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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6화 (296/394)

296화

직원의 말대로 우리가 룸에 들어온 지 얼마 가지 않아 1층 홀에 불이 켜졌다.

참석자들이 2층으로 이동하는 동안 자리를 정리했는지 테이블이 모두 사라지고 정면에 반원 형태의 무대가 새로 생겨났다.

“저희 데우스 미술관 경매장을 찾아 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경매 시작을 알립니다.”

무대 위로 올라온 남자가 마이크를 든 채로 허리 숙여 인사를 해 왔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나비 가면을 쓴 진행자에게서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해 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천사연이 무대를 내려다보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아벨의 인형이군.”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상태였지만 아벨이 조종하는 인형 특유의 뻣뻣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우리야 이미 아벨의 능력을 알고 있는 데다 감각이 발달한 능력자였으니 바로 알아챌 수 있었지만 다른 참석자들은 진행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착각할 텐데.

“경매에 정상적인 물건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죠. 그럼 혹시… 미국에서 봤던 닥터가 만든 생명체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키메라 말인가.”

닥터가 죽기 전에 있었던 전투를 떠올린 하태헌이 혀를 찼다.

“그 정도로 몸집이 크거나 공격적인 건 나오지 않겠지만 키메라 자체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네. 사람 등에 몬스터 날개를 융합시킨 전적도 있으니까요.”

클럽 사건에서 만난 최가영. 그녀는 신도단에게 납치를 당해서 강제로 실험을 당했다고 했지. 최가영과 같은 피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참석자들은 그런 걸 모르는 일반인인데…….”

“일반인이라도 정신 나간 놈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안심할 수는 없다.”

그건… 맞긴 하지.

우리는 참석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키메라 같은 생명체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닌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그런 생명체가 경매에 나오게 된다면…….”

나와 하태헌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천사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얼마가 들든 내가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마.”

“…….”

천사연의 말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손에 팔려 가서 구경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우리가 사서 고쳐 줄 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 주자는 의미였다.

“첫 번째 경매 물품 공개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손짓하자 무대 뒤에서 직원이 바퀴 달린 작은 테이블을 끌고 왔다. 테이블 위에는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어깨를 바싹 굳힌 채로 무대에 집중했다.

“첫 번째 경매 물품은 바로 스위스 게이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골드 테라입니다.”

“……흙?”

불법 융합 생명체가 나올 거라 예상하던 나는 테이블 위에 웬 흙이 올려진 것을 발견하고 긴장이 탁 풀렸다.

하태헌도 나와 비슷한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천사연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흥미를 보였다.

“골드 테라는 그 어떤 식물도 건강하게 자라게 해 주는 흙으로 유명하죠. 아이템 재료로 활용 가능한 식물형 몬스터도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자,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대 위에 설치된 전광판에 새겨진 숫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각 룸에서 경매 물품을 보고 있는 참석자들이 리모컨의 붉은 버튼을 누른 것이다.

걱정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주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경매에 한숨을 내쉬며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저런 게 있습니까?”

“있기는 하지.”

웃으며 대답해 준 천사연이 턱을 괸 채로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옥상 정원이 성에 안 차서 고민이었는데.”

“설마 저걸 사려는 건 아니죠?”

“살 수도 있지 않나? 저 흙을 쓰면 한 달 걸릴 거 일주일로 단축할 수 있을 텐데.”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마세요.”

“흠… 그래. 나랑 결혼해 줄 세현이가 하지 말라면 안 해야지.”

“잠깐, 뭐요?”

상상도 못 한 발언에 입을 떡 벌리자 천사연이 눈썹 끝을 아래로 내리고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돈 관리를 해 주다니 부끄럽군… 약혼이라도 미리 올려야 할까 봐.”

“뭔 개소리를…….”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욕을 하려던 나는 가운데에 앉아 있는 하태헌의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아니, 왜 나한테…….’

누가 봐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천사연인데 왜 내게 도끼눈을 뜨는 건지 모르겠다.

억울해서 하태헌을 보며 고개를 휙휙 저어 봤지만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둘 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한이결.]

순식간에 가시방석이 된 자리에 식은땀만 흘리는데, 귀에 꽂아 놨던 이어 피스에서 김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응, 듣고 있어.”

좋은 타이밍이야, 김우진. 자연스럽게 하태헌에게서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분신이 제어되지 않아.]

“…무슨 뜻이야?”

[미술관 외부에 있는 분신과 연결이 끊겼어.]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어 피스를 통해 김우진의 말을 들은 천사연과 하태헌도 얼굴을 굳혔다.

“분신이 사라졌어?”

[아니. 그냥 연결이 끊겼어. 아마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 있을 거야.]

“분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확실한 거네.”

여우가 함께 있으니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는데. 이렇게 되면 여우 또한 위험할지도 모른다.

