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74. 미술관 경매장
피이익, 픽!
칭얼거리는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거실로 들어갔다.
김우진이 거실에 떨어트리고 간 핸드폰을 대신 챙긴 나는 뒤따라온 천사연에게 물었다.
“김우진 방, 처음에 지정해 준 곳 그대로야?”
“그대로긴 하지.”
“무슨 일이에요?”
여우의 울음소리를 들은 민아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 옆에는 엘로힘도 함께였다.
피익, 여우가 내 옆에 붙어 있는 천사연을 피해서 엘로힘의 어깨 위로 도망쳤다.
“혹시 김우진이 어디로 갔는지 봤습니까?”
“우진 씨요? 글쎄요? 아까까지 주변에 있던 것 같은데 사라지셨네요.”
“그 붉은 머리 아이라면 방에 있단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엘로힘이 대신 대답했다. 잠시 뜸을 들인 엘로힘이 이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 줄까?”
“…아닙니다.”
워낙 복잡한 상황이다 보니 그 제안에 아주 잠깐 혹하긴 했다. 하지만 김우진에게 예의가 아니었으니 깔끔하게 거절했다.
“굳이 찾아갈 필요가 있나?”
“사고는 그쪽이 쳐 놓고 그런 소리가 나오세요?”
“마스터, 사고 치셨어요?”
내 타박에도 천사연은 여전히 별일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지금 찾아가면 불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 될 텐데.”
“그건 나도 동의한단다, 세현아.”
“그럴 리가요.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을 테니 대화로 풀어야 합니다.”
“이상한 오해요?”
우리 셋의 대화를 가운데에 서서 듣던 민아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런. 너무 쓸데없이 많은 걸 말해 버렸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최대한 돌려 설명했다.
“별건 아닙니다. 그냥 천사연 마스터랑 정원에서 잠깐 대화를 좀 했는데…….”
“좋은 데이트였지.”
“조용히 하세요. 대화를 좀 했는데, 음, 김우진이 그걸 보고 오해를 해서요.”
“무슨 오해를 했는데요?”
“…….”
“이결 씨?”
대답할 거리가 궁색해진 나는 본능적으로 민아린의 시선을 회피했다. 웃는 얼굴로 나와 민아린을 지켜보던 천사연이 끼어들었다.
“나랑 한이결 능력자가 스킨십을 하는 걸 김우진 능력자가 봤더군.”
“네에?”
“이런 미친, 그걸 왜 말해요?”
“이왕 얘기를 꺼낸 거 솔직하게 알려 줘야 하지 않나?”
나와 동시에 경악한 민아린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선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그럼 마스터와 이결 씨 두 분… 여, 연…….”
“연애 안 합니다.”
“사귀는 사이…….”
“안 사귑니다.”
이럴 줄 알았지. 한숨과 함께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민아린이 더욱 혼란에 빠졌다.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스킨십은 왜…?”
그건 나도 궁금한 사항이다.
“열심히 유혹하는 중인데 영 넘어오질 않는군. 오히려 더 까칠해진 것 같고.”
“그게 세현이의 매력이기도 하지.”
“두 분 다 그만 놀리시죠.”
천사연이나 엘로힘이나 이럴 때면 하는 짓이 아주 똑같았다. 나란히 서서 빙글거리는 둘을 무시하고 민아린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대단한 걸 한 건 아니고… 아무튼 김우진이 오해를 해서 풀어 줘야 합니다. 놀라기도 했을 거고요.”
남자끼리 입을 맞추는 장면을 코앞에서 봤으니 많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특히 김우진은 이런 쪽으로 순수해서 더 충격이 클 텐데.
김우진을 붙잡고 해명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답답했다.
“아하.”
상황을 대충 이해한 민아린이 고민하듯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그런 거라면 우진 씨에게 잠깐 시간을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예?”
“역시 민아린 힐러도 나와 같은 의견이군.”
“아니, 왜요?”
난감한 기색으로 나와 천사연을 번갈아 보던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오해하고 있는 건 풀어야겠죠. 하지만 우진 씨도 진정할 시간은 필요할 것 같아서요. 2시간 정도 있다가 찾아가는 건 어떠세요?”
“아…….”
진정할 시간이라.
그러고 보면 나는 김우진과 오해를 풀 생각만 했지, 충격받은 김우진의 상황은 조금도 배려해 주지 않았다.
민아린 덕분에 내 잘못을 깨달은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린 씨 의견이 맞습니다. 제가 성급했네요. 2시간 정도 뒤에 찾아가서 핸드폰 돌려주고 대화하겠습니다.”
“네.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민아린과 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자 천사연이 짐짓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똑같은 말을 내가 먼저 했는데. 매정하기도 하지.”
“그게 어떻게 똑같습니까?”
“같은 말이라도 어감이 너무 다르지 않았니?”
내 마음을 엘로힘이 대변해 줬다. 엘로힘의 어깨 위에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던 여우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꼬리를 살랑거렸다.
