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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89화 (289/394)
  • 289화

    73. 시곗바늘을 넘어서

    천사연은 한이결이 가진 A급 바람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생각해 놨다. 하지만 모든 계획은 한이결을 만난 그 순간에 무너졌다.

    예상과 달리 한이결은 지나치게 예민했고, 감정적인 데다 병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한이결을 길드로 영입해서 함께 싸우려던 천사연은 그를 하태헌이 게이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유인하거나 프라우스 신도단의 정보를 모아 오는 역할로 변경했다.

    천사연의 생각과는 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한이결을 살려서 데려온 건 제법 이득이었다.

    한이결이 자잘한 일들을 처리해 준 덕분에 우서혁은 다른 신체 변형 능력자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장을 갈 수 있었다.

    천사연은 로헌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고 SS급 게이트를 가져올 수 있게 됐다.

    초반에는 한이결이 자꾸 자살하는 바람에 통제하기 어려웠지만, 여동생을 인질로 삼은 뒤로는 그 문제도 해결됐으니 상황이 좋아졌다…고 여긴 그때였다.

    한이결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천사연에게 과하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주변 상황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천사연에게 집착하는 행동 때문에 천사연은 그 수많은 시간 중에서 처음으로 남자와의 추문이 생겼다.

    「상황이 귀찮아졌군.」

    한이결의 정신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이용한 대가였다. 뒤늦게 상담이나 치료를 받게 해 주려고 해도 프라우스 신도단의 일에 엮여 있으니 그마저도 어려웠다.

    한이결이라는 패를 버릴까, 계속 사용할까. 갈림길에서 천사연은 결국 한이결을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인들이 죽는 것보다야 자신이 피해받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그즈음 천사연은 꿈으로 찾아온 엘로힘에게 새로운 부탁을 했다.

    「하태헌을 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앞뒤 설명 없이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천사연의 모습에 묘한 표정으로 잠시간 서 있던 엘로힘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태헌이라는 인간에게 우리를 소개해 줄 셈이구나. 어째서지? 그랬다간 그도 우리에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건 하태헌이 결정할 겁니다.」

    하태헌을 통해서 엘로힘과 엘라하의 도움을 더 받아 내는 동시에, 하태헌이 혼자 게이트로 들어가 코트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이미 하태헌의 기록도 남기고 있지 않습니까?」

    「……알겠다.」

    천사연의 말에 부정하지 않은 엘로힘이 동의했다.

    나는 엘로힘과 엘라하가 남기고 있다는 하태헌의 기록이 이후에 내가 보게 될 ‘어비스’임을 눈치챘다. 그간 천사연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신도단과 여러 번 부딪힌 하태헌을 새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이 어비스에 나온 시간대라면…….’

    어비스는 시기상 내가 한이결이 되기 바로 직전의 시간대였다.

    그건 곧…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천사연의 책이 끝나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

    나는 어느새 우리가 만나게 될 시간대와 비슷해진 천사연을 천천히 살펴봤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천사연이 힘들어할 때는 미래 시간대의 천사연이 보고 싶었는데, 책이 끝나 갈 때가 되자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본다는 게 이런 걸까. 책을 끝까지 보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씁쓸하면서도 가슴 속이 답답했다.

    「이걸로… 헉, 충분….」

    「…….」

    「나를, 오래도록… 기억…….」

    예전에 한이결의 책에서 봤듯이, 한이결은 천사연과 아벨의 싸움에 끼어들어 그대로 사망했다.

    카렌의 낫에 상체가 깊게 베인 한이결은 마지막까지 집착 어린 말을 뱉어 내고는 죽어 버렸다.

    「하아…….」

    시체를 잠시간 내려다보던 천사연은 검을 재차 다잡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이결이 죽어도 천사연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천사연의 요청을 들어준 엘로힘은 자신을 찾아온 하태헌에게 다양한 정보를 알려 줬고, 덕분에 하태헌은 코트와 더불어 프라우스 신도단의 정체를 그 어느 시간대보다 많이 알게 됐다.

    이전과는 다르게 천사연과 친분을 조금도 나누지 않은 하태헌은 자기 나름대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신도단을 추적하고 싸웠다. 천사연은 한이결이 죽은 이후로는 직접 신도단을 알아보러 다니느라 길드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이결과의 추문이나 더러운 소문도 내버려 뒀다.

    계약 기간이 끝난 민아린은 이제껏 겪어 온 수많은 시간대와 달리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로헌으로 옮겨 갔다. 천사연은 붙잡지 않았다.

    천사연에게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셀 수 없이 반복해 온 세계는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무너지고 있었고, 천사연은 조용히 미쳐 가고 있었다.

    차라리 SS급 게이트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힘들어하던 때가 나았다. 그때는 최소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천사연은… 좋지 않았다. 여러 의미로.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다.」

    김우진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날, 천사연은 꿈에서 엘로힘을 만났다. 엘로힘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남은 기회가 많지 않아.」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끌려간 김우진은 시체로 돌아왔다. 김우진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천사연이 끊임없이 해 온 갈등을 엘로힘이 알아챘다.