[응.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그러니까 조심해. 분신은 내가 지금 확인해 보러 갈 거야.]

“직접 간다고? 혼자서?”

[무슨 상황인지 보려고 일부러 분신을 해제 안 했어. 그러니까…….]

“기다려, 김우진. 혼자서는 안 돼.”

[…….]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 불안해진 내가 재차 외치자 심한 잡음과 함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 무언가, 한이결, 이건… 윽!]

[이결 씨! 미술관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이… 피해야…….]

치지직, 소음이 목소리를 뚫고 길게 울려 퍼졌다. 김우진에 이어 민아린의 목소리도 끝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연결이 끊어졌다.

“민아린 씨? 박건호 팀장님. 듣고 있는 사람 없습니까? 우서혁 씨. 권정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름을 계속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층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뭔가 잘못됐어요.”

그 순간, 유리 너머로 보이는 진행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벨의 인형이 나를 보며 입술을 길게 찢어 웃었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설마…….

“경매 자체가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였나?”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한 천사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태헌이 문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문이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쯧.”

잠긴 것을 알아챈 하태헌이 두말할 것 없이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쾅, 굉음과 함께 중앙이 일그러진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우리 막내는 성질머리가 참 거칠기도 하지.”

“검부터 빼 든 놈이 할 말인가?”

내 뒤를 따라 나오는 천사연의 손에는 정말로 S급 검이 들려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꺼낸 거지?

나는 사람 한 명 없는 조용한 복도를 둘러봤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이거 바로 천장을 뚫고 위로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한이결!”

하태헌이 내 팔을 붙잡아 뒤로 확 당겼다. 그제야 나는 위를 보느라고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저건…….”

주황색 불투명한 장막이 복도 저편에서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김우진과 민아린이 말했던 게 바로 저건가?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천사연 또한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지 급히 나와 하태헌을 뒤로 보내며 눈가를 좁혔다. 그런 와중에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장막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미술관 외부에 있었던 김우진 분신이 제일 먼저 장막에 당한 거라면…….”

저 장막은 애초부터 미술관 외부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프라우스 신도단이 노리는 건.

‘미술관 전체를 장막 속에 가두는 것.’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한이결의 기운을 사용했다. 후웅, 내 몸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바람이 날카롭게 휘몰아쳤다.

양쪽에서 장막이 좁혀 오는 탓에 도망칠 길이 위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위도 확실치 않았다.

그래도 여기 가만히 서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막에 먹히는 것보다야 나았다. 하태헌과 천사연을 바람으로 감싸고 천장을 뚫어 내려던 그때였다.

“어딜 도망가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복도 가득 퍼지며 방금까지 우리가 들어가 있던 룸에서 수십 개의 인형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인형이 꾸물거리며 몸에 달라붙어 바람을 방해했다.

“아하하하하!”

인형을 바람으로 베어 내도 끊임없이 몰려와 시야를 방해하고 몸을 짓눌렀다. 하태헌과 천사연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인형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태헌 씨!”

인형 때문에 나와 거리가 벌어진 하태헌이 주황색 장막에 먹혔다. 분명 방금까지 내 곁에 있던 하태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른편에 있던 천사연도 하태헌과 똑같이 모습이 사라졌다.

“윽…….”

천사연을 삼킨 장막이 내게로 밀려왔다.

파지직, 피부를 찌르는 정전기가 느껴지며 온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듯한 감각이 퍼졌다. 눈앞이 검게 물들며 정신이 뚝 끊어졌다.

***

“……나야 해.”

“음…….”

“일어나, 어서. 일어나야 해.”

희미한 의식 너머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날 걱정하고 있는 민아린의 얼굴이 나타났다.

“으, 민아린 씨?”

“일어났어? 괜찮아?”

내 어깨를 재차 흔드는 민아린의 행동에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들자 선명해진 시야에 낡은 옷을 입은 민아린이 가득 들어찼다. 그 뒤로 펼쳐진 흙바닥과 수풀도.

“여긴…….”

주황색 장막에 먹혔던 마지막을 기억해 낸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좁은 복도나 경매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숲이 가득했다. 당황한 내 곁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던 민아린이 입을 열었다.

“어떡해? 아버지랑 어머니는 벌써 집으로 돌아가셨나 봐.”

“……예?”

“저번이랑 마찬가지로 우리를 버린 게 틀림없어. 오빠, 우린 이제 어쩌면 좋아?”

“예?”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혼란에 빠진 나를 두고 혼자서 안절부절못하던 민아린이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는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렇지! 아까 오기 전에 빵 부스러기 떨어뜨렸잖아. 우리 그거 보고 찾아가면 되지 않을까? 저번에 돌멩이를 따라간 것처럼!”

“…….”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두통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빵 부스러기는 또 뭐야. 그리고 민아린이 왜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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