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여긴…….”
두통은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혼란스러운 건 여전했다.
시선을 내려 살피자 옅은 노란빛 모래 위로 한이결이 아닌, 검은 정장을 입은 내 본래 몸이 보였다.
근데 왜 정장이지? 원래 입고 있던 옷은 어디 가고?
‘설마 이것도 개입 능력의 효과?’
공간에서 닥터와 싸울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책 속이라서 뭔가 다르게 적용된 건가?
얼떨떨한 심정으로 흉터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던 그때였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으며 서늘한 냉기가 훅 풍겼다.
“……!”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리자 날카로운 검날이 목 부근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왔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검날에 시선을 올렸다. 내 바로 앞에 서 있는 천사연이 초췌한 얼굴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강한 의심과 함께 여차하면 베어 버리겠다는 각오가 짙게 담겨 있었다.
‘망했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하필 지금 개입 능력이 써지다니. 미래에서 왔다고 솔직하게 털어놔 봤자 믿을 리가 없고.
어떤 변명을 해야 천사연에게 개미만큼의 신뢰라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한 천사연이 눈가를 좁혔다.
“설마 네가 게이트 보스인 건가? 널 죽이면 모두 돌아올지도 모르겠군.”
“뭐?”
이 자식이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 낼 기세인 검날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냈다.
“난 몬스터가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천사연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결국 남은 건 거짓말뿐이었다.
한숨을 삼켜 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부드럽게 웃었다. 내 미소를 본 천사연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나는 널 도와주러 왔어, 천사연.”
예상대로 천사연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검날은 내가 손으로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 났다.
“엘로힘과 엘라하. 이 두 명 너도 알고 있지?”
“…….”
“그들이 네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보고 내게 따로 부탁을 했어. 난 받아들였고. 그래서 널 도우러 온 거야.”
엘로힘과 엘라하의 이름을 들은 천사연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검 끝을 바닥으로 내렸다.
“고작 그런 말 몇 마디만으로 믿으라는 건가?”
“영 의심스러우면 당장 잠이라도 자든가. 엘로힘을 만나서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이름에 이어 ‘잠을 자야 그들을 만날 수 있다’라는 의미가 포함된 대답에 천사연이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아직 나를 믿진 않지만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훨씬 괜찮아졌다. 몸을 일으켜서 정장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 낸 후에 천사연과 정면으로 마주 봤다.
“천사연, 너도 진작 눈치챘겠지만 난 등급이 높긴 해도 전투 계열이 아니라서 강하지 않아. 가진 무기도 없고. 네가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약해 보이긴 하는군.”
이 자식이…….
“아무튼… 나와 잠깐 협력한다고 손해 볼 건 없다는 뜻이야.”
“날 돕는다고 했던가. 협력해서 내가 얻을 이득은 뭐가 있지?”
“네가 데려온 길드원들의 목숨.”
단호하게 나온 내 답에 천사연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 게이트의 보스를 죽일 방법과 빠져나갈 출구까지. 내가 모두 알려 줄 수 있어.”
“…모래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여기까지 와서 널 속일 정도로 한가한 사람 아니다.”
불편한 넥타이를 풀어내서 정장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설명을 이었다.
“어차피 죽으면 시간이 되돌아가니까 이 정도 도박은 해 볼 만할 텐데? 클리어할 길을 찾으려고 몇 번이나 여기 들어와서 죽었잖아.”
“…….”
“날 한번만 믿어 봐. 후회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자신 있게 뱉어 낸 말과 함께 천사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천사연이 내 손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그가 드디어 결심을 내렸는지 검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흉터로 얼룩덜룩한 내 손과 새하얀 천사연의 손이 겹쳐졌다. 본래 세계에서 자주 잡아 본 손이었다.
“좋아.”
천사연의 협력을 얻어 낸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모래가 섞인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편에 게이트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숨겨진 낡은 성이 보였다.
“바로 출발하자.”
***
무너진 성벽 잔해 사이로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숨겨진 문을 발견했다.
모래 속으로 인질이 잡혀갔을 때만 나타나는 문이었다. 계단을 가리고 있는 잔해를 치워 내고 옆에 서 있는 천사연을 돌아봤다.
“능력 써, 천사연.”
“뭐?”
“능력 쓰라고.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어두워서 안 보여.”
물론 나만 안 보일 거다. 전투계 SS급인 천사연은 저 정도 어둠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전에는 천사연이 알아서 능력을 써 줬었지.’
새삼 그가 나를 배려해 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뻔뻔한 요구에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천사연이 상처가 남아 있는 손바닥을 다시 한번 베어 냈다.
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만들어 낸 끈적이는 불을 빛으로 삼아 어두운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모래가 가득하고 건조했던 지상과 달리 축축한 지하의 공기가 느껴졌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앞서 내려가는 천사연의 등을 바라보다가 축축하게 젖은 벽을 매만졌다.
