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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84화 (284/394)
  • 284화

    「기억. 그거면 됩니까?」

    「그래. 과거 기억만이 아니라 앞으로 네가 겪을 기억까지 우리에게 주는 거라 그 값어치가 매우 크다.」

    다시 한번 내 쪽으로 눈길을 준 엘로힘이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의 수도 그만큼 늘려 주마. 시간이 되돌아가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도움을 원한다면 꿈으로 부르면 된단다.」

    「나쁘지 않군요.」

    「명심해라, 아이야.」

    엘로힘의 금색 눈동자가 빛으로 환하게 차올랐다.

    「아무리 우리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죽은 이를 살리거나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은 해 줄 수 없다.」

    염려가 어린 그의 표정이 천사연의 가슴에 깊이 박혀 왔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거라. 너는 이제… 평범한 시간을 살고 있지 않으니까.」

    평범한 시간을 살고 있지 않다는 건, 주변인의 죽음에 크게 연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간이 돌아가면 어차피 살아날 테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최대한 도와줄 수 있다. 정보를 얻거나 아이템을 주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은…….」

    「우리가 대신 대가를 치르고 해 줄게.」

    천사연의 시선이 엘라하에게로 향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잠시 응시하던 천사연이 물었다.

    「단순히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군요.」

    엘라하의 눈가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죄책감입니까?」

    「……그래.」

    엘로힘이 그런 엘라하의 손을 잡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의 발단은 우리가 저지른 죄이니 우리도 대가를 치러야겠지.」

    「본래 천사연, 너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고통을 겪을 필요는 없지만…….」

    칼리가 천사연이라는 인간을 강제로 각성시켜서 자신의 수족으로 써먹으려고 한 것은 엘로힘과 엘라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가 칼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세계가 통째로 시간 속에 갇히게 되리라는 것도.

    「우리를 원망한다 해도 충분히 이해한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거겠지.」

    엘로힘의 말에 천사연이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넌 그러지 않는구나.」

    「원망해야 합니까?」

    천사연은 자신의 쓸데없는 동정으로 인해 탄생한 사마엘을 떠올렸다. 그로 인해 정신 지배를 당한 수많은 피해자도.

    그때 회피하지 않고 천제헌을 죽였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타인에게 조종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건 네 문제가 아니다.」

    「글쎄요.」

    천사연의 생각을 읽은 엘로힘이 안타깝다는 기색으로 얘기했지만 천사연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저도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으니 조금은 이해합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들어 천사연을 바라봤다.

    그래. 천사연은 저런 녀석이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불합리한 일을 겪고 그로 인해 아무리 고통받는다고 해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세계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죽어야 할 생명은 살고 살아야 할 생명은 죽는다.」

    쿠궁,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꿈이 끝나 간다는 걸 느낀 엘로힘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혼란 속에서 어찌 정당한 죽음을 가릴 수 있을까? 옳은 판단일 거라는 확신은?」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왔다.

    「아득하게 오래 살아온 우리도 감히 끝을 알 수는 없단다. 내가 보기에 천사연, 네가 살린 천제헌이라는 존재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구나.」

    하얀빛에 잠식당하는 꿈속 세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찬연했다. 그 속에서 엘로힘은 천사연을 위로했다.

    「네 동정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

    「가거라, 아이야. 우리가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으마.」

    파지직, 눈앞의 모든 것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아래로 추락하는 감각과 동시에 빛에 잡아먹힌 천사연은 얼마 가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한낮의 햇살이 들어오는 대표실은 잠들기 직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상체를 일으킨 천사연이 식은땀을 흘리며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불안에 떨며 혼란스러워하는 천사연은 더는 없었다.

    ***

    파라라락.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며 앞에 펼쳐진 광경도 쉴 틈 없이 흘러갔다. 천사연은 앞으로 시간이 셀 수 없이 반복된다는 가정하에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최대한 세세하게 정리하고 그중에서 다른 선택지를 늘려 나갔다. 그건 아주 느리고, 어렵고, 또 힘겨운 과정이었다.

