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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4화 (294/394)
  • 294화

    천사연과는 이번 경매 일이 끝나면 길드 23층 방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협의했다.

    그걸 들은 다른 사람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이삼일 더 머물다가 돌아가겠다는 의견을 뻔뻔하게 내세웠다.

    “정말 양심이라고는 없는 놈들이군.”

    천사연이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으로 투덜거리자 박건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스터를 어떻게 믿고 한이결 능력자만 두고 갑니까?”

    그 말에 예전에 나와 셋이 박건호의 집에 찾아갔던 일을 떠올린 우서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박건호 팀장은 양심이 없는 게 맞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우서혁 비서?”

    “무슨 뜻인지 알면서 뭘 또 묻습니까.”

    “그만하세요.”

    “우서혁 비서가 먼저 했어.”

    보다 못해서 말리자 박건호가 냉큼 우서혁을 탓했다. 어린애들도 있는데 뭐 하는 거야, 진짜.

    “나이를 어디로 먹는 건가, 박건호 팀장?”

    “일단 얼굴은 아닌 듯합니다.”

    천사연의 타박에 박건호가 자신의 매끈한 얼굴을 만지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들은 천사연이 결국 미간의 힘을 풀고 픽 웃었다.

    ‘아…….’

    소파에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가슴에 따듯한 무언가가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두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천사연이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이루어진 시간이었다. 이전 시간대에서 김우진이 죽었을 때, 천사연이 그를 포기하고 계속 살아갔다면 이 순간은 오지 않았겠지.

    경매 사건이 끝날 때까지 모두가 이 집에서 지내는 것도 천사연이 원치 않았다면 진작에 모두 내쫓았을 거다. 그러지 않고 받아들인 건… 천사연도 우리가 이 집에 있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모두와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천사연이 아주 오랫동안 염원해 온 미래였다. 나도 같은 마음이고.

    턱을 괸 채로 천사연을 지켜보는데, 누군가가 내 볼을 툭 건드려 왔다. 나는 그제야 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태헌 씨?”

    “…….”

    눈가를 찌푸린 채로 내 입가를 손끝으로 툭 건드린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미술관에 어떻게 들어갈지 마지막으로 정하도록 하지. 이제 이틀 뒤면 경매일이니.”

    “동의합니다.”

    하태헌의 얘기에 반색한 우서혁이 들고 있던 서류를 각자에게 넘겼다.

    그곳에는 미술관 내부 사진과 작품 목록, 전체적인 분위기 등 다양한 설명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미술관의 정보를 최대한 모아 봤습니다. 경매가 진행되는 위치 또한 확인됐습니다.”

    “팀장님이 알려 준 대로 지하에서 진행하는군요.”

    첫 번째 장을 순식간에 속독한 권정한이 두 번째 장으로 넘기며 가장 중요한 내용을 짚어 줬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막혀 있어서 내부는 알 수 없습니다. 경매장은 당일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을 듯합니다.”

    불안한 기색으로 서류를 보던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 분만 가도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하고요.”

    “지하라서 더 무섭네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이게 필요하겠군.”

    자연스럽게 끼어든 천사연이 시계를 두드려서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든 것은 인원수에 맞게 준비된 이어 피스였다.

    “오늘 막 도착했지. 경매장에 참여하는 팀과 위층에서 미술관을 지킬 팀으로 나뉘어서 움직여야 하니 이게 필요할 거다.”

    “무전용 이어폰이군요. 좋네요.”

    나는 그중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귀에 꽂는 물건인 만큼 크기가 작은 데다 검은색이라 눈에 쉽게 띄지 않을 듯했다.

    “안심하긴 이르다.”

    나처럼 이어 피스를 체크한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겪었던 그 공간. 게이트와 똑같이 모든 전자 기기가 먹통이 되더군.”

    “음…….”

    “그 공간이 칼리라는 존재의 피로 만들어졌다면, 이번 경매 사건이나 이후에도 언제든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거다.”

    나 또한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장은 해결 방법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합류하는 게 최선입니다. 만약 건물 전체에 문제가 생긴다면 비전투 멤버인 민아린 씨와 권정한을 잘 지켜 주세요. 여우도 맡기고 가겠습니다.”

    “합류 지점을 정해 두는 게 낫겠군.”

    “중앙 홀로 모이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 셋은 지하로 내려가긴 해도 제 바람 능력과 SS급 두 분이 함께 가니 건물이 무너지거나 전투가 벌어져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중앙 홀이면 가장 넓고 출구 바로 앞이니 확실히 무난해 보이는군. 일단 그곳으로 하지.”

    내 대답에 박건호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미국에서처럼 새로운 공간에 들어간다 해도 모두 다 같이 이동한다면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커진다. 안전하기도 하고.

    테이블에 놓인 이어 피스를 보자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틀. 부디 우리가 이번 일도 잘 이겨 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이틀 뒤 토요일 오전, 경매 참석을 위해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한 나와 천사연, 하태헌은 정장을 맞춰 입었다.

    경매에 참여해야 하는 우리와 달리 비교적 간편한 옷차림을 한 다른 이들도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중에서 김우진만 내가 예전에 썼던 체인징 아이템을 건네받았다.

    천사연과 하태헌, 나를 제외한 사람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가 김우진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체인징 아이템으로 머리와 눈 색을 바꾸고 마스크를 쓸 예정이다.

