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네가 게이트에서 만난 이가 누군지는 알려 주기 어렵구나.」
예상했던 대로 천사연은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즉시 꿈속에서 엘로힘을 만나 내 정체를 물어봤다.
천사연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다 보고 있던 엘로힘은 별다른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미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쪽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까?」
「글쎄.」
처음보다 풀이 모두 메마르고 어두운 하늘이 되어 버린 꿈속을 둘러보며 엘로힘이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제대로 된 답을 주시죠.」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도 미래의 일을 다 알지는 못한단다.」
바다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에 엘로힘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하지만 굉장히 흥미롭구나. 누군가가 네 시간에 그렇게 개입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목적으로 개입했다는 겁니까?」
「목적이라면 이미 나오지 않았니. 네가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러니 출구를 찾아 주고 바로 사라진 거겠지.」
「…그게 다일 리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돕는다는 건 그리 쉽게…….」
「그 인간이 네게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게 느껴졌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천사연의 모습에 엘로힘이 쓰게 웃었다.
「아무 대가 없는 악의가 있는 것처럼 선의도 그렇단다.」
「…….」
「좋게 생각하렴. 덕분에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게 됐으니까.」
영 찝찝하면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 물어보면 될 것 같구나. 이어지는 엘로힘의 말에 천사연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이번 일을 통해서 천사연과 권세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 과거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천사연은 처음 권세현을 만났다. 누구나 알아챌 정도로 크게 당황하며 권세현을 ‘아마도 아는 사람’이라고 설명했었고.
결국 따지고 보면 공간에서 만난 권세현은 지금의 내가 아니었으니 천사연이 잘못 짚은 거였지만…….
‘이후에 권세현에겐 관심을 줄이고 내게 달라붙었으니까…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던 건가.’
눈치 하나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빠른 놈이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그러고 보면 책을 보기 직전에 이런 말도 했었지.
-과거의 나도 잘 부탁해, 한이결.
정말 다 알고 있었구나. 남은 괜히 끼어들어서 과거 망쳐 놓을까 봐 걱정했는데 좀 재수 없다.
‘뭐, 귀띔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긴 하지.’
어쨌든 별문제 없이 잘 끝나서 다행이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천사연의 과거를 지켜봤다.
처음으로 S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성공한 천사연은 밀려드는 인터뷰와 회의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SS급 게이트에서 사망했던 터라 클리어 이후는 천사연도 처음 겪는 시간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네.’
어차피 내가 돕지 않았어도 천사연은 언젠가 게이트를 클리어했을 거다.
천사연이 아무리 죽고 싶고, 모든 걸 끝내고 싶다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했으니까.
천사연에게 있어서 죽음은 어떤 탈출구도 될 수 없었다. 그는 칼리를 이길 때까지 쳇바퀴를 도는 쥐처럼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새삼 자신의 시간이 제 것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이 났다.
「이 길이 가장 정답에 근접한 것 같군.」
SS급 게이트를 클리어해 낸 레퀴엠 길드의 위상은 이전보다 한층 높아졌다. 천사연도 무기를 두 개나 얻어 냈으니 꽤 이득이었다.
이제 남은 건 로헌과의 관계 회복이었다. 앞으로의 싸움은 프라우스라는 단체를 막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 그만큼 힘 있는 협력자가 필요했다.
「하태헌뿐만 아니라 이주하 마스터의 신뢰도 중요해.」
국내 1위 길드와 2위 길드가 협력한다면 그만큼 힘도 커지겠지. 천사연은 새로 맞이한 시간대에서 계획을 정리했다.
***
하태헌의 신뢰를 얻어 내는 일은 천사연의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이주하와 친선 관계를 맺기보다도 더 까다로웠다.
하태헌의 처지에서는 천사연이 불편할 만했다. 하태헌의 올곧은 기질을 한눈에 알아본 천사연과 달리 하태헌에게 천사연은 경계할 대상이었다.
무엇보다 처한 상황으로 인해 뭐든 숨기고 보는 천사연의 행동과 성격을 하태헌은 굉장히 불편하게 여겼다.
‘이런 부분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네.’
물론 하태헌이 거부한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천사연이 아니었다.
하태헌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말거나 이미 제 동료 목록에 넣어 둔 천사연은 그에게 줄 만한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칼리와 연관된 이들이 아니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엘로힘과 엘라하 덕분에 로헌 길드 소유의 게이트에서 숨겨진 아이템이 나온다는 정보를 알아 낸 천사연은 하태헌과 함께 그곳에서 SS급 코트를 얻어 냈다.
코트를 하태헌에게 넘긴 천사연은 제가 가진 검을 두고 고민했다. S급 검과 SS급 릴리스의 검. 이런저런 상황을 따져 본 천사연은 릴리스의 검 또한 하태헌에게 넘겨줬다.
