나를 앉혔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내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윽, 잠깐… 잠깐만요.”
쪽쪽쪽, 쉴 틈 없이 들려오는 부끄러운 소리와 간질간질한 감촉에 심장이 급격하게 뛰며 얼굴로 열이 몰렸다.
예상 못한 상황에 제대로 된 반항도 못 하고 고스란히 뽀뽀 세례를 받게 되자 너무나도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파 등받이에 허리를 바싹 붙여 피하려고 해도 하태헌은 집요하게 쫓아왔다. 뺨과 눈꼬리, 이마에 쏟아지던 입맞춤은 마지막에 입술에 가볍게 와 닿고 나서야 멀어졌다.
“갑자기 왜…….”
“한이결.”
“예?”
하태헌이 기가 막힌 심정으로 노려보는 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 내며 물었다.
“밖에 소문 하나가 돌고 있던데. 알고 있나?”
“소문이요?”
웬 소문? 조금도 감을 잡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자 흉터가 새겨진 손으로 입술을 쓸어 만지던 하태헌이 곧 답을 해 줬다.
“왕국에 하나뿐인 고귀한 왕자님께서 남자 노예 하나를 침실에 들인다는 소문.”
“…….”
“심지어 한두 번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다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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