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72. 첫 만남
게이트 입구가 열리며 모래가 잔뜩 펼쳐진 내부가 나타났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SS급 게이트 클리어팀에 참여했었던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처음 클리어를 완료한 후에는 공략법이 나오기 때문에 레퀴엠 길드 내에서 따로 클리어팀을 모아 처리하는 터라 내가 다시 올 일은 없었다.
「이번 게이트 클리어 팀장을 맡게 된 박건호라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반적인 진행 설명하겠습니다.」
클리어팀 인원이 모인 앞에서 박건호가 바위 위로 올라서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내가 겪었던 때와 똑같았다.
이때는 박건호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 우서혁은 일본에 가 있느라 클리어팀에 참가하지도 않았었고.
지금은 우서혁이 있는 대신 김우진이 빠졌다. 재각성 이전에 김우진은 C급이었으니 그게 당연하겠지만. 민아린은 힐러팀 사이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와 같이 왔을 때는 마치 화성 같다면서 좋아했었는데. 김우진은 존재감 흐리기 능력으로 기어코 따라 들어왔다가 나한테 걸렸었고.
‘보고 싶네.’
새삼 이곳이 그저 책이 보여 주는 과거 중 하나일 뿐이며 내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실감 났다.
바깥세상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사연의 과거를 지켜볼수록 현실 세계에 있는 내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
팀 인원이 100명이나 되는 데다 나흘간 등장하는 몬스터는 B급 정도였으니 초반에는 그리 나쁜 분위기가 아니었다. 비록 빠듯하게 몰아치는 몬스터의 숫자에 피로가 좀 쌓이기는 해도 누군가 죽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이 게이트는 그거로 끝이 아니었다. 내 예상대로 레스트 구간이 지나자마자 등장한 몬스터 무리에 클리어팀이 크게 흔들렸다.
「S급 몬스터입니다!」
「자, 잠깐… 너무 빠른, 끄아악!」
「대열 갖춰! 근접팀과 원거리팀 각자 자리로!」
모래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다가 사방에서 불쑥 튀어 오르는 몬스터에 팀원들이 위치를 잡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박건호가 아무리 대열을 갖추라 명령을 해도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질서가 쉽사리 잡혀지지 않았다. 천사연도 눈앞에 있는 직원을 살리기 위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사사사삭…….
중앙에 모래가 불쑥 솟았다. 곧이어 그 사이를 가르고 커다란 낫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둑, 끼릭, 끽.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 뼈가 훤히 드러난 손. 저 존재의 정체를 기억해 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S+급 중간 보스 몬스터. S급 아래는 공포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몬스터였다. 내가 온 미래에서는 천사연이 아주 손쉽게 처리했지만 여기는…….
끼이이이익!
모래 밖으로 온전히 빠져나온 몬스터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거대한 낫을 횡으로 휘둘렀다.
공포증에 주저앉아 미처 도망가지 못했던 수십 명의 클리어팀이 그 공격 한 번에 모조리 허리가 잘려 나갔다.
「으, 아, 아아악!」
「사, 살려 줘…! 살려 줘!」
「밀지 마! 시발, 으윽!」
뭐 해 볼 틈도 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본 클리어팀 전체가 패닉에 빠졌다.
강한 공포에 무작정 도망치는 사람, 무너진 대열에 몬스터를 막지 못하고 잡아먹히는 사람, 맞서 싸우자며 소리치는 사람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박건호!」
중간 보스의 공격으로 오른팔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박건호를 발견한 천사연이 다급히 달려갔다.
왼팔을 붙잡아 부축한 천사연이 곁에 있는 우서혁에게 그를 넘겼다.
「힐러팀과 함께 최대한 멀리 떨어져.」
「하지만 마스터!」
「가!」
단호한 외침에 우서혁이 박건호를 업고 몬스터들의 공격을 피하며 레스트 구간으로 향했다. 살아남은 클리어팀도 우서혁을 뒤따랐다.
끼긱, 끽!
