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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87화 (287/394)

287화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해 주마, 침입자 놈들!』

릴리스가 고양이처럼 샛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들었다. 천사연이 든 S급 검과 릴리스의 SS급 검이 허공에서 강하게 부딪쳤다.

매섭게 몰아치는 릴리스의 공격에 천사연이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겨우 잡으며 힘겹게 받아쳤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옆에 끼고 싸워 본 적 없는 천사연은 내 존재가 꽤 불편해 보였다.

그래도 시간을 반복하면서 수없이 싸워 온 덕분인지 오래가지 않아 어느 정도 적응한 그는 제 허벅지를 노리고 들어오는 릴리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콰직, 릴리스가 든 검이 바닥을 부쉈다.

천사연이 손목을 돌려 검의 궤도를 바꿨다. 릴리스 또한 천사연의 공격을 피해 내며 귀가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를 흘렸다.

『계속 그렇게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잡히면 두 다리를 뽑아 버릴 거야! 머리는 잘라서 큰 유리병에 넣어 줄게!』

날개를 이용해 공중을 날며 공간 제약 없이 공격을 해 오는 릴리스와 나를 안고서 열심히 두 발로 뛰어다니는 천사연의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건 우리였다. 실제로 천사연은 두 팔과 허리 부근에 칼에 베인 자잘한 상처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바람 능력도 없는 내가 천사연을 도울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처음 이곳에 와서 릴리스와 싸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상대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너무 빨라.

-상대는 볼 필요 없어.

낮고 부드럽게 들려오던 천사연의 목소리. 검과 검이 부딪히며 뜨겁게 일렁거리던 불꽃.

‘지금 내가 가진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다시 눈을 뜨니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천사연의 옆얼굴이 보였다. 시종일관 여유롭고 지루해 보이던 기억 속 천사연과는 차이가 확연했다.

“천사연.”

내가 상체를 좀 더 밀착하자 천사연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좀 참아, 이 자식아.

“검이 아니라 상대의 몸을 봐.”

지금 나는 등급이 높지만 정신계고, 한이결일 때는 A급이라 릴리스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천사연은 나와 다르다. 처음 겪어 보는 낯선 상황과 적수를 만난 부담감에 시야가 좁아졌을 뿐, 긴장을 풀면 이길 거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건.

“오른쪽. 이 공격이 막히면 다시 날아오를 거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릴리스가 정말로 오른쪽을 공격해 왔다. 날카로운 검 끝을 막아 낸 천사연의 시선이 짧은 순간 내게 꽂혔다.

바람 능력으로 천사연의 싸움을 도우면서 봤던 릴리스의 공격 패턴과 상대법이 아직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릴리스가 다시 가까이 올 때 왼팔을 노려. 무조건 왼팔이야.”

천사연의 눈동자가 살짝 아래로 향한다. 어깨가 뒤로 당겨지고, 하체에 힘이 들어간다.

천장 높이 날아올랐던 릴리스가 재차 우리 쪽으로 하강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천사연의 검이 목표 지점으로 빠르게 갈 수 있도록 도와줄 바람 능력이 지금은 없었다. 그러니 그의 실력과 운에 맡기는 수밖에.

닿아 있는 천사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터져 나오며 용암 같은 피가 묻은 검날이 공기를 갈랐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뱀이 먹잇감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검이 릴리스 왼쪽 어깨에 사정없이 박혔다.

릴리스가 입을 벌리고 녹슨 쇳소리를 길게 흘렸다.

『하아악! 키아아악!』

천사연이 검을 뽑아내자 릴리스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상처 속으로 파고들어 간 피와 어깨에 묻은 피가 부글부글 끓더니 릴리스의 살을 녹여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분노한 릴리스가 쾅쾅 발을 굴렀다. 쿠구궁, 천장과 홀 주변 벽이 무너져 내리며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큭……!”

제게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을 베어 낸 천사연이 자리를 박찼다.

사방에서 나타난 몬스터가 우리에게 개떼처럼 몰려왔다. 피와 살점이 낭자한 사이로 릴리스가 어디에 숨었는지 찾기 위해 홀 곳곳을 둘러봤다.

“천사연, 몬스터는 릴리스를 찾아내서 죽여야만 물러날 거야.”

“위치를 알고 있나?”

“12시와 5시 방향, 그리고 7시 방향의 세 번째 기둥 뒤.”

나는 미래의 천사연이 알려 준 위치를 지금의 천사연에게 그대로 설명했다.

“지금은 5시 방향!”

무너진 벽의 잔해 뒤로 릴리스의 날개 끝이 살짝 보였다.

홀에 박혀 있는 천사 석상의 머리끝을 밟은 천사연이 그대로 높이 뛰어올라 5시 방향에 착지했다.

뿌연 먼지 너머로 당황하는 릴리스를 발견한 천사연이 지친 숨을 내쉬었다.

“찾았다.”

천사연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낸 릴리스가 급히 몸을 뒤로 빼며 외쳤다.

『기, 기다려!』

그 외침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릴리스의 왼팔은 천사연의 능력 때문에 다 타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 죽이면 다른 인간들은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인질을 내걸고 협상을 시도하는 릴리스의 모습에 얼굴을 굳힌 천사연과 달리 예상을 한 나는 한숨만 내쉬었다.

『인질을 구하고 싶으면 당장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얼씨구.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천사연에게서 몸을 뗀 나는 릴리스를 무시한 채로 말문을 열었다.

“죽여, 천사연.”

“뭐?”

