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76. 신데렐라
응접실에 다 같이 모이자 지금이 얼마나 난감한 상황인지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정신 지배를 당해서 자신들이 계모와 형이라고 생각하는 민아린과 박건호, 권정한. 그리고 날 왕자라고 여기고 있는 우서혁까지.
어디 있는지 파악조차 안 된 김우진과 여우도 걱정스러웠다. 다들 만났으니 그 두 명도 어딘가에 있기는 할 텐데.
“흠, 일단…….”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아린의 시선에 어색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문을 열었다.
“저는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춘 상대를 찾으러 왔습니다.”
“왕자님, 하대를 사용하십시오.”
아, 맞다. 또 깜빡했네.
우서혁의 지적에 나도 모르게 또 존댓말을 쓴 것을 깨닫고 급히 수정했다.
“…찾으러 왔다.”
“큭…….”
민아린의 옆에 앉아 있던 천사연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저 자식이.
“무도회에서 춤을 춘 상대가 우리 막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래.”
민아린에게 대놓고 반말을 쓰려니 혀에서 가시가 돋치는 기분이었다.
잠시 고민하듯 눈을 깜빡인 민아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왕자님, 질문 하나 드려도 괜찮을까요?”
“말씀… 말해라.”
“춤을 춘 상대를 만나려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유라니. 그냥 하태헌을 만나러 왔을 뿐인데.
하지만 완벽하게 계모가 된 민아린에게 그런 얘기를 해 봤자 이해해 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 뒤에 서 있는 우서혁에게 해 둔 거짓말도 있고.
천사연과 하태헌은 끼어들지 않고 펼쳐진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하여튼 저 SS급 두 명은 이럴 때마다 도움이 안 된다니까.
궁지에 몰린 나는 결국 우서혁을 설득할 때 써먹었던 뻔뻔한 수법을 다시 한번 사용하기로 했다.
“결혼할 거다.”
“네?”
“결혼하려고 찾는 거다.”
진지하고 단호하게 대답하자 민아린이 하태헌을 힐끔 바라봤다.
“결혼이요? 무도회에서 한 번 본 거 아닌가요?”
“첫눈에 반해서.”
“어머…….”
입가를 가리며 놀라는 민아린을 보고 있자니 양심이 조금씩 아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데렐라 동화도 왕자와 신데렐라가 결혼하면서 끝나지 않나.
‘이 동화를 끝내려면 결국 하태헌과 결혼을 해야 할 텐데. 어차피 할 거 미리 설명해 둔 셈 치지 뭐.’
밀려오는 창피함을 억누르며 차근차근 계획을 정리하던 나는 이어지는 민아린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우리 막내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
“그게 무슨…….”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거죠. 혹시 막내가 확실한지 확인해 볼 방법이 있을까요?”
이게 뭔 소리야. 직접 춤을 춘 당사자인 내가 맞다는데. 어이없어서 반박하지 못한 틈에 우서혁이 끼어들었다.
“무도회장에서 주운 남성용 장갑이 있습니다. 이거로 확인하면 됩니다.”
“아니, 왜 멋대로…….”
“지금까지 다른 귀족들도 모두 착용해서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까? 여기만 하지 않고 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하태헌이 장갑의 주인이었으니까 다른 귀족들이 확인하는 걸 굳이 말리지 않았을 뿐이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해하는데,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던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 테스트는 얼마든지 하겠다. 장갑이 내 손에 맞는다면 불만 없겠지?”
하태헌의 당당한 태도를 본 우서혁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당사자가 괜찮다면야. 우서혁, 장갑을 가져와.”
속으로 안도하며 우서혁에게 명령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하태헌이 이대로 장갑을 받아서 착용하기만 하면 큰 문제 없이 결혼까지 진행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그때였다.
“테스트를 막내만 하는 건 의미 없지 않나?”
여태 얌전히 구경만 하던 천사연이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장갑 테스트, 나도 참가하고 싶은데.”
“뭐?”
저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지? 왜 네가 갑자기 테스트를 하고 싶다고 해?
경악한 나를 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은 천사연이 재차 말했다.
“우리 멋있는 왕자님이랑 결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도전 안 하면 섭섭하겠지. 안 그런가, 둘째?”
“역시 형님은 저와 마음이 참 잘 맞습니다. 저도 참가하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저도 하고 싶네요.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다른 귀족들도 모두 테스트를 했다던데.”
그런 소문은 대체 언제 들은 거야? 비슷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천사연과 박건호, 권정한을 보고 있자니 두통이 절로 일었다.
세 명을 흐뭇하게 둘러본 민아린이 내게 물었다.
“첫째의 말대로 막내만 테스트받으면 섭섭하니까 위에 애들도 함께 받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으음…….”
“사실 마음 같아선 저도 하고 싶지만 남성용 장갑이라니 아쉽네요. 물론 왕자님이 장갑 상관없이 제가 괜찮으시면 저도 좋은데. 어떠세요?”
“…….”
등 뒤로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하태헌만 아니면 다 좋다는 민아린의 저 태도가 단순히 계모 역할이라서 그런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민아린의 압박을 이겨 내지 못한 나는 결국 항복했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모두 테스트받는 거로 해. 그 전에 첫째랑 막내와 따로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조용히 얘기를 나눌 만한 장소가 있나?”
“그러면 여기 응접실을 비워 드릴게요. 저희는 1층에 내려가 있을 테니 얘기를 끝내고 내려오세요.”
“우서혁, 너도 나가 있어.”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억지로 펴며 말하자 우서혁이 순순히 응접실을 나갔다.
