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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02화 (302/394)

302화

“그럼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는 대로 서신 보내겠습니다.”

“알겠다.”

마차에 올라타며 말하자 하태헌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 같이 모여 있으니 마음은 한결 놓이네요.”

박건호와 권정한, 민아린이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였지만 곁에 천사연과 하태헌이 함께 있어 준다면 안전할 것이다. 나 또한 옆에 우서혁이 함께 있으니 걱정을 덜었다.

‘이제 김우진하고 여우만 찾으면 될 텐데.’

결혼식이 끝나면 신데렐라 동화도 끝날 게 분명했다.

그 이후에 새로운 동화가 시작될지, 프라우스 신도단을 만나게 될지 불확실한 지금 상황에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둘을 만나는 편이 나았다.

“일단 가 보겠습니다. 혹시 김우진을 발견하게 되면 언제라도 좋으니 연락 주세요.”

“그러지.”

인사를 마치자 곧장 마차가 출발했다. 내 뒤를 따라 길게 이어진 기사 행렬 뒤로 하태헌의 모습이 멀어졌다.

“사랑하는 상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돼서 다행입니다.”

창문에서 눈을 떼자마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서혁이 말을 걸어왔다.

사랑하는 상대라니. 내가 한 거짓말이지만 정말 과하구나. 머쓱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지, 뭐. 혹시 최대한 빨리 결혼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왕자님의 결혼은 왕국의 큰 행사이니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성대하게 열어야 할 테니까요. 대략 두 달 정도 걸릴 듯합니다.”

“뭐? 두 달이나?”

결혼을 너무 빨리하면 김우진을 찾을 시간이 없을까 봐 고민이었는데, 최대한 빨리해도 두 달이라니.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기간에 심히 당황스러웠다.

공간 바깥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두 달이나 여기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심지어 이곳은 무고한 사람들 수십 명이 갇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두 달이나 살아갈 피해자들이 나중에 받게 될 충격을 고려하면…….

‘두 달은 절대 안 돼.’

어떻게든 시간을 줄여야 했다. 열흘 정도가 적당해 보이는데.

재빨리 머리를 굴려서 우서혁부터 설득하기 시작했다.

“성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왕자님의 결혼이니, 대충 치렀다가는 여러 말이 나올 겁니다.”

“다른 말이라고 해 봤자 뭐 얼마나 대단한 거겠어? 어차피 상대가 남자라서 말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을 텐데.”

“그건…….”

“성대하지 않아도 되고 준비가 간단해도 돼. 열흘 정도로 줄일 수는 없어?”

“…….”

내 얘기를 들은 우서혁이 저번과 마찬가지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남성분과 이 정도로 빨리 결혼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 뭐…….”

저 오해도 이젠 부끄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거짓말이라 우서혁의 눈을 마주 보기가 쉽지 않았다.

슬쩍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우서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께서 드물게 하시는 부탁이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고마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서혁이 찾아보겠다고 했으니 기대해 볼 만했다.

안도하며 창밖을 바라본 나는 바깥의 풍경이 이제껏 봐 온 거리와는 분위기가 다른 것을 알아챘다.

“잠깐, 저건 뭐지?”

창문 밖으로 검은 천이 걸린 건물들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나를 따라 창문 밖을 확인한 우서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예 상인입니다.”

“노예… 상인이라고?”

“예. 그러고 보니 오늘은 두세 달에 한 번 있는 노예 시장이 열리는 날이군요.”

노예를 사고파는 시장이라니. 이런 건 동화에 나오지 않았는데.

우서혁의 설명대로 인파 사이로 보이는 나무 우리에는 정말 어린 애들이나 사람이 갇혀 있었다. 역겨움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마차 쪽으로 오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하긴. 여긴 만들어진 세계였고 나와 하태헌이 결혼하면 끝날 곳이니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초췌한 노예들에게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저 노예들도 현실에서는 미술관이나 경매장을 찾아온 평범한 사람들일 텐데. 프라우스 신도단 때문에 지독한 경험을 하게 됐네.

