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00화 (300/394)

300화

쪼르륵, 티 포트를 타고 찻잔 안으로 쏟아진 홍차가 짙은 향을 풍겼다.

시종이 테이블 위에 홍차와 각양각색의 쿠키를 준비해 주고 방을 떠나갔다. 나는 부드러운 실크로 된 포엣 셔츠를 입은 채로 홍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렸다.

‘피곤해 죽겠네.’

무도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공간에서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터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잠을 모조리 설치고 말았다.

피곤해서 머리가 영 돌아가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푹 자고 일어나는 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침실을 찾아온 우서혁이 서류를 건네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저거라니. 얼굴에 티가 많이 나나?

“잠을 좀 못 잤어.”

“잠도 주무시지 못할 정도로 그 남성분이 보고 싶으십니까?”

“…….”

그럴 리가 있겠냐는 대답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지만 겨우 삼켜 내며 억지로 웃었다.

“뭐어…….”

차마 어제처럼 낯간지러운 소리를 다시 하고 싶진 않아서 대충 얼버무리며 서류 첫 장을 넘겼다.

묘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던 우서혁이 그에 맞춰서 설명을 시작했다.

“중앙 도시를 총 네 군데로 나눴습니다. A 구역부터 수색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깔끔하네.”

“그리고 좀 더 정확한 구분을 위해서 왕자님께 물건 하나를 빌리고 싶습니다.”

“혹시 장갑을 말하는 건가?”

“예. 남성분이 변장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장갑으로 손 크기를 재 보려고 합니다.”

나는 신데렐라 동화 내용을 떠올렸다. 원래라면 유리 구두일 텐데, 하태헌이 남자라서 가죽 장갑으로 변한 모양이다.

“그럼 장갑을 가지고 중앙 도시를 모조리 뒤져 볼 생각이야?”

“상대는 평민이 절대 구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있었으니 귀족 집안 위주로 찾아가 볼 예정입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잠깐. 중앙 도시를 다 돌아볼 거라면 나도 같이 가는 게 이득 아닌가?

이 공간 어딘가에 있을 팀원들과 만날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나도 갈게.”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성에서 기다리시면 그 남성분을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장갑을 가지고 같이 가야겠어.”

어떻게든 성을 벗어나기 위해 의견을 피력하자 잠시간 눈을 깜빡이던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빨리 만나고 싶으십니까?”

“뭐?”

또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아니, 우서혁 입장에서는 오해할 만한가?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나를 두고 서류를 다시 챙긴 우서혁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께서 외출하신다는 소식을 호위 기사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좋아. 바로 출발하자.”

사람들을 찾을 생각에 의욕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우서혁이 내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기다리십시오, 왕자님.”

우서혁이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끈을 묶지 않아 훤히 드러난 쇄골과 가슴 부근을 손으로 스치듯 만져 왔다.

“이 차림으로는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아…….”

“지금 시종을 부를 테니 외출복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저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드럽게 덧붙여 말한 우서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방을 나갔다. 그때까지 넋을 놓고 서 있던 나는 밀려오는 찝찝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느낌이…….

‘기분 탓이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서혁인데. 요즘 하태헌에 이어서 천사연까지 하도 난리라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

한숨을 내쉬며 뒤늦게나마 끈을 조여 묶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사람들이나 빨리 찾자.

***

“왕자님 마차다!”

“왕자님!”

“왕자님, 사랑해요!”

“하아…….”

마차 창문에 달린 커튼까지 꼭꼭 닫고서도 들려오는 외침에 나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역할이 동화 속 왕자님이라 그런지 가는 곳마다 인기가 너무 좋았다. 마차 밖으로 내려서 여기저기 좀 둘러보려던 내 계획은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버티지 못하고 실패했다.

저 사람들도 결국 정신 지배에 당한 피해자들일 텐데. 프라우스 신도단이 미술관에 사람을 끌어모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우서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좋게 생각하면 신선한 경험이긴 했다. 내가 어디 가서 이렇게 많은 사람한테 환영받아 보겠어. 좀 지치긴 하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음 구역이 마지막입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도시에 있는 귀족 집은 웬만하면 다 둘러봤으니 우서혁의 말대로 이제 남은 곳은 얼마 없었다.

‘슬슬 하태헌이 있는 집에 도착할 만한데.’

하태헌이 정말로 신데렐라라면 귀족 집 어딘가에서 구박받으며 지내고 있을 거다. 하태헌이 구박받는다니, 상상이 잘 안 가네.

동화 내용대로라면 계모와 의붓언니들에게 구박받다가 요정을 만나서 무도회장까지 오게 되는 거니까… 계모와 언니 역할을 한 사람도 만날 수 있으려나?

민아린이 계모나 의붓언니 역할 중 하나를 맡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하태헌뿐만 아니라 민아린까지 만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만난다고 해도 헨젤과 그레텔처럼 공간이 달라지면 어떡하지?

