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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8화 (298/394)
  • 298화

    저택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과 2층은 방이 다섯 개로 나뉘어 있었고 지하에는 작은 감옥이 있었다.

    빵으로 배를 채우자 꾸벅꾸벅 조는 민아린에게 1층 침실을 내어 주고 나와 천사연은 저택 안을 샅샅이 살펴봤다.

    “은근히 넓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부분도 없고.”

    “여기까지 오면서 다른 사람을 마주친 적은 없나?”

    “없어. 다들 어디에 있는지 빨리 찾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태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더 걱정됐다.

    천사연이 설명해 준 대로 정신 지배에 걸려서 서로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여기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수록 위험해.’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권세현으로 변해서 개입 능력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불쑥 치솟는 불안감에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이 저택에서 쓸 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한이결.”

    서늘한 감촉이 입술에 닿아 왔다. 꼬리를 물던 나쁜 생각이 뚝 끊어지며 정신이 들었다.

    “침착해.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입술을 쓰다듬어 오는 천사연의 손길에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미안, 나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긴장해 봤자 시야만 좁아져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뻐근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사과하자 쓰게 웃은 천사연이 말했다.

    “사과하지 마. 내가 아쉬워서 막은 거니까.”

    “아쉽다고?”

    “입술에 상처라도 나면 나중에 키스할 때 아플 것 같아서.”

    “…….”

    이 자식이 또 이러네.

    그새 헛소리하는 천사연을 노려보며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쳐 냈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은 좀 풀렸다.

    1층과 2층에서 쓸 만한 정보를 찾아내지 못한 우리는 결국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큼 작은 감옥은 쇠창살로 이뤄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바싹 마른 동물 뼈가 널려 있었다. 동화에서 마녀가 헨젤을 가둬 두는 그 감옥이었다.

    ‘헨젤은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가둬 두고 그레텔은 부려 먹는다고 했지.’

    마녀는 결국 헨젤을 먹지 못하고 그레텔에게 밀쳐져서 화로에 빠져 죽는다. 그게 마녀의 최후였다.

    동화 내용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잠깐, 마녀의 최후가 그렇다면…….

    “화로.”

    “음?”

    “마녀가 화로에서 죽었잖아. 화로를 좀 더 살펴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솥이 놓여 있는 화로가 주방 안쪽에 있었지.”

    다시 1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아까 지나치듯 봤던 화로 앞으로 향했다. 장작이 타오르는 화로에 가까이 다가가자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정답인 것 같군.”

    “동화 자체가 힌트였어. 하지만 이 화로로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냥 부수면 되나? 잘못 건드리면 더 최악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 결단을 내려야 한다. 입가를 매만지며 화로를 노려보는데, 잠시 고민하던 천사연이 인벤토리에서 S급 검을 꺼내 들었다.

    “천사연?”

    “마녀는 저 화로에 빠져서 죽는다고 했으니 내가 나서야겠군.”

    미처 말리기도 전에 손바닥을 베어 낸 천사연이 피를 화로 안에 떨어뜨렸다. 화르륵, 불이 피를 머금고 붉게 타오르며 기운이 좀 더 강해졌다.

    “더 필요한가 본데.”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방식은…….”

    손바닥이 아닌 손목으로 향하는 검날에 놀란 나는 급히 천사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 천사연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걱정해 주는 건 좋긴 한데 지금은 어쩔 수 없어.”

    “피가 얼마나 필요한지 확실하지 않잖아.”

    “여길 벗어나려면 필요한 만큼 줘야겠지. 그나마 내가 마녀 역할이라서 다행이지 않나?”

    “…….”

    천사연이 맞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사람들의 안전을 고려하면 여기서 빨리 탈출하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이 불편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이 장소와 천사연의 몸에 상처를 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도 짜증스러웠다.

    혀를 차며 천사연의 손목을 붙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손목은 건들지 마. 지금은 민아린 씨가 능력을 써 주지도 못하잖아.”

    책에서 봤던 천사연의 폭주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실제로 겪었던 천사연은 저토록 담담한데 왜 내가 이토록 불편해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아무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리더의 뜻이 그렇다면야.”

    능청스러운 대답과 함께 검날이 손목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향했다.

    길게 베여서 피가 질금질금 새어 나오는 상처 바로 위에 검날이 다시 한번 스치고 지나갔다. 보기만 해도 쓰라린데, 제 손바닥을 베어 낸 천사연은 아무 표정 변화가 없다. 그만큼 익숙한 고통이라는 의미였다.

    투둑,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를 재차 삼켜 낸 화로에서 불이 치솟았다. 동시에 강한 기운이 확 퍼져 나오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모든 게 흔들리는 와중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액체가 되어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저택과 숲이 녹아내린 저편은 기절하기 전에 봤던 주황색 장막이 차 있었다.

    “흐윽…….”

    “한이결!”

    그걸 보자 강한 현기증과 함께 몸에 힘이 빠졌다.