길이 좁아서 마차의 이동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노예 시장의 광경을 지켜보다가 구경거리 취급을 받는 여러 노예 중에 유난히 붉은 머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김우진?”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서 창문에 몸을 바싹 붙였다. 두꺼운 쇠사슬에 목이 묶인 채로 흙바닥에 앉아 있는 남자는 분명 김우진이었다.

김우진의 앞에는 살집 있는 남자가 검은 채찍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불쾌한 공기를 바로 알아채고 급히 마차 문을 열었다.

“왕자님!”

움직이고 있는 마차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서 가뿐하게 땅에 착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김우진을 향해 채찍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즉시 바람 능력을 사용했다. 능력을 쓰지 않고는 절대 도착할 수 없는 거리였다.

바람의 힘으로 순식간에 남자와 김우진 사이에 끼어든 나는 김우진을 품에 안았다. 동시에 짜악, 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이마에서부터 어깨와 등에 화끈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시, 시발! 당신 뭐야?”

놀란 김우진을 뒤로 보내며 채찍을 든 남자를 응시했다. 제대로 찢어졌는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왼쪽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몸을 흠칫 떨며 뒷걸음질 쳤다.

“왕자님!”

“맙소사, 왕자님! 피가!”

마차를 멈춰 세운 우서혁과 기사들이 사색이 돼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 외침을 들은 남자와 구경꾼들이 경악하며 수군거렸다.

“와, 왕자님이라니…….”

“저 남자, 지금 왕자님께 채찍을 휘두른 거야?”

“왕자님께서 노예를 감싸시다가…….”

인파를 헤치고 내게 다가온 우서혁이 손수건을 꺼내 볼에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 줬다.

기사들에게 채찍을 빼앗기고 강제로 무릎이 꿇린 남자를 노려보던 기사단장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당장 이 무엄한 자를 죽여야 합니다, 왕자님!”

그 말에 머리를 숙인 채로 바들바들 떨던 남자가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왕자님이신 줄 모르고 제가…….”

“닥쳐라! 비천한 자가 감히 귀하신 분께 해를 입혔으니 당장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그만해.”

우서혁에게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아 내며 당장 검을 휘두를 기세인 기사단장을 말렸다.

“죄를 묻는 대신 이 노예를 데려가고 싶은데. 가능하겠지?”

“하지만 왕자님!”

“무, 물론입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뭐든 다 드리겠습니다.”

“한 명이면 충분해.”

남자를 죽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김우진의 목에 쇠사슬을 묶어 둔 짓이나 채찍을 휘두르려는 행동을 생각하면 가슴속이 뜨겁게 타들어 갈 정도로 깊은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저 남자도 결국 정신 지배의 피해자다. 아무리 가짜 세계의 엑스트라 역할이라 해도 목이 잘려 나가면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목 끝까지 올라온 화기를 겨우 삼켜 냈다.

“김우진.”

넋이 나간 채로 나를 보던 김우진이 내 부름에 눈을 깜빡였다.

가까이에서 본 김우진의 상태는 내 예상보다 더 안 좋았다. 입은 옷은 낡았고 여기저기 지저분한 먼지가 묻은 데다 자잘한 생채기도 많았다. 다시 올라온 분노를 거친 숨을 내쉬며 삭혔다.

‘여우는 보이지 않네.’

김우진의 분신과 여우가 함께 행동했으니 둘이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아쉽지만 김우진이라도 구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리 와. 나랑 가자.”

“…….”

손을 내밀자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뭇거리던 김우진이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그 익숙한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

“상처가 심하진 않네요.”

채찍에 얻어맞은 상처를 봐 준 왕성 치료사가 마지막으로 붕대를 감아 줬다.