『뭐라고?』

단호하게 말하자 천사연과 릴리스가 동시에 놀랐다.

“인질이 어디 있는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죽여도 돼.”

『흥,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군. 그 장소는 나 외엔 아무도 알지 못해! 후회할 짓 하지 마라!』

“죽이라니까?”

『내게 잡힌 인간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보군!』

“천사연.”

눈가를 좁힌 채로 나를 응시하던 천사연이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목이 잘려 나간 릴리스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곧 몸도 뒤로 넘어갔다. 키이이익! 릴리스가 죽은 것을 알아챈 몬스터들이 우르르 도망쳤다.

“네 말대로 죽였다.”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는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어떻게 하긴.”

천사연의 저런 태도에 일일이 서운해할 틈이 없었다.

나는 릴리스의 시체 옆에 놓인 릴리스의 검을 쥐고 들어 올렸다. 마치 장식용 검처럼 가늘고 예쁜 검은 보기와 달리 무겁고 날카로웠다.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릴리스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 그리고 그걸 천사연에게 내밀었다.

“들어.”

아무리 몬스터라 해도 사람의 팔과 똑 닮은 것을 내가 들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고 있어서 그런지, 천사연은 순순히 팔을 받아 들었다.

“이것도 가지고.”

본래 천사연의 소유인 릴리스의 검도 그에게 돌려줬다.

“릴리스가 사용한 SS급 검이야. 앞으로의 싸움을 생각하면 가져가는 편이 낫겠지.”

“…….”

“너랑 잘 어울리기도 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좀 풀기 위해 가볍게 덧붙여 말한 뒤에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샹들리에 바로 아래 벽을 더듬거리며 숨겨진 버튼을 찾아내 꾹 눌렀다.

그릉, 벽과 벽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둥그런 구멍이 생겨났다. 그곳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천사연이 릴리스의 팔을 꽂아 넣었다.

콰르르릉, 쿠궁!

그러자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로 지면이 흔들리더니,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려가자. 다른 사람들은 바로 아래에 있어.”

“…….”

“천사연?”

따라오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나를 응시하던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방법만 아는 게 아니군.”

“…그게 문제가 되나?”

“네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경계심이 느껴지는 그 모습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믿지 못하는 천사연의 상황이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내가 보여 준 의문스러운 행동들 때문에 더 믿기 힘들겠지.

그러니 나는 지금 상황에서 천사연에게 가장 도움이 될 대답을 꺼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의심하는 건 길드원들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난 다음에 해도 충분하잖아.”

“…….”

“그리고 꼭 믿지 않아도 돼. 타인을 믿는 게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사람도 있으니까. 나도 한때는 너와 비슷했어. 그래서 충분히 이해해.”

진심이 담긴 말에 천사연이 더욱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

홀 바닥에 생긴 계단을 내려가자 넓은 지하실이 나타났다.

천장에서 쏟아져 쌓인 모래 사이사이로 게이트에 들어온 클리어팀이 누워 있었다. 모두 기절한 상태였다.

그쪽으로 재빨리 달려간 천사연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박건호부터 살폈다. 호흡과 맥박을 꼼꼼히 확인한 천사연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출구는 저기 있어.”

지하실 오른편에 가장 구석진 곳. 검푸른 빛이 가득 채워진 타원형의 게이트 출구를 가리킨 나는 보란 듯 웃었다.

“믿어 보라고 했잖아.”

천사연의 시선이 나와 출구를 한 번씩 오갔다. 박건호를 살피느라 수그렸던 몸을 일으킨 그가 내게 물었다.

“정말로 예언자가 보낸 존재가 맞는 건가?”

“그래.”

지금 이 시간대의 엘로힘과 엘라하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 둘이 보낸 건 사실이다.

클리어팀이 다들 무사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제대로 길을 알고 있다는 걸 경험해서 그런 건지. 나와 마주 선 천사연은 예민한 기운을 훨씬 적게 풍기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난…….”

잠깐만. 이름을 말해 줘도 괜찮은 건가?

한이결은 절대 안 된다. 권세현은… 괜히 말했다가 천사연이 쓸데없이 찾아다니기라도 하면…….

“글쎄.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 알려 줄게.”

“고작 이름 가지고 비싸게 구는 건가?”

“그래. 비싼 이름이거든.”

나는 천사연과 그 뒤로 보이는 클리어팀을 바라봤다.

굳이 누가 알려 주지 않더라도 이제는 그만 돌아가 봐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 클리어팀이 깨어날 거고 천사연도 이 끔찍했던 게이트에서 벗어나야 할 테니.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몸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개입 능력이 끝나 간다는 표시였다.

“무슨…….”

빛과 함께 내가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을 본 천사연이 놀란 얼굴로 내 손목을 잡아 왔다.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결국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다시 나를 만나기 위해서 천사연이 얼마나 길고 긴 시간을 건너야 할지 알고 있어서 더 씁쓸했다.

“천사연.”

내가 지금의 네게 무슨 위로를 해 줄 수 있을까?

그 답을 나도 잘 알진 못하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말이 한 가지 있었다. 천사연의 손을 마주 잡은 나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결정을 내렸으면 흔들리지 마. 네가 흔들린다면 아무도 지키지 못해.”

네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천사연.

“잠깐……!”

“나중에 다시 만나자.”

마지막 인사를 건넨 순간 눈앞이 새하얀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후웅, 몸이 공중으로 휙 떠오르며 잠시 정신이 뚝 끊겼다.

“으…….”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눈을 뜨자 처음 책 속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나는 한이결의 몸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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