    “사용 방법은 알고 있지?”

    “응.”

    체인징 아이템을 손에 쥔 김우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주 간단한 대화였지만 나와 김우진 사이에서는 지울 수 없는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오해를 풀기 위해 방에서 얘기를 나눈 이후로 김우진은 내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당연히 속을 터놓은 대화도 없었다.

    쓰게 웃은 나는 어깨에 올라앉아 있는 여우도 김우진 분신의 품으로 보냈다. 평소라면 내게 당연히 안겨 왔을 분신도 김우진과 마찬가지로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여우는 기운에 민감하니까 분신하고 같이 있으면 여러 도움이 될 거야.”

    건물 밖에서 정찰하는 역할을 맡은 김우진의 분신은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내 말에 순순히 여우를 데려간 분신이 별 불만 없는 기색으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여우를 질색하던 이전의 행동은 온데간데없었다. 피익, 여우도 그게 제법 당황스러운지 내 눈치를 살피며 얌전히 분신 곁을 맴돌았다.

    “민아린 씨와 권정한 잘 지켜 줘.”

    “걱정하지 마.”

    나와 김우진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은 여전했지만, 지금은 우선 코앞에 다가온 경매 사건부터 처리해야 했다. 이것만 끝나면 김우진과 천천히 얘기해 볼 시간이 다시 오겠지.

    “나도 이만 가 보마.”

    우리가 모여 있는 현관으로 엘로힘이 걸어왔다. 지난 일주일간 경매장에 관한 정보를 얻어 주기 위해 우리 곁에 남아 있던 엘로힘도 이제는 엘라하의 곁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미술관에 신도단이 있다는 걸 알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칼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은 엘로힘과 엘라하의 힘으로도 생각을 읽지 못한다. 덕분에 미술관에 배치된 직원의 대부분이 프라우스 신도단의 일원인 것을 구분해 낼 수 있었다.

    “몸조심하거라.”

    마지막으로 나를 꼭 안아 준 엘로힘이 인사와 함께 떠나갔다.

    나와 천사연, 하태헌 또한 구두를 신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뒤따라오세요.”

    경매 시작 시각에 맞춰서 우리 셋은 먼저 미술관으로 향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30분 정도 간격을 두고 출발할 계획이었다.

    적의 계획이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은 상황이니 될 수 있는 한 정보를 숨기며 조심히 행동해야 했다.

    집을 나온 우리는 곧장 차에 올라탔다. 운전은 하태헌이 맡았고 나와 천사연은 우서혁이 구해다 준 미술관 정보를 다시 한번 살폈다.

    ‘역시 일주일은 너무 촉박했나.’

    레퀴엠과 로헌이 힘을 합쳐서 최대한 모아 놓은 정보였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이어 피스도 결국 하태헌이 지적한 문제의 해결점이 되어 주진 못했고.

    나는 예전에 호텔에서 열린 관리 본부 주최 파티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파티장 바닥 전체에 이동 아이템이 발동해서 굴업도 섬 게이트 속으로 끌려갔던 사건.

    ‘이번에도 비슷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건가?’

    책에서 본 바로는 칼리는 천사연의 시간이 되돌아간 시점부터 6개월간 잠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시간대에서는 벌써 깨어났겠지.

    칼리도 세계에 과하게 끼어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 프라우스 신도단을 이용하겠지만… 피를 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도 엘한테 피를 받아야 하나?”

    “뭐?”

    옆에서 서류를 보던 천사연이 그걸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운전하던 하태헌도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칼리 피를 뽑아서 여기저기에 써먹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 여자에게 따로 대가를 치르고 있을 거다. 네가 내 과거를 보고 대가를 치렀듯이.”

    “감당할 만한 대가면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흠… 그렇게 궁금하면 다음에 물어봐.”

    천사연이 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대꾸했다. 어쩐지 놀리는 느낌인데…….

    그사이 강남 거리로 진입한 차는 얼마 가지 않아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미술관 정문 앞에 서 있던 직원이 차가 멈춰 서자 곧장 다가왔다.

    미리 챙겨 온 이어 피스를 귀에 착용한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직원이 깍듯하게 인사를 해 오며 물었다.

    “미술관 관람 예약자입니까?”

    “초대받고 왔습니다.”

    초대장을 내밀자 예상했다는 듯한 태도로 순순히 받아 든 직원이 초대장을 확인 후 우리에게 뻣뻣한 종이로 된 카드를 한 장씩 나눠 줬다.

    “경매장 입장 시 주의 사항입니다. 반드시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다른 직원이 안내를 도와드릴 겁니다.”

    주의 사항이라고? 찝찝함에 눈가를 좁히자 직원이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길게 찢어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

    우리 뒤로도 차가 줄줄이 들어섰다. 하나같이 외제 차인 걸 보아 평범한 미술관 관람객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해가 기울면서 생긴 노을빛에 직원이 나눠 준 카드가 검붉은색으로 변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카드 내용을 본 하태헌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가명을 사용하고 직원이 안내한 룸에서만 있어야 한다고?”

    “…그나마 세 명이 와서 다행이네요.”

    네 명이 왔으면 룸 하나당 두 명씩 들어가야 했을 거다. 한숨을 내쉬며 다른 사항들도 읽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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