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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9화 (299/394)
  • 299화

    압박에 못 이겨 하태헌의 손을 잡고 홀 중앙으로 향했다.

    우서혁과 거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하태헌에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하태헌 씨.”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괜찮다.”

    역시 하태헌도 천사연과 마찬가지로 정신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였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우서혁 씨를 포함해서 주변에 보이는 모두가 정신 지배에 당했습니다. 사실 우서혁 씨 외에 사람들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요.”

    얘기를 하는 사이에 음악이 변했다.

    방금보다 살짝 더 빨라진 템포의 음악을 들은 하태헌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내 손을 맞잡으며 반대 팔로 허리를 감싸 왔다.

    “하태헌 씨?”

    “일단 보는 눈이 많으니 춤을 춰야겠군. 설명은 추면서 듣도록 하지.”

    “그… 저는 춤을 추지 못합니다.”

    “적당히 따라와. 나도 잘 아는 건 아니니까 대충 시늉만 할 거다.”

    하태헌이 먼저 스텝을 밟으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긴장한 채로 하태헌을 따라 발을 이동했다.

    그래도 나름 전투계 A급이라 그런지 하태헌의 느릿한 움직임을 따라 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속도를 높이지 않자 악단이 눈치 빠르게 음악의 속도를 늦춰 줬다.

    덕분에 적당히 춤을 추며 대화도 할 수 있게 된 우리는 멈췄던 얘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보기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미술관 관람객이나 경매 참석자들인 것 같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애초에 처음 연결이 끊긴 김우진 능력자의 분신이 건물 외부에 있었다. 그러니 외부와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모조리 공간 속으로 들어왔을 거다.

    그 정체불명의 장막이 데우스 미술관 전체를 집어삼켰다는 뜻이었다.

    “이 공간은 동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확실한가?”

    “네. 저는 여기서 왕자를 하기 전에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헨젤이 됐었습니다. 그레텔은 민아린 씨였고요.”

    음악이 다시 템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우리도 그에 맞춰서 행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럼 이번이 두 번째라는 거군.”

    “맞습니다. 하태헌 씨는 이전의 기억이 없습니까?”

    “없다. 눈을 뜨니 이 공간이었으니까.”

    “이번 동화가 어느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나와 하태헌은 몸을 바싹 밀착한 채로 가뿐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좀 더 안정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내 반대편 손은 어느새 하태헌의 등에 올라가 있었다.

    “…헨젤과 그레텔에서는 어떻게 벗어났지?”

    내 질문에 찝찝한 표정을 지은 하태헌이 다른 질문을 해 왔다.

    “마녀가 빠져 죽는 화로에 천사연의 피를 넣었습니다. 천사연이 마녀 역할이었거든요.”

    “그럼 천사연도 이미 만났다는 거군.”

    “그건… 으앗.”

    하태헌이 내 허리를 붙잡은 채로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훅 숙였다. 허리가 뒤로 크게 꺾였다. 우리의 거리가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하태헌이 맞잡은 손의 손목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왔다.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마음에 안 드는데.”

    “헉……!”

    금방 허리를 세운 하태헌의 품에 안긴 나는 그에게 끌려가듯 움직였다. 어느새 음악은 아까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하태헌 씨. 무슨 동화인지 짐작 가는 거 있습니까?”

    “있다.”

    “그럼 말을 해 줘야 제가, 읏.”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고개를 숙이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하태헌이 중얼거렸다.

    “단 냄새가 나는데.”

    “아까 무슨… 향수를 뿌렸다고 들었는데 그 향인 것 같습니다.”

    어느새 음악이 끝나 가고 있었다.

    춤을 다 추고 나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지금 얘기를 다 끝내 놔야 하는데. 조바심이 든 내가 하태헌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하태헌 씨, 무슨 동화인지 알려 주세요.”

    “어차피 이제 알게 될 거다.”

    위를 힐끔 본 하태헌이 대답한 그 순간이었다. 음악이 끝난 동시에 큰 종소리가 홀에 가득 울려 퍼졌다.

    데엥, 뎅! 뒤를 돌아본 나는 그제야 위에 거대한 시계가 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시간은 정확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만 가야겠군.”

    쪽,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춰 온 하태헌이 허리를 놓아 주며 뒤로 물러섰다. 따듯한 체온이 사라지며 허전함이 밀려왔다.

    “자, 잠깐만요. 하태헌 씨!”

    내 부름에도 하태헌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하태헌을 급히 쫓아갔다.

    “왕자님!”

    “왕자님, 혼자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나를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며 하태헌을 따라 무도회장 정문을 힘차게 열었다. 그러자 아래로 길게 이어진 계단이 나타났다.

    누가 SS급 아니랄까 봐, 그 짧은 새에 하태헌은 어느새 계단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곳에는 묘하게 호박을 닮은 마차가 보였다.

    “하태헌 씨!”

    마지막으로 나를 올려다본 하태헌이 지체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그렇게 하태헌을 태우고 홀연히 떠나갔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왕자님!”

