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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5화 (295/394)
  • 295화

    「데우스 미술관 경매 입장 시 주의 사항

    1. 입장 후에는 서로를 가명으로 불러 주십시오.

    2. 직원에게 가면을 받아 착용해 주십시오.

    3. 안내받은 룸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4. 경매 참여는 룸에 배치된 버튼을 이용해 주십시오.

    5. 위 사항을 어긴 이에게는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가면까지 쓰라고 하네요.”

    입장 후에는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데 얼굴까지 가리라니…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최대한 같이 다니는 편이 안전하겠군.”

    천사연도 카드에 적힌 내용이 영 거슬리는지 찝찝한 기색으로 카드를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미술관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직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세 분입니까?”

    “예.”

    “경매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뒤를 따라서 중앙 홀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향했다.

    ‘다른 통로를 이용하는 건가?’

    미리 알아 둔 지하 계단은 여전히 커다란 문으로 잠겨 있었다. 그 앞을 지나친 직원은 건물 가장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섰다.

    “타십시오.”

    다소 낡은 엘리베이터는 네 명이 간신히 올라탈 만큼 작았다. 그곳에 올라타자 직원은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우웅, 낡은 만큼 큰 소음과 함께 작동된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며 내려갔다.

    지하 3층에 도착하자 끼긱거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밖으로 드러난 복도는 굉장히 어둡고 좁았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내리자 직원은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복도를 둘러보던 나는 소리 낮춰 말했다.

    “지하 3층까지 내려올 줄 몰랐네요.”

    “이래저래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인데.”

    여유롭게 말한 천사연이 복도 끝에 서 있는 직원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저 문 너머가 경매가 진행되는 장소라는 것을 눈치챘다.

    “어서 오십시오. 입장을 위해 가면을 골라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이 다양한 가면이 올려진 트레이를 내밀었다. 대부분 눈만 가려지는 형태의 가면이었다.

    “이렇게 세 개가 제일 괜찮겠군.”

    뭐가 좋을지 고민하는 나와 심드렁한 하태헌을 두고서 천사연이 가면을 집어 들었다.

    너무 섣불리 고른 거 아니냐고 한 소리 하려던 나는 천사연이 고른 가면이 크기도 적당하고 시야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여간 눈썰미도 좋다니까.’

    셋 다 검은 가면이었지만 아무런 액세서리가 달리지 않은 천사연의 가면과 달리 하태헌의 가면은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고 내 건 금빛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가면을 착용하자 직원이 문을 열어 줬다.

    “들어가십시오.”

    거치적거리는 가면을 만지며 경매장으로 들어섰다. 가명으로 모자라서 가면까지 강요하는 주최 측 행동에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뒤따라 들어온 하태헌도 불쾌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경매보단 파티장 같은데.”

    넓은 홀에는 둥그런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 있고 그 사이로 수십 명의 사람이 가면을 착용한 채 샴페인을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내 예상과 달리 폐쇄적인 분위기는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뭔지는 몰라도 일이 복잡해지긴 했군.”

    파티장을 쭉 훑어본 하태헌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경매에 참석한 수십 명의 사람 중에서 능력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서빙을 하는 직원들마저도 모두 일반인이었다.

    “직원은 신도단이거나 정신 지배를 당했을 텐데, 경매 참석자들은 확신할 수가 없겠네요.”

    일반인이 있을지 모른다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많은 수가 모여들었을 줄이야.

    “게다가 지하 3층이라서 더 위험한… 잠깐, 뭐 합니까?”

    “보면 모르나? 샴페인 마시는데. 자, 하나씩 들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나와 하태헌을 두고 근처 테이블로 걸어간 천사연이 샴페인 잔을 하나씩 건네줬다.

    무심코 받아 든 나는 시종일관 느긋한 천사연의 모습에 눈가를 좁혔다.

    “지금 술이나 마실 때입니까?”

    “당장 뭐 하는 것도 없는데 술이라도 마셔야지, 세현아.”

    “예? 무, 무슨…….”

    이 자식이 지금 나를 뭐라고 부른 거야?

    자연스럽게 나를 세현이라고 부른 천사연이 당황하는 내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미소 지었다.

    “가명을 쓰라고 했으니 평소처럼 부를 수는 없지 않나?”

    “맞는 말이군.”

    빙글거리는 천사연을 서늘하게 노려보던 하태헌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다른 이름보다는 권세현이 편하겠지.”

    “아니, 제 가명을 왜 두 분이 멋대로…….”

    어이없어하는 내게 천사연이 물었다.

    “그럼 쓸 만한 다른 이름 있나?”

    “…있을 수도 있죠.”

    “저번에 우서혁과 박건호와 클럽에 잠입했을 때도 권세현을 사용한 거로 아는데.”

    “…….”

    반박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문 나를 사이에 두고 천사연과 하태헌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 부마스터는 가명을 뭐로 하고 싶나?”

    “그쪽 먼저 정하지.”

    “흠, 나는 그럼 세현이랑 비슷한 세연이라고 할까? 친형제처럼 보이도록. 부마스터는 세헌이 어떤가?”

    “너무 비슷한 것 같은데.”