***
2시간 뒤에 김우진의 핸드폰을 들고 방문 앞에 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김우진에게 시간을 준 건 좋은데, 나도 그만큼 기다리면서 온갖 잡생각이 든 탓인지 긴장감이 늘어났다.
굳게 닫힌 문을 똑똑 노크하자 아주 살짝 열렸다. 손 한 뼘만큼 열린 문틈 사이로 김우진이 나를 바라봤다.
“안녕, 김우진.”
“…….”
최대한 무해해 보이도록 웃으며 묻자 김우진이 머뭇거렸다. 방 안에 불이 꺼져 있어서 그런지 문틈으로 보이는 김우진의 얼굴 또한 무척 어두웠다.
‘골목길에 숨은 길고양이 같네.’
내 눈치만 보며 문을 쉽사리 열어 주지 않는 모습에 들고 있던 김우진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자. 아까 이거 떨어트리고 갔잖아.”
“…….”
“얘기 좀 하자.”
그제야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방 안은 협탁 위에 올려진 작은 스탠드 조명 말고는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김우진은 편해 보이니 굳이 켜진 않았다.
“불은 왜 껐어? 일찍 자려고?”
“그냥…….”
핸드폰을 돌려주며 묻자 김우진이 시선을 피하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
“…….”
그걸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까 정원에서 본 천사연과 내 모습은 오해라고 얘기를 해야 하는데… 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자 김우진 또한 입을 꾹 다물었다.
‘어렵네.’
김우진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봐서는 아주 단단히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안 되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설명하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막 설명하려던 그때였다.
“…사귀는 거야?”
“뭐?”
나보다 먼저 입을 연 김우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마스터랑 사귀는 거야?”
“아니야.”
“하, 하지만…….”
김우진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아린과 마찬가지로 사귀지 않는데 왜 입을 맞추고 있던 건지 궁금한 거겠지.
“아무 사이 아니야. 네가 본 건… 그… 천사연이 멋대로 한 거야.”
“멋대로 한 거라고?”
“응.”
김우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천천히 손을 뻗어 팔을 잡았다. 다행히 녀석은 뿌리치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해. 근데 진짜 아니야.”
“그럼 로헌 부마스터는?”
“어?”
“로헌 부마스터, 그 사람하고는 사귀는 거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갑자기 하태헌이 왜 나오는 거지? 설마 하태헌의 감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안 사귀어. 아무하고도 연애 안 해.”
단호하게 대답을 해 줘도 김우진은 끝까지 내 시선을 피했다.
“남자끼리 그런… 장면을 봐서 기분 나빴지? 미안.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내 사과를 들은 김우진이 드디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김우진이 발긋한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 없어. 내가 널 어떻게… 기분 나빠 해?”
“김우진.”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잔뜩 속상한 기색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던 김우진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몸을 바싹 굳힌 그가 창백한 안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김우진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무언가를 포기하듯 어깨를 축 내렸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웃었다.
“그때 자리를 피한 건 좀 놀라서 그랬어. 널 기분 나쁘게 본 적 없어.”
“…….”
김우진이 내게 잡힌 팔을 부드럽게 빼냈다. 그가 이런 웃음을 짓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거짓말하고 있잖아…….’
어떤 게 거짓인지, 왜 이렇게 슬퍼하는 건지 알고 싶었지만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서글픈 감정이 담긴 미소가 가슴에 아프도록 박혀 왔다.
“얘기 끝났으면 난 좀 쉬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래. 알겠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내게 김우진은 대화의 끝을 알렸다.
원했던 대로 오해를 풀었는데도 상황은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암울했다. 나는 김우진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고 김우진은 내게 설명해 주고 싶지 않아 보였다.
“잘 자, 한이결.”
차마 방을 나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게 김우진이 인사를 보내왔다. 김우진을 붙잡고 뭐라도 더 말을 해 봐야 할지 갈등하던 나는 그 인사에 마음이 꺾였다.
결국 아무런 시도도 못 해 보고 방에서 쫓겨난 나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아린이 곧장 다가와 속삭였다.
“왜 그래요? 잘 안됐어요?”
“아뇨, 일단 오해는 풀었는데…….”
목덜미를 쓸어 만진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민아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근데 지금으로선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서요.”
“음…….”
안타까운 미소를 지은 민아린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우진 씨도 여러 생각이 있으시겠죠. 며칠 기다리면 마음 잘 추스르고 얘기해 줄 거예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상관없다. 김우진 마음이고 생각이었으니 당사자가 정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
그러나 묘한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았다. 사람 관계는 복잡해서 무조건 배려해 주는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은 건가?
하지만 이미 대화를 끝내고 방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서 김우진을 헤집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서 굳게 닫힌 김우진의 방문을 보며 고민했다.
‘됐다,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자.’
민아린의 말처럼 시간은 있으니 우선 기다려 보자.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김우진의 방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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