    쓰러지는 나를 품에 안은 천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안 돼, 이러다간…….’

    천사연에게 안긴 채로 어떻게든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기절하듯 정신을 잃었다.

    ***

    향긋한 냄새가 코끝에서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으…….”

    “왕자님, 일어나셨어요?”

    찌뿌둥한 몸에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뜨자 어떤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흐릿한 시야에 눈을 비비려는데, 누군가가 기겁하며 나를 막았다.

    “어머, 왕자님! 그렇게 만지시면 안 돼요.”

    “……네?”

    왕… 뭐라고?

    놀라서 고개를 드니 메이드 복장을 한 낯선 여자 세 명이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여긴 또 어디지?’

    높다란 천장과 번쩍거리며 빛이 나는 새하얀 대리석 바닥, 황금으로 꾸며진 장식과 가구들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근처를 아무리 둘러봐도 천사연과 민아린은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주변을 살피는 내게 여자 한 명이 거울을 들고 왔다.

    “자. 여기 보세요, 왕자님.”

    거울에 앞머리를 모두 넘긴 한이결의 얼굴이 비쳤다.

    낡고 얇았던 옷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런저런 장식이 잔뜩 달린 제복으로 변해 있었다.

    “피부가 워낙 좋으셔서 화장이 금방 끝났어요.”

    “향수는 취향에 맞으신가요? 요즘 유행하는 향이랍니다.”

    “중요한 날인 만큼 너무 멋있으세요, 왕자님.”

    “…….”

    멀미 날 것 같아.

    매슥거리는 속을 느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자.

    아무래도 헨젤과 그레텔 동화는 화로에 천사연 피를 넣었을 때 끝이 난 모양이다. 지금은 다른 동화가 시작된 것 같고.

    사람들 복장이나 나를 왕자라고 부르는 걸 생각해 보면… 여긴 왕성인 건가? 그것만으로는 동화를 추측하기 힘든데.

    ‘정보가 더 필요해.’

    내 앞에 있는 메이드 세 명이 여기 공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짧게 헛기침하며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나만 바라보고 서 있는 메이드에게 슬쩍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똑똑, 깔끔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상대의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서혁 씨?”

    평소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 우서혁이 묵례했다.

    “왕자님, 준비 끝나셨습니까?”

    “아…….”

    반가운 감정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렇지, 지금은 정신 지배가…….

    그래도 낯선 장소에서 우서혁을 만나게 되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준비 다 됐습니다.”

    우서혁을 따라가면 뭔가 더 알게 될지도 모른다.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메이드와 우서혁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왕자님. 아랫것들에게 존댓말을 쓰시면 안 됩니다.”

    “아, 음.”

    아랫것들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라니… 왕자라서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암만 그래도 우서혁에게 반말을 쓰는 건 쉽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나를 잠자코 응시하던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준비되셨으면 무도회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그래.”

    난감해 죽겠네. 마른침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서혁을 따라 문으로 걷는 내 뒤에서 메이드들이 하이 톤으로 응원을 해 왔다.

    “잘 다녀오세요, 왕자님!”

    “좋은 인연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나중에 후기 들려주세요~!”

    “…….”

    대체 뭐지? 뭔데? 여기 무슨 동화 속인 건데?

    아까보다 배는 혼란스러워진 상태로 방을 나와 화려한 복도를 가로질러 거대한 문으로 걸어갔다. 문 양쪽에 서 있던 경비병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문 열겠습니다.”

    금장식으로 가득 채워진 문을 S급의 힘으로 쉽사리 열어 낸 우서혁이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정중한 손짓을 해 왔다.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억지로 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서혁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환한 빛과 함께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얗게 빛나는 샹들리에가 천장에 달린 넓은 홀이 펼쳐졌다. 무도회장으로 들어선 내게 아름다운 드레스와 예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왕자님이 오셨어.”

    “왕자님!”

    “왕자님, 오늘도 너무 잘생기셨다.”

    소곤거리는 소리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수십 명의 시선에 당장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왕자님. 안쪽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놨습니다.”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채지 못한 우서혁이 문을 닫으며 소리 낮춰 말했다.

    “아니면 바로 춤을 추시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상대를 짚어 주시면 됩니다.”

    춤이라니.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위였다. 질색하며 거절하려는 그때, 우서혁의 어깨 너머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하태헌 씨?”

    금색 자수가 들어간 사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분명 하태헌이었다. 하태헌도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저 남성이 마음에 드십니까?”

    “뭐?”

    하태헌에게 알은척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날 두고 우서혁이 먼저 움직였다.

    “왕자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받으신 분, 가까이 오십시오.”

    “자, 잠깐. 이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우서혁이 하태헌에게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내 실수로 무도회장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 하태헌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선택하신 분과 중앙으로 가셔서 춤을 추시면 됩니다.”

    심지어 중앙에서 춤까지 추란다. 하태헌과 마주 선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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