    “잠깐 쓰고 말 가명인데 상관없지. 그보다 우리 세헌이는 이제 나한테 존대를 때려치운 건가? 반말이 아주 당연하게 나오네.”

    “어차피 내가 존댓말을 쓰든 말든 신경도 안 쓰면서 웃기는군.”

    “…두 분 싸우시는 거 아니죠?”

    진심으로 말다툼을 하는 건지 그냥 장난만 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하여튼 조용할 틈이 없네. 으르렁거리는 천사연과 하태헌을 두고 한숨을 내쉬는데, 착용해 둔 이어 피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이결 씨? 마스터? 들리세요?]

    민아린이었다. 나는 이어 피스의 마이크 기능을 작동시키고 샴페인을 마시는 척 잔을 입술에 댄 채로 대답했다.

    “잘 들립니다. 모두 도착하셨습니까?”

    [네. 방금 미술관에 입장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민아린에 이어 박건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문제요?”

    [관람객이 너무 많아. 주말인 걸 감안하더라도 인원수가 많아서 이유를 좀 찾아봐야겠군.]

    “이유라면… 신도단이 미술관 쪽에도 뭔가를 했다는 뜻입니까?”

    [좀 더 찾아봐야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제 예상으로는 관람객 대상으로 행사나 이벤트를 연 것 같아요.]

    “그런 거라면 미리 알아 둔 정보에 나오지 않았을까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

    이번에는 우서혁이 설명을 이었다.

    [특정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비공개 행사라면 알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우선 정보를 얻어 낼 시간 자체가 부족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살펴보시고 새로 발견된 정보가 있으면 말씀 주세요. 다들 조심하시고요.”

    [Roger.]

    능청스러운 박건호의 대답을 끝으로 더 들려오는 내용은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어 피스를 통해 말을 전해 들은 천사연과 하태헌도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여기도 사람이 많은데 위층에 있는 미술관 관람객도 많다니. 이상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만약 프라우스 신도단이 마음먹고 이 건물을 무너뜨리기라도 한다면 피해자가 상당하겠군.”

    “…아니, 단순히 그런 목적이라면 경매를 여는 수고도 하지 않았을 거다.”

    샴페인 잔을 비운 천사연이 빈 잔을 테이블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동시에 파티장에 모든 불이 한순간에 꺼졌다.

    [저희 데우스 미술관 경매장을 찾아 주신 귀빈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갑자기 불이 꺼져서 놀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안내 메시지가 크게 울려 퍼졌다.

    [곧 경매가 시작되오니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2층 룸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우리가 지나왔던 파티장 문이 다시 열리고 직원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그들에게선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능력자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A급 네 명, B급 여섯 명.’

    총 열 명의 능력자로 이뤄진 직원들이 참가자들을 찾아가 2층으로 인솔하기 시작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참가자들은 별다른 항의 없이 이동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우리에게도 직원 한 명이 따라붙었다. 서로 시선을 나눈 우리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순순히 2층으로 향했다.

    아직 프라우스 신도단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일을 꾸미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불이 꺼져 있어서 더 위험하겠어.’

    2층으로 올라가자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복도에 문 여러 개가 보였다. 중간 부근에서 문 하나를 연 직원이 우리에게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다.

    앞장선 하태헌이 먼저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룸 안은 1인용 소파 세 개와 술이 진열된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경매는 참석자들의 이동이 끝나는 대로 시작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런 높낮이 없이 기계처럼 설명을 쏟아 낸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테이블 구석에 올려진 붉은 버튼이 달린 리모컨을 발견한 천사연이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입을 열었다.

    “각자 룸에 넣어 놓고 경매를 시작한다라… 멀쩡한 물건이 나올 리가 없겠군.”

    룸 전면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아까까지 우리가 있었던 파티장이 훤히 보였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참석자 중에 신원이 파악된 사람 있습니까?”

    “아쉽게도 없어. 다만 외국인이 중간마다 섞여 있는 건 확실해.”

    “신도단이 엮인 경매니까 우리가 모르는 참석자들의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우리 세헌 동생은 다른 의견 있나?”

    “내가 왜 동생이지?”

    천사연의 장난기 담긴 질문에 내 옆에 앉은 하태헌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이 두 사람 또 시작이네.

    “당연히 동생이지. 내가 첫째니까. 참고로 우리 세현이가 막내.”

    “예? 잠깐만요, 제가 왜 막내입니까?”

    그렇게 따진다면 내가 첫째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어이없어서 반박하자 천사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럼?”

    “잊었습니까? 제 실제 나이는 35살인데요.”

    “그래 봤자 나보다 어리지 않나?”

    “왜 어립니까? 그쪽은…….”

    천사연의 나이를 떠올리던 나는 뒤늦게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천사연은 어차피 시간을 반복하며 살아서 실제 나이가 큰 의미가 없었다.

    난감해진 내가 입을 다물자 천사연이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뭐?”

    “…아닙니다. 그럼 제가 둘째 하겠습니다.”

    “좋지. 그럼 세헌이가 막내가 되는 건가? 둘 다 형이라고 불러 봐.”

    “…….”

    “…….”

    이게 아닌데.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짚은 하태헌과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은 나는 턱을 괸 채로 시선을 회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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