천사연이 홀로 중간 보스 앞에 섰다. 살아남은 팀원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그곳에는 빼곡히 널린 시체와 중간 보스 몬스터, 천사연만이 남았다.
손바닥을 베어 낸 천사연의 S급 검에서 불이 일렁거렸다. 그걸 본 중간 보스 몬스터가 입을 쩍 벌리며 귀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곤 낫을 휘둘렀다.
처음으로 중간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천사연은 내 기억보다 훨씬 미숙했다. 과한 부담감 때문인지 잦은 실수에 상처가 늘어 가고, 몬스터의 패턴을 알지 못해 몇 번이나 버벅거렸다.
그래도 SS급인 데다 18번째 삶을 사는 천사연도 결코 약한 건 아니었다. 1시간 가까이 걸린 치열한 전투 끝에 몬스터가 모래 위로 쓰러졌다. 몬스터의 이마에 검을 꽂아 넣어 확인 사살까지 마친 천사연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팀원들에게 돌아갔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그래. 피해 상황은?」
그 물음에 우서혁이 시선을 내렸다. 박건호는 잘려 나간 오른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고 식은땀을 흘렸다.
팔이 잘린 충격으로 쇼크사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큰 부상이었다. 입술을 깨문 천사연이 시선을 들어 다른 팀원들도 살폈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도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중 박건호보다 더 심한 상처를 입고 죽기 일보 직전인 팀원도 여럿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천사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아린 힐러는 어디 있지?」
「…민아린 힐러는, 살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
「아마 첫 습격 때 도망치지 못했고… 사망한 후에는 모래에 파묻힌 것 같습니다.」
우서혁의 설명을 들으며 천사연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살아남은 팀원 숫자는?」
「총 32명입니다만,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17명 정도입니다.」
처참한 결과였다. S급과 S+급의 습격 한 번으로 팀의 70%가 죽어 버렸다. 깊은 한숨을 내쉰 천사연은 속으로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이번에도 실패했군.」
지금 이 상황에서 게이트를 운 좋게 클리어하고 나가 봤자 밖도 어차피 지옥이었다. 중요한 박건호와 민아린까지 잃었으니… 이번 시간도 더는 의미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천사연이 검을 쥔 채로 몸을 돌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출구를 찾아보고 오도록 하지. 그동안 부상자들 케어하도록.」
「혼자서 가시려는 겁니까? 안 됩니다, 마스터. 최소한 저도 함께…….」
「레스트 구간이라 해도 안심할 수는 없어. 우서혁 비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상자들을 지키도록.」
거친 목소리로 명령하는 천사연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우서혁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들을 뒤로 한 채로 천사연은 힘겹게 나아갔다.
사실 그는 출구를 찾아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우서혁에게 한 얘기는 모조리 거짓이었다. 어차피 제 목숨이 끊기면 다 없던 일이 될 테니 죽기 직전까지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얻어 낼 심산이었다.
천사연의 계획은 오차 없이 들어맞았다. 내가 박건호와 둘이서 하늘을 날며 사방에 쇠구슬을 뿌렸던 그 장소까지 이동한 천사연은 밀려오는 수십 마리의 벌레 몬스터 중 하나에게 몸이 씹어 먹혀 죽었다.
콰직, 살과 뼈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아주 짧은 안식이 찾아왔다. 그리고 천사연은 다시 10월로 돌아가 대표실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 이후로 천사연은 S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계속해서 도전했다. 클리어팀 멤버를 바꿔 보거나 인원수를 조절하고, 다른 길드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도전 횟수가 10회를 넘어가고 천사연이 28번째 시간을 돌아왔을 때, 그는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고 혼자서 게이트를 들어갔다.
