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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2화 (292/394)
  • 292화

    소파에 앉아서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바라보던 박건호가 정적을 뚫고 입을 열었다.

    “한이결 능력자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마스터?”

    “그…….”

    “아뇨! 아닌데요?”

    혹여 천사연이 쓸데없는 소리라도 할까 봐 재빨리 말을 끊어 냈다.

    나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태블릿PC를 주워 들고 뒤에 있는 천사연에게 넘겨줬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사진이 보고 싶었으면 말씀을 하시지. 자, 가져가서 편하게 보시죠.”

    “이런.”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면 어떡합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세요.”

    픽 웃은 천사연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명심하도록 하지.”

    “크흠, 그럼… 회의 계속합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미술관 얘기로 돌아가려는데, 민아린이 애쓴다는 표정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어쩐지… 어제 깨어난 후로 한참이나 방에서 안 나오시길래 뭔가 했는데…….”

    “…대화를 좀 했습니다. 천사연 마스터의 과거이니 당사자와 할 얘기가 있어서요.”

    내가 천사연의 책을 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엘로힘에게 프라우스 신도단과 칼리, 천사연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 들어 둔 상태였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노려보고 있는 하태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화 주제를 다시 한번 돌렸다.

    “경매장은 저와 하태헌 씨, 천사연 마스터 셋이 가는 편이 제일 좋아 보입니다.”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노력을 알아준 우서혁이 작은 한숨과 함께 질문을 해 왔다. 내게 받은 태블릿PC를 다시 우서혁에게 돌려준 천사연이 말했다.

    “그러니 이렇게 세 명이 가야지. SS급 둘과 등급 외 능력자 한 명이라면 그만큼 안전할 테니.”

    천사연도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경매장 내부에 아벨이 조종하는 인형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마엘이 직접 나타날 수도 있으니 정신 지배로부터 안전한 우리 셋이 직접 가는 편이 나았다.

    “하태헌 씨도 동의하세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나와 천사연을 번갈아 보던 하태헌이 내 물음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를 받았으니 피할 생각은 없다. 내가 보기에도 세 명이 적당할 것 같고.”

    “흠,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위에서 대기하면 되겠습니까?”

    “네. 경매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신호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우진.”

    박건호의 말에 대답한 나는 멍하니 서 있는 김우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으, 응?”

    “분신이랑 따로 움직일 수 있겠어? 건물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살펴야 하는데.”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면 가능해.”

    “그럼 부탁할게.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본다면 신도단의 움직임을 더 확실히 체크할 수 있을 겁니다.”

    내 설명을 들으며 태블릿PC를 조작하던 우서혁이 말문을 열었다.

    “남은 일주일 동안 미술관과 경매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모으겠습니다. 또한 외부인을 고용해서 미술관 관람객으로 보내보도록 하죠.”

    “부탁드립니다.”

    닥터가 죽은 후로 내내 조용했던 프라우스 신도단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목적이 있는진 몰라도 먼저 초대장을 보내온 이상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칼리의 피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커.’

    미국에서 닥터가 만들어 낸 공간과 비슷한 무언가를 또 만들었을 수도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천사연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겠지.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부디 남은 일주일간 쓸 만한 정보가 모이기를 바랐다.

    ***

    서늘한 가을밤 공기가 피부에 닿아 왔다.

    피이익, 픽!

    슬리퍼를 신고 정원으로 나서자 여우가 살랑살랑 따라오며 기분 좋게 울었다.

    천사연의 집에 온 지는 열흘이 넘었지만 정원 구경을 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밤하늘 중앙에 떠 있는 초승달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이라니. 새삼 대단하네.

    커다란 저택의 창고 방에서 지내던 천사연의 어린 시절이 기억났다. 클로에가 구해 준 낡은 사무실에서 혼자 잠자리에 들던 때도. 그러자 이만큼 성공한 지금의 천사연이 좀 대견해졌다.

    ‘대견하다니, 내가 무슨 아빠도 아니고…….’

    천사연이 들으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헛웃음을 지으며 정원을 걸었다.

    피익! 픽!

    내내 방 안에만 있던 여우는 한껏 신이 나서 주변을 날아다녔다.

    아까 있었던 일로 사람들이 자꾸 나와 천사연의 눈치를 살피는 탓에 갑갑해져서 바람 좀 쐴 겸 나온 건데 여우가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이야. 진작 데리고 나올걸.

    ‘근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거지?’

    친한 사람들만 있다 보니 나도 편하고 여우도 숨을 필요 없어서 여러모로 좋았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천사연의 집이었다.

    애초에 책을 보는 동안만 지내려고 온 거였으니 당장 내일이라도 길드 방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길드에 있는 방도 잠깐 지내는 곳일 뿐이다. 나는 레퀴엠 소속도 아니었으니 언젠가는 나가 줘야 할 텐데.

    프라우스 신도단의 문제가 해결되면 돈을 모아서 단칸방이라도 얻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피이익!

    혼자 저편까지 날아가서 놀던 여우가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내 품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반사적으로 여우를 안아 주자마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차림이 너무 가볍지 않나?”