    하태헌이 나를 버리고 갔다… 허망하게 서 있는 내 뒤로 경비병과 시종들이 우르르 쫓아 나왔다.

    “왕자님.”

    우서혁이 계단에서 무언가를 주워 내밀었다. 무심코 받고 보니 검은 장갑이었다. 아까 춤출 때 본, 하태헌이 착용하고 있던 그 장갑이 확실했다.

    “계단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허…….”

    장갑을 쥔 채로 헛웃음을 지었다.

    정각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무도회장을 떠난 하태헌. 호박과 닮은 마차. 계단에 버려진 장갑.

    이 모든 것을 총합해 본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설마 했더니 진짜 신데렐라였던 거야?’

    ***

    “왕자님과 함께 춤을 췄던 남성은 현재 신원 파악이 어렵다고 합니다.”

    우서혁의 보고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런가.

    동화대로 진행하려면 난 지금부터 이 장갑을 증거로 하태헌을 찾아 나서야 한다.

    다만 이곳은 등장하는 사람이 많으니 다른 팀원들도 어딘가에 있을지 몰라 최대한 여기저기 뒤져 보고 싶기도 했다. 하태헌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나중에 찾아가도 됐을 텐데.

    “…죄송합니다, 왕자님.”

    “어? 뭐라고?”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사과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뒷짐을 진 채로 굳은 얼굴을 한 우서혁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신원이 불분명한 이를 무도회장에 들인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건 괜찮…….”

    “이번 일에 깊은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관련자는 모두 엄중히 벌하고, 저 또한 왕자님께서 주는 벌을 받겠습니다.”

    “아니, 무슨 벌까지… 난 정말 괜찮아.”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 상대가 위험한 인물이었으면 지금쯤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두렵습니다.”

    “…….”

    우서혁이 진심이 가득 느껴지는 말과 함께 눈가를 찌푸렸다. 그 모습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천사연에게는 이렇게까지 안 했던 것 같은데. 아, 나와 달리 천사연은 우서혁보다 강한 상사라서 그런가?

    ‘나를 자기보다 약한 상사라고 생각해서 이 정도로 신경 써 주는 걸지도.’

    어째 좀 씁쓸하네. 지금 우서혁은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라 천사연을 기억 못 하겠지만.

    머쓱하게 웃으며 어딘가 좀 의기소침해 보이는 우서혁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아무 일 없었으니까 된 거지. 그런 의미에서 나랑 춤을 춘 상대 좀 찾아 줄래?”

    “그건 당연합니다. 반드시 찾아내서 사형시키겠습니다.”

    뭐? 뭔 형?

    “자, 잠깐. 사형까지 할 필요가 있어?”

    “신분을 숨기고 무도회에 잠입한 거로도 모자라 왕자님과 직접 춤까지 췄으니 당연히 사형시켜야 합니다.”

    “…….”

    끔찍한 소리를 아주 당연하게 하는 우서혁의 행동에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여긴 행복만이 있는 동화 속이 아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정신 지배를 이용해서 우리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무대 위였다.

    ‘그냥 하태헌부터 빨리 만나야겠어.’

    다른 사람은 그 뒤에 생각해 보자. 팀원을 한 명이라도 모으는 게 우선이었다.

    그보다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이대로 뒀다가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하태헌을 두 눈으로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대한 온건한 방법으로 하태헌을 찾아내려면…….

    ‘미치겠네.’

    방법 하나를 떠올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해야 한다.

    “안 돼. 난 사형 반대해.”

    “왕자님?”

    “왜냐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

    “예?”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뜬 우서혁에게 재차 강조했다.

    “한눈에 반했으니까… 찾아 줘. 결혼할 거야.”

    남자랑 결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태헌의 역할이 신데렐라였으니 가능성이 있었다.

    아까 춤을 추겠다고 지목했을 때도 여자가 아니라는 지적 없이 넘어가기도 했고.

    “왕자님, 확인차 다시 여쭙겠습니다. 무도회장에서 함께 춤을 춘 그 남성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래. 그 남자 맞아. 나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

    죽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복잡한 기색으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던 우서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가 취향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예전에 분명 청초한 스타일의 여자가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아니면 정신 지배에 걸린 우서혁이 하는 착각인가?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취향이 변했나 봐. 아무튼 그 남자를 꼭 만나고 싶으니까 도와줘.”

    “…알겠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아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왜 그러지?

    “다만 결혼은 당장 진행하기에 복잡한 절차가 많으니 한 번 더 만나신 후에 결정하는 편이 어떻습니까?”

    “그것도 괜찮지. 만날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예. 그럼 내일 아침부터 도시 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응. 찾으면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함부로 대하지 마. 사형 그런 것도 안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행이다. 좀 창피하긴 해도 이거로 하태헌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니 한시름 덜었다.

    하태헌을 만나면 주변 상황 설명을 듣고 다른 팀원들도 어디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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