아무리 시간이 되돌아가고 다른 이들은 기억을 잃는다지만, 자신을 믿고 게이트까지 따라온 길드원이 죽는 것을 몇십 번이고 보는 것은 심적으로 굉장히 지쳤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혼자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또다시 4번의 시간이 지났다. SS급 게이트인 만큼 몬스터가 등장하는 숫자는 그 어느 곳보다 많았고, 그곳을 혼자 들어간 천사연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천사연의 강한 능력 때문에 접근하기도 전에 녹아 버리는 몬스터를 보며 나는 그제야 엘로힘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살아온 천사연은 보통 SS급보다 강한 힘을 갖게 됐지. 그 아이가 본래 가진 능력 자체도 위험한데 그 긴 시간을 쉬지 않고 싸워 왔으니… 누적된 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아무리 같은 SS급이라 하더라도 하태헌은 이 게이트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시간의 반복을 이용해서 몇 번이고 도전한 끝에 게이트 출구까지 도달한 천사연은 하태헌보다 강한 실력자가 됐다.
하지만 그런 천사연이라도 SS급 게이트에 숨겨진 함정으로 또다시 발목이 묶였다.
「어째서 입구가 보이지 않는 거지?」
게이트 가장 북쪽에 있는 낡은 성. 하지만 성 어느 곳에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천사연의 곁에서 성을 살펴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설마… 누군가가 릴리스에게 인질로 잡혀가야만 지하 문이 열리는 건가?’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민아린과 김우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났다. 그 뒤로 천사연과 단둘이 열린 지하 문을 통해서 성 아래로 내려갔던 것도.
지금은 SS급인 천사연 혼자라서 모래 속으로 끌려갈 인질이 없었다. 그래서 문도 열리지 않은 건가.
수많은 경험을 해 온 천사연과 함께 왔을 때는 클리어가 그렇게 쉬웠는데… 지금 와서 보니 과연 SS급 게이트였다. 마지막까지 이럴 줄이야.
「하…….」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 외에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눈치챈 천사연이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 하하…….」
허리를 숙인 채로 한참을 미친 듯이 웃던 천사연이 곧 고개를 들었다.
「한 번만 더 하면 돼, 한 번만…….」
“천…….”
그 어떤 때보다 공허한 표정을 한 천사연의 모습에 무심코 그를 부르려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촤악, 천사연이 스스로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새빨간 피가 확 번지며 시야를 가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천사연…….”
바닥에 쓰러져 죽은 천사연이 보였다.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가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32번 동안 시간을 반복하면서 천사연이 자살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사실이 나는…….
“허억……!”
가슴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번져 나갔다. 오싹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안 돼, 이러다간…….’
가슴을 움켜쥔 채로 거친 숨을 내쉬는 나를 두고 주변 풍경이 휙휙 변했다. 33번째 시간을 시작한 천사연은 50명의 클리어팀을 꾸려서 게이트에 들어갔다.
몬스터를 죽이고, 중반 보스를 죽이고, 또 몬스터를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모든 클리어팀이 살아서 성 가까이 이동했을 때, 내 예상대로 모래가 사람들을 빨아 들였다.
「미친, 뭐야! 이봐, 꺼내 줘!」
「가, 갑자기 무슨… 도와주세요!」
「아아악!」
한 명씩 모래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천사연은 당황한 기색으로 제 곁에 있는 박건호라도 구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 말고는 모두가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아…….」
천사연이 주저앉은 채로 박건호가 있던 자리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부드럽게 흩어지는 모래뿐, 사람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아악……!」
몇 번이고 모래만 쓸어 만지던 천사연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처절하게 무너졌다. 천사연이 눈물을 흘리며 떠올리는 생각이 너무나도 크게 들려왔다.
「차라리 죽고 싶어.」
“흐, 으윽…….”
입을 벌리자 차가운 기운이 새어 나왔다. 가슴을 움켜쥔 손이 점점 커지고 흉터가 생겨났다. 차가운 기운의 힘으로 몸이 변해 갔다.
「죽고 싶어…….」
기다려, 천사연.
기운에 잠식당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내가…….
“지금 갈게.”
말을 뱉어 낸 그 순간,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온 천지에 울려 퍼졌다.
나와 천사연의 사이를 가로막았던 투명한 무언가가 찢어지며 틈새가 벌어졌다. 그 사이로 떨어진 나는 무언가 푹신한 것에 등이 처박혔다.
“크윽!”
찡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이마를 짚은 채로 상체를 일으킨 나는 모래 위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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