    「모두를 살리려는 건… 욕심일 수도 있다, 아이야.」

    김우진을 포기하자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엘로힘의 선택이 맞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지키면 김우진만이 아니라 수억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으니까.

    「한 번만…….」

    한참을 대답 없이 서서 땅을 덮은 검은 흙을 바라보던 천사연이 시선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보겠습니다.」

    「…….」

    「이후에는 누가 죽어도 다시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세계가 끝나 간다는 건 저도 느꼈으니까.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천사연의 머릿속에 떠도는 많은 생각을 차분히 읽어 낸 엘로힘이 한발 물러섰다.

    「알겠다.」

    꿈에서 깬 천사연은 혼자 대표실에 남아 야경을 내려다봤다. 비가 쏟아져 물방울이 맺힌 창문 너머로 불빛이 이리저리 번졌다.

    약 30분가량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던 천사연이 인벤토리에서 릴리스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검날을 목에 가져다 댔다.

    천사연은 이제까지 총 289번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방금 막 290번을 채웠다.

    다시 10월의 대표실에서 깨어난 천사연은 이전과 같이 움직였다.

    한이결을 만나서 자살을 막아 냈고, 동생이 살아 있다고 거짓말했으며, 차수연을 납치하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길드가 아닌 호텔에 보내 놓았다.

    일을 마치고 호텔 방으로 이동한 천사연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는 김우진에게 명령했다.

    「한이결 데려와.」

    「네.」

    천사연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방문이 열리며 미간을 찌푸린 김우진이 한이결을 밀어 넣었다.

    「……팔에 그건 뭐지?」

    방을 구경하는 한이결의 뒤로 막 씻고 나온 천사연이 상처를 발견하고 물었다. 한이결은 어딘가 놀란 기색으로 천사연을 마주했다.

    앞에 펼쳐진 모든 게 굉장히 익숙했다. 나는 이 뒤에 천사연이 뭐라고 말할지도 알고 있었다.

    「뽑아 버리기 전에 눈 깔지.」

    내가 겪었던 상황이니까.

    「팔에 그건 뭐냐고 물었는데.」

    한이결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신경 꺼.」

    「…….」

    천사연이 미간을 좁혔다.

    시간을 반복하면서 한이결을 어느 정도 파악한 천사연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한이결의 모습이 꽤 당황스러웠다.

    반대로 나는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창피해졌다.

    ‘…내가 저랬나?’

    그래도 나름 한이결인 척 연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저 정도로 티가 났을 줄이야.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문제만 생기는구나.

    한이결의 이상 행동을 본 천사연은 단숨에 의심을 품었다. 수백 번 시간을 되돌리면서 여러 능력자를 만나 본 천사연에게 하루아침 달라진 한이결은 너무나도 수상했다.

    「듣자 하니 ‘홍염의 여제’가 내일 오후 중에 G7 구역을 클리어하고 게이트로 나온다는군.」

    그래서 일부러 ‘차수연’이 아닌 ‘홍염의 여제’라는 별명을 언급했다. 한이결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이결은 눈을 깔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딱히 반응이 없었다.

    ‘저 때 홍염의 여제가 누군지 떠올리느라고 머리 엄청 굴렸는데…….’

    결국 기억 못 하고 뉴스 보고 찾았지만.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지?」

    천사연의 축객령에 한이결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누가 잡을세라 재빨리 방을 나가 버렸다.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해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 한이결의 등을 넋을 놓고 응시하던 천사연이 무심코 꺼낸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이내 호텔인 걸 깨닫고 반으로 뚝 부러트렸다.

    「……뭐지?」

    평소와는 다른 한이결이 어쩐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천사연은 불쾌한 낯을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천사연은 이내 한이결을 더 지켜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사소한 문제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그만큼 이번 시간은 완벽해야 하고, 완벽하게 만들 것이다.

    각오가 담긴 천사연의 생각이 들려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변이 점차 검게 물들어 갔다. 공간이 사라지고 천사연의 생각 또한 더는 들리지 않았다.

    책이 끝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속절없이 떨어졌다.

    추락하는 감각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천사연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들기 직전, 천사연이 갑자기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천사연.”

    시선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그걸 마지막으로 모든 게 어둠에 삼켜졌다.

    몸이 끝도 없이 추락한다. 어느 순간부터 화려한 빛무리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비명이 나올 만큼 큰 충격이 찾아왔다.

    빛이 여러 차례 번쩍거렸다. 지나치게 강한 빛과 고통에 버티지 못하고 정신이 뚝 끊어졌다.

    그리고…….

    “정신 차려.”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을 움찔 떨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으…….”

    뻐근한 감각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바싹 마른 목구멍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자 나를 감싸고 있는 황금색 빛무리가 보였다. 천사연의 책은 반으로 펼쳐진 채로 종이가 아래로 오도록 가슴에 올려져 있었으며, 몸은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기력을 많이 써서 회복하려면 좀 걸리니까 격하게 움직이지 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내게 아까 그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뒤늦게 고개를 숙여 상대를 확인한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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