이전에는 이 길을 내려가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SS급 보스 몬스터의 영향권에 놓인 곳이라 A급인 한이결의 몸으로는 버티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SS급보다 높은 등급이라서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다. 천사연이 타인에게 SS급 기운을 나눠 준 건 정말로 내가 처음이었구나.
“꽤 길군. 여기로 내려가면 정말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는 건가?”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리고 인질을 되찾기 위해선 보스 몬스터부터 상대해야 돼.”
“보스 몬스터의 상대법도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처음 천사연과 이곳을 찾아왔던 일은 나로서도 신선했던 경험이었으니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설명해.”
“음…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릴리스야. SS급이고 강한 환각 능력이 있어. 환각은 뿔을 잘라 내면 약해지고. 우리에겐 통하지 않겠지만.”
“릴리스? 왜 하필 릴리스지?”
왜 릴리스냐고?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예전에 천사연에게 들었던 대답을 그대로 따라 했다.
“여, 여성체니까?”
그 어이없는 답변에 천사연이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에 급히 몇 마디 더 덧붙였다.
“인간을 노리는 여자 악마는 릴리스가 대표적…일걸?”
“말장난이나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몬스터의 이름이 뭐든 무슨 상관이냐?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지.”
나를 잠시간 한심하게 쳐다본 천사연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오자 예전에도 봤던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 쌓인 커다란 샹들리에와 불이 밝혀져 있는 촛대, 얼굴이 반절 깨져 있는 천사 석상까지 그대로였다.
『후후후…….』
약간 허스키한 매혹적인 웃음이 홀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맞은편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오며 어둠 속에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찮은 인간 놈들이 용케 이곳까지 왔구나.』
아름다운 외모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이마에 돋아난 두 개의 뿔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장미가 핀 검을 본 나는 천사연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가 릴리스야.”
“확실히 어울리는 이름이군.”
“몬스터를 처리하면 사람들이 갇힌 곳으로 갈 수 있어.”
“그렇군. 근데 왜 자꾸 붙는 거지?”
“뭐? 그거야 당연히.”
평소처럼 천사연이 나를 안기 쉽도록 가까이 붙어 서던 나는 그 질문에 뒤늦게 깨달았다.
아차. 지금의 천사연은 내 바람 능력을 모르는구나.
“나를 안고 싸워.”
“말만 들어도 번거롭군. 싫어.”
“잠깐, 기다려 봐. 나를 안고 싸우라는 이유는…….”
직접 보여 주면서 설명하기 위해 바람 능력을 사용하려던 나는 심장 어디에도 한이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가슴을 더듬거렸지만 한이결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 능력은 당연하게도 쓸 수가 없었다.
‘어째서?’
닥터와 싸울 때는 개입 능력과 바람 능력 모두 사용 가능했는데. 아주 깊은 곳에 숨어 버린 한이결의 기운은 내가 아무리 애써도 깊게 잠든 것처럼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
한순간에 바람 능력을 잃어버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런저런 변명을 갖다 붙였다.
“말했잖아. 난 전투계가 아니라서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버틸 수 없다고. 네가 지켜 줘야지. 인질이 있는 장소는 숨겨져 있어서 내가 죽으면 아마 못 찾을걸.”
“그럼 구석에 처박혀 있어. 죽이고 올 테니까.”
“안 돼. 릴리스가 공격을 당한 순간부터 사방에서 몬스터가 몰려올 거야. 날 살리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해.”
내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천사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당장이라도 릴리스가 아닌 내게 검을 휘두를 것만 같은 흉흉한 기세였다.
‘이 정도로 과하게 질색하니까 좀 상처네.’
미래에는 네가 먼저 달라붙는다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나도 원래는 싫어하거든? 하도 겪다 보니까 익숙해진 거지.
싫어하는 천사연에게 강요해서 미안하지만, 릴리스와의 싸움은 나와 같이 움직여야만 큰 문제 없이 이길 수 있었다. 내 개인적인 안전도 물론 중요하고.
오래 고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천사연은 결국 찝찝한 표정을 하고서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나 또한 그에 맞춰서 그의 어깨에 한쪽 손을 둘렀다.
“막상 해 보니까 별로 안 불편하지?”
“그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군.”
여러 번 해 본 덕분에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는 나와 달리 천사연은 어딘가 어정쩡해 보였다.
이럴 때는 확실히 한이결의 몸이 더 편했다. 나보다 체격이 좀 더 얇고 작았으니까. 어쨌든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쥐새끼에게 업힌 새끼 쥐새끼, 두 마리의 쥐새끼들, 하하! 하하하하!』
우리를 본 릴리스가 붉은 입술을 길게 찢어 웃으며 등에 달린 박쥐 형태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에 맞춰서 검을 타고 흐르는 천사연의 용암 같은 피도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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