우서혁에 이어서 민아린과 박건호, 권정한이 나가고 천사연과 하태헌만 남자마자 나는 곧장 천사연에게 달려들었다.
“자꾸 일 복잡해지게 초 칠래요?”
“아야.”
내게 두 번째로 멱살이 잡힌 천사연이 가증스럽게 아픈 척을 했다.
“초를 치다니. 그렇게 오해하면 슬픈데, 이결아.”
“이게 초 치는 게 아니면 뭔데요? 가뜩이나 우서혁 씨가 저를 왕자님이라고 여겨서 불편해 죽겠는데.”
“불편하다기엔 남의 비서를 아주 잘도 부려 먹던데. 명령 내리는 모습도 자연스럽고.”
“지금 동화가 신데렐라인 이상 하태헌 씨랑 제가 결혼을 해야 벗어날 수 있다는 거 알잖아요.”
“그럼 신데렐라뿐만 아니라 그 언니들이 유리 구두를 신어 본다는 내용도 알고 있겠군. 동화의 내용을 최대한 따르는 편이 더 안전할 거다.”
“…설마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겁니까? 헨젤과 그레텔은 아니었잖아요.”
“그땐 인원수가 세 명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파악이 안 되는 김우진을 만나려면 동화를 그대로 따라가는 게 좋겠지.”
생글거리는 천사연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옷을 놔주었다.
짜증 나지만 천사연의 의견이 옳았다. 위험을 줄이고 김우진을 만나기 위해서는 동화의 사소한 부분까지 생각해야 했다.
피곤해 죽겠네. 한숨을 내쉬고 하태헌을 돌아봤다.
“하태헌 씨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장갑을 낀다 해도 결국 하태헌 씨가 저와 결혼을 해야 할 텐데요.”
나와 천사연의 말다툼을 심드렁히 쳐다보던 하태헌이 내 물음에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이 대답했다.
“의미 없는 질문이군. 내가 싫어할 리가 있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눈만 깜빡이던 나는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조금 당황했다.
“그으… 싫지 않다니 다행입니다. 내려가서 장갑 착용하고 바로 결혼 얘기로 넘어가죠. 결혼하고 나면 동화가 바로 끝날 수 있으니 천천히 진행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김우진도 찾아봐야 하니까.”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서 천사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를 남겼다.
“동화 내용을 따라야 하니까 장갑을 껴 보는 건 이해하는데,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아시죠? 다들 정신 지배에 걸린 상황이라 문제가 터지면 수습이 더 힘든 거.”
“물론 잘 알고 있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환한 미소를 짓는 천사연의 모습이 영 찝찝했지만 일단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응접실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이제 내려가죠.”
***
우리가 1층으로 내려오자 중앙 거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기다리고 있던 우서혁이 근처에 대기 중인 기사 한 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가 고급스러운 보라색 쿠션 위에 올려진 검은 장갑을 들고 왔다.
“누구부터 착용하시겠습니까?”
“나부터 하지.”
천사연이 제일 먼저 나섰다. 장갑 안으로 천사연의 새하얗고 깨끗한 손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흠, 착용감이 나쁘지 않은데.”
“……?”
당연히 동화와 마찬가지로 하태헌을 제외한 사람들은 장갑이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천사연의 손에 얼추 비슷하게 맞는 장갑을 보고 입을 벌렸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얼추 맞는데?”
“자, 잠깐만.”
“두 번째는 나야.”
박건호가 냉큼 끼어들며 천사연이 벗은 장갑을 멋대로 착용했다.
천사연보다 더 하태헌과 비슷한 손을 가진 박건호도 무리 없이 장갑을 착용했다.
“괜찮은데? 그보다 사용한 천이 제법이군. 값어치가 꽤 나가겠어.”
“잠…….”
“다음은 저인가요?”
또다시 말리지 못한 채로 장갑은 권정한에게 넘어갔다. 웃는 낯으로 장갑을 낀 권정한이 제 손을 이리저리 돌려 봤다.
“조금 남긴 하지만 헐렁할 정도는 아니네요. 겉으로 보기에는 딱 맞아 보이죠?”
천사연에 이어 박건호와 권정한까지 큰 무리 없이 장갑을 착용하는 걸 허망하게 바라본 나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천사연에게 눈길을 돌렸다.
걱정하지 말라며?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천사연이 슬쩍 고개를 피했다. 그 사이 권정한에게서 장갑을 받은 하태헌 또한 손에 착용해 보았다. 당연히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나와 함께 장갑을 착용하는 것을 본 우서혁 또한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여기 오기 전에 들렀던 다른 귀족 집안의 남자들은 무도회에 참가하지 않았거나, 나이가 중년 이상이거나, 손이 너무 작거나 두툼해서 장갑이 맞지 않았다. 하태헌을 포함한 네 명이 모두 장갑을 착용한 건 이곳이 처음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되면…….”
걱정하지 말라며 호언장담을 하던 천사연이 태도를 바꿔서 수줍은 표정을 짓고는 내게 물었다.
“우리 넷 중에서 한 명을 고르시지요, 왕자님.”
거실 조명 아래에서 화사하게 빛나는 네 명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네 명 모두 기대감이 가득 든 눈동자를 하고서 내 선택을 기다렸다.
“어머, 재밌다.”
뒤에서 구경하던 민아린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별로 기쁘지 않은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즉시 입을 열었다.
“신데렐라.”
“…….”
“…….”
“…….”
내 싸늘하고 차가운 대답에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까인 세 명이 상처받든 말든 알 게 뭐야. 이 성가시고 귀찮은 놈들을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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