S급 검을 오래 써 와서 익숙하기도 하고, 자신보다 약한 하태헌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넘겨준 것이다. 하태헌은 여러 번 거절했지만 천사연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받아들였다.
시간이 흘러갔다. SS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지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천사연은 프라우스 신도단과 여러 차례 부딪쳤고 하태헌 또한 그 전투에 휘말려 천사연을 돕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렇게 6개월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하태헌.」
프라우스 신도단의 습격이었다. 그 어떤 때보다 많은 숫자가 몰려와 천사연마저도 왼팔을 잃을 정도로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하태헌은 제게 쏟아지는 수십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양팔과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간 채로 죽어 있는 하태헌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천사연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SS급 코트와 검을 가진 하태헌은 프라우스 신도단의 표적이 되었다. 그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결과를 가져왔다.
팔과 협력자를 동시에 잃은 천사연은 잠시 고민했다.
아직 자신이 죽지도 않았고 레퀴엠 길드도 멀쩡했으니 더 노력하면 이 시간대에서 무언가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다.」
하태헌이 죽은 그 순간부터 이 시간도 더는 의미 없게 느껴졌다. 제 길드 사람이 아닌 하태헌의 죽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는 자신도 몰랐다.
하태헌을 살리고 협력을 얻어 내기 위한 노력이 죽음으로 되돌아왔다. 천사연은 하태헌 또한 살아 있는 시간을 지켜 내고 싶었다.
결정을 내린 천사연은 하태헌의 시체 옆에 놓인 릴리스의 검을 들고 제 목을 그었다. 두 번째 자살이었다.
34번째 시간에서 눈을 뜬 천사연은 다시 한번 SS급 게이트를 들어갔다. 내가 알려 준 대로 릴리스를 죽이고 클리어팀을 구해 낸 그는 이번에도 릴리스의 검을 챙겨 나왔다.
대신 이번에는 하태헌에게 바로 주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다가 나중에 넘겼다. 하태헌에게 많은 것을 준다고 해서 그게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파라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며 눈앞의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천사연이 10월로 돌아와 눈을 뜨는 횟수도 계속해서 쌓여 갔다.
35, 36, 37… 55, 56, 57번째.
짙은 피 냄새와 정면에서 몰려오는 검은 가면을 쓴 능력자들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벗어날 방도가 있을까?」
신도단을 베어 낸 천사연이 초조한 얼굴로 생각했다.
「내가 또 실수했다.」
이전에도 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서재 구석에 떨어져 있던 붉은 책. 겉에 써진 57이라는 숫자는 천사연이 시간을 반복한 횟수였다.
「그런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줄까 한다.」
「그만둬, 천사연!」
사마엘에게 박건호가 죽자 천사연은 손목을 그어 내며 폭주를 시작했다.
자신을 막아서는 하태헌을 뿌리치고 신도단을 향해 달려든 천사연은 끝내 사마엘을 죽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폭주를 견디지 못하고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사망했다.
58번째 시간. 처음으로 사마엘을 죽이는 것을 성공한 천사연은 실낱같은 희망을 느꼈다.
그렇게 다시 59, 60, 61…….
숫자가 늘어날수록 천사연이 죽는 타이밍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모든 신도단을 죽이고 칼리를 만나서 강제로 시간이 되돌아온 적도 있었고, 길드원이나 하태헌이 죽어서 바로 자살한 적도 많았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천사연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으로 점차 변해 갔다. 권태롭고 회의적이며 냉정한 성격이 점점 강하게 드러났다.
10월로 돌아온 횟수가 200번을 한참 넘어섰을 때였다. 웬만한 가능성과 사건들을 모두 겪은 천사연은 이전에 하태헌을 데려왔을 때처럼 새로운 누군가가 이 시간대에 끼어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로 해야 하지?」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나 엮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다시 시간이 돌아와 10월 그날로 눈을 떴다.
소파에 앉아서 피곤한 낯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천사연의 곁으로 우서혁이 다가왔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천사연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살핀 우서혁이 들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C12 구역 피해자의 상태입니다. 동생 쪽인 한이연은 사망했고, 한이결은 아직 회복 중입니다.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한이결이라는 남자는 각성했다고 합니다.」
「…잠깐, 각성했다고?」
200번을 넘게 들어온 대화를 심드렁하게 듣던 천사연은 뒤늦게 한이결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서류를 받아들고 한이결의 대한 정보를 살폈다.
한이결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우서혁이 덧붙여 설명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아서 어떤 능력으로 각성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말씀 주시면 깨어나는 대로 간단한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천사연은 이미 한이결이 바람 능력자로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람 능력자라. 바람 능력은 숫자가 적은 자연계 능력 중에서도 가장 희귀했다. 게다가 A급이니 제 편으로 끌어들이면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결정을 내린 천사연이 서류를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가 보지. 내일 잠깐 자리 비울 테니까 알아 둬.」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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