성인 남성이 있는 힘을 다해 휘두른 채찍을 맞았는데도 이 정도 부상으로 그친 건 A급 전투계 신체 덕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피부가 터지거나 살점이 갈려 나갔겠지.

벗었던 흰 셔츠를 다시 입으며 민아린의 능력을 떠올렸다. 아쉽네. 민아린이 정신 지배를 당하지 않고 곁에 있었으면 순식간에 나았을 텐데.

왕성 치료사가 방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즉시 우서혁에게 미리 써 둔 편지를 전했다.

“이거 날이 밝는 대로 아까 만났던 내 결혼 상대에게 전해 줘.”

편지에는 김우진을 무사히 만났다는 정보와 결혼까지 걸리는 시간이 적혀 있었다.

“답장을 해 준다면 바로 받아 오고.”

“예.”

우서혁과 서신에 관한 얘기가 끝나 갈 때쯤에 방문이 열리고 김우진이 들어왔다.

시종들의 도움으로 몸을 깨끗이 씻은 후에 옷을 갈아입고 치료를 받은 김우진은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다.

“김우진, 괜찮아? 치료는 다 받았어?”

“……네.”

가까이 다가가 묻자 나와 우서혁의 눈치를 살피던 김우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자 답답함이 몰려왔다. 애가 이런 성격이 아닌데.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개입 능력을 쓰고 싶어졌다.

설마 다른 동화가 시작될 때마다 이런 상황을 반복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나와 김우진을 지켜보던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그 노예를 시종으로 부리실 거라면 내일부터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뭐? 아니, 난…….”

시종으로 부린다니. 김우진을? 당황해서 무심코 고개를 젓자 우서혁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무리해서 지켜 준 데다 이름까지 지어 주셨으니 당연히 시종으로 쓰실 줄 알았습니다.”

“같이 지내려고 데려온 건 맞아. 근데 시종은 아니야.”

김우진은 요리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으니 시종이 아니더라도 다른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어차피 결혼하면 끝날 세계이니 굳이 일하지 않고 내 곁에 둬도 괜찮을 거고.

“…알겠습니다. 우선 밤이 늦었으니 나머지는 내일마저 정리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내 의견도 그래.”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겪은 사건이 너무 많았다.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쉬십시오.”

묵례를 하고 방을 나서는 우서혁의 뒤로 김우진도 따라 나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넌 왜 따라가?”

내가 김우진을 붙잡자 김우진과 우서혁이 동시에 놀랐다.

“왕자님, 이 노예는 제가 다른 방을 준비해서…….”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재울게.”

어차피 김우진과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같은 침대에서 잤던 터라 새삼 불편한 것도 없었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두 사람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뺨을 확 붉힌 김우진과 반대로 우서혁은 눈가를 찌푸렸다.

“왕자님. 아까 남작가의 남성분과 결혼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응, 그랬지.”

결혼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우서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제가 잠시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엉?”

갑자기 무슨 오해?

“명하신 대로 저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어어.”

찌푸렸던 눈가를 다시 반듯하게 편 우서혁이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김우진과 단둘이 남자 그제야 좀 편해졌다.

“피곤하지? 얼른 자자.”

“…….”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일이 워낙 많아서 지치긴 했지만, 그래도 김우진을 만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왕자라는 신분에 맞게 성인 열 명이 뒹굴어도 될 만큼 커다란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가 걸터앉았다. 이만큼 넓은 침대면 내가 옆에 누워도 부담 없이 잘 수 있겠지. 무엇보다 김우진과 함께라면 어제와 달리 잠을 설치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서서 뭐 해? 이리 와.”

문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김우진에게 손짓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김우진이 무언가 각오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내 앞에 마주 선 김우진의 얼굴은 한눈에 봐도 티가 날 정도로 새빨갰다. 얘가 왜 이래?

“김우진?”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눈을 깜빡이던 김우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 기가 막힌 광경에 말문이 턱 막혔다.

‘뭐야, 미친…….’

얘가 진짜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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