    천사연이 다가와 팔에 걸쳐 두고 있던 카디건을 건네줬다. 흰 티셔츠에 파자마 바지만 입고 있던 터라 고맙게 받아 입었다.

    “잠깐 나온 거야. 구경이나 좀 하려고.”

    “그리 넓지 않아서 딱히 볼 건 없을 텐데.”

    “이만하면 넓은 거지. 그리고 정원 있는 거 자체가 좋잖아.”

    천사연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품에 안긴 여우가 불만을 담아서 꼬리를 휙휙 흔들었다. 그러고는 내 팔에 얼굴을 푹 박았다.

    “다른 사람들은?”

    “몇 명은 방에 있을 거고… 엘로힘과 민아린 힐러는 주방에.”

    그 둘이 같이?

    선한 얼굴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엘로힘과 민아린이 절로 떠올랐다. 의외로 잘 어울리네…….

    아무튼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천사연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나 언제 돌아가?”

    “음?”

    “나 길드로 언제 돌아가냐고. 책도 다 봤으니까 여기 있을 필요 없잖아.”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물어본 건데, 얘기를 들은 천사연의 표정은 굉장히 복잡미묘했다.

    눈을 깜빡이며 잠시간 가만히 서 있던 천사연이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돌아가야 하지?”

    “뭐?”

    “나한테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쫓아냈으면 하는 건가?”

    오히려 나한테 되물어 오는 천사연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긴 안전을 위해 잠깐 들른 거고 원래 지내는 곳은 레퀴엠 23층이었잖아. 그래서…….”

    “그래서, 내가 나가라고 하면 나갈 거라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고?”

    내 말을 끊어 낸 천사연이 쓰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섰다.

    정원과 이어진 테라스 창문으로 흘러나온 거실 불빛에 천사연의 얼굴 반절이 환하게 비쳤다.

    “단순하게 의견을 묻는 거라면 물론 대답해 줄 수 있어. 가지 마, 한이결. 내 집에 있어. 계속.”

    “…….”

    “하지만 넌 거절하겠지.”

    “…난 네가 준비해 준 23층 방이면 충분해.”

    “그래.”

    천사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허리가 긴장으로 굳으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해졌다.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던 천사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감정을 어제 일로 눈치챈 거 아니었나?”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이제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차이는 건가 해서.”

    능청스러운 대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피익, 나와 천사연의 대화가 길어지자 안겨 있던 여우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널 차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냐. 지금 그런 상황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잖아.”

    “그럼 내가 하고 싶을 때 키스해도 괜찮다는 건가?”

    “헛소리 좀 그만해라.”

    그간 멀쩡하다 했더니 또 이러네.

    질색하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천사연이 내 볼을 살살 쓰다듬어 왔다. 하루 사이에 스킨십이 부쩍 늘어난 천사연의 모습이 영 껄끄러웠다.

    “너무하군. 아까부터 열심히 참고 있는데.”

    “하지 마.”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천사연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싱긋 웃었다.

    그걸 보자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장난기를 가득 담은 미소가 엄청나게 수상했다.

    “일단 놓…….”

    쪽!

    내 얼굴을 붙잡고 있는 천사연의 손부터 뿌리치려던 그 순간, 입술에 닿아 오는 간질간질한 감촉과 함께 뽀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사연, 이 미친놈이 냅다 입을 맞춰 온 것이다. 기가 막혀서 넋을 놓은 내게 재차 쪽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한 천사연이 그제야 얼굴을 놔줬다.

    피이익! 피익!

    졸지에 내게 안긴 채로 나와 천사연이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게 된 여우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너 진짜 미쳤냐?”

    “왜? 키스는 하지 말라고 해서 대신 뽀뽀한 건데.”

    “장난 그만 쳐. 다음에 또 이러면 나도 더 안 참을…….”

    이를 꽉 깨물고 진지하게 한 소리 하려던 나는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천사연도 고개를 돌려 거실을 확인했다.

    “아…….”

    테라스 창문 너머 거실에서 우리를 보고 서 있던 김우진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덜그럭,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우진 못지않게 나 또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방금 천사연이 나한테 입 맞추는걸… 본 거야?

    나와 천사연, 김우진 사이로 숨이 막히도록 오싹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려는데, 김우진이 몸을 휙 돌리고는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런.”

    “…….”

    내게 등을 돌리기 직전에 마주친 김우진의 눈동자는 경악과 당혹스러운 감정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큰일 났다…….’

    그대로 굳어 버린 나를 두고 천사연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들켰군.”

    “…개자식아!”

    결국 폭발한 내가 주먹을 쥐고 어깨를 강하게 후려치자 천사연이 가식적인 목소리로 아야, 하더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도 정말 몰랐어.”

    “SS급이 저 거리에 사람이 있는 걸 몰랐다고?”

    “응. 너한테 집중하느라고.”

    “그 입 좀 다물어, 제발.”

    피익! 피익!

    오해했을 게 뻔한 김우진과 충격을 받고 계속 우는 여우, 뻔뻔한 천사연의 행동에 두통이 밀려왔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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