‘대비를 해야 해.’

공간이 바뀌면 다시 뿔뿔이 흩어질 거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해결 방법을 알아봐야 하는데.

고민에 빠진 나를 두고 착실하게 이동한 마차는 곧 붉은 지붕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이번 집은 남작가입니다. 무도회 초대장이 날아간 가문이니 한번 확인해 보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다만…….”

설명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린 우서혁이 이어 말했다.

“여기 가문은 좀 피곤한 성격들이 많으니 왕자님께서는 마차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피곤한 성격들이라고?

7시간 동안 허탕을 친 탓에 별 기대 없이 커튼을 살짝 걷어서 바깥을 살폈다. 마차 주변을 빽빽하게 호위 중인 기사들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이면 설마 하태헌인가?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봐도 상대는 얼굴만 딱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커튼과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자 그제야 뚱한 표정으로 기사단장과 대화하고 있는 하태헌이 제대로 보였다.

“하태헌 씨!”

“왕자님?”

드디어 찾았다! 6시간 만에 겨우 상봉한 하태헌이 반가워 급히 마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뒤에서 당황한 우서혁이 나를 부르며 뒤쫓아 왔다.

“한이결.”

“겨우 만났네요.”

내가 찾아올 거라고 예상했는지 하태헌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신데렐라인걸 눈치챘구나.

“별일 없었습니까?”

“그래. 너는?”

“저도 괜찮았습니다. 우서혁 씨와 같이 있어서 더 안전했어요.”

무도회장 때와 달리 낡은 옷을 입고 있는 하태헌은 다행히 다치거나 불편한 곳은 없어 보였다. 나는 뒤에 서 있는 우서혁과 기사단을 의식해서 소리를 살짝 낮춰 말했다.

“혹시 다른 팀원은 만난 적 없습니까? 레퀴엠 사람들이요.”

내 질문을 들은 하태헌이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찝찝해 보이기도 하고 복잡해 보이기도 하는… 이게 무슨 표정이지?

“만났다.”

“네? 누구요? 어디서요?”

나를 보며 망설이던 하태헌이 막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쿵쿵하는 여러 명의 발소리가 울리며 동시에 집 문이 벌컥 열렸다.

“왕자님이 오셨다는데, 우리 막내가 맞이하고 있나?”

“이런 누추한 곳에 왕자님이 오셨는데 밖에 세워 두고 있다니. 참 답답하군.”

“집 주변이 청소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조금 부끄럽네요.”

“……!”

하태헌의 등 너머로 문턱을 넘고 당당하게 등장하는 세 명을 본 나는 경악하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런 미친…….’

비슷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 채로 내게 척척 다가오는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반사적으로 하태헌의 팔을 붙잡고 몸을 숨기며 더듬더듬 물었다.

“호, 혹시 저 세 명이 의붓언니 역할입니까…?”

하태헌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정말이지 너무 끔찍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렇게 숨으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인데.”

바싹 긴장한 채로 하태헌의 품에 숨는 나를 본 천사연이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그 뒤로 박건호와 권정한도 능청스럽게 한마디씩 보탰다.

“막내랑 왕자님이랑 아주 각별한 사이인가 봅니다?”

“어젯밤에 일은 안 해 놓고 몰래 어딜 가나 했더니, 무도회가 목적이었나 보네요.”

“하아…….”

하태헌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오늘따라 유독 고달파 보였다.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며 하태헌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태헌 씨.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찾아봤을 텐데…….”

“미리 말 안 한 내 잘못도 있으니 사과할 필요 없다.”

“아주 둘만의 세계에 푹 빠졌군.”

우리의 대화를 듣던 천사연이 쯧쯧 혀를 찼다.

그게 너무 재수 없어서 이번에는 천사연에게 달려가 양손으로 멱살 잡듯이 옷을 붙잡았다. 그러자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헉, 하며 숨을 들이켰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겁니까?”

내가 달려들자 순순히 옷을 내어 준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오늘로 이틀째인가. 저번과 마찬가지로 눈을 뜨니 여기더군.”

“네 명 다 같이 이 집에서 눈을 떴습니까?”

“네 명 아니야.”

“네 명이 아니라고요? 설마 다섯 명?”

“응.”

“나머지 한 명은 누가…….”

“귀한 손님이 오셨네요.”

밝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친숙하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각또각, 구두를 신은 채로 문밖으로 여유롭게 걸어 나온 상대방이 날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왕자님.”

“…….”

그 인사에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됐다. 화려한 드레스와 우아하고 고상한 행동만으로도 민아린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민아린 씨가 계모구나…….’

계모 민아린과 의붓형제 천사연, 박건호, 권정한. 그리고 구박받는 막내 하태헌.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0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