    「사람 목숨은 게임의 말이 아닙니다.」

    천사연은 때로 비난받았고,

    「죄송합니다, 마스터… 약속은 못 지킬 것 같…….」

    때로 실수했고,

    「그때 하셨던… 같은 시간을 계속 산다는 얘기, 저는 믿어요.」

    때로 이해받았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 어떤 일을 겪어도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왔다.

    총 17번의 시도. 하지만 얻어 낸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18번째 삶을 시작한 천사연은 이대로는 시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17번의 시도를 하는 동안 천사연은 칼리를 만나지도 못했고, 프라우스 신도단을 이기지도 못했다.

    천사연이 프라우스 신도단의 주요 인물들의 능력과 행보를 써 둔 서류를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그가 하는 생각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만약 나와 비슷한 힘을 가진 자가 협력해 준다면 이길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겠지.」

    저를 올곧게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양손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도.

    「하태헌.」

    한국에서 탄생한 두 번째 SS급 각성자.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이미 로헌의 소속이었고 더 나아가 이후 SS급 게이트에 들어가서 살아 나오지 못할 존재였다.

    「SS급 게이트를 로헌이 아닌 레퀴엠이 가져온다면?」

    어차피 로헌이 무너지면 레퀴엠이 떠안아야 할 짐이었다. 만약 칼리를 죽여서 반복되는 시간에서 벗어난다 해도, SS급 게이트 클리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SS급 게이트의 소유권을 자신이 가져온다면… 그래서 로헌이 아닌 레퀴엠이 클리어하러 들어가고 로헌은 그대로 지켜진다면? 하태헌뿐만 아니라 이주하가 지키고 있는 로헌의 힘도 얻어 낼 수 있다.

    「운 좋게 SS급 게이트에서 무기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프라우스 신도단의 테러 활동도 더 확실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SS급 게이트를 로헌에게서 뺏듯이 가져와야 했다. 온건한 방식으로는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할 거다.

    흰 종이 위를 두들기던 펜촉이 뚝 멈췄다. 턱을 괸 채로 한참을 갈등하던 천사연이 마음을 다잡았다.

    누군가를 실망하게 하고 그로 인해 여태껏 쌓아 온 좋은 관계를 모두 무너뜨리는 것. 이미 여러 번 겪어 보지 않았던가. 새삼스럽게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결단을 내린 천사연은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SS급 게이트가 뜨기 전에 우선으로 로헌과 이어 오던 교류를 조금씩 끊어 냈고, SS급 게이트 소유권이 정해지는 길드 회의에 참석했다.

    「SS급 게이트는 현재 어떤 인력을 얼마만큼 투입해야 하는지 어떠한 정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로헌에게 SS급 게이트를 맡기는 건 섣부른 결정 같군요.」

    「…로헌이 SS급 게이트를 맡기에는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실제로 모든 수치가 부족하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천사연의 냉정한 발언에 이주하가 얼굴을 굳혔다. 옆에 앉아 있는 하태헌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여러 면에서 로헌보다 많은 것을 가진 레퀴엠이었다. 천사연은 일부러 그 부분을 활용해서 ‘안정성’을 강조했고, 다행히 관계자들에게 먹혀들었다.

    최종적으로 레퀴엠이 게이트의 소유권을 가지는 것으로 회의가 끝났다. 이주하와 하태헌은 어떠한 인사 없이 바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음, 솔직히 레퀴엠이 SS급 게이트에 욕심을 낼 줄은 몰랐네. 이주하 마스터가 속상해하는 거… 이해하지?」

    홍시아가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앉아 있는 천사연에게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잡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라도 잘 풀기를 바랄게, 천사연 마스터.」

    「…….」

    무표정한 천사연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홍시아가 적당한 위로를 보내왔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홍시아와 이주하 둘 다. 그리고 하태헌도. 문제는 자신 혼자뿐이었다.

    스스로를 탓하는 천사연의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니야.’

    너도 좋은 사람이야. 내가 알아.

    이 책을 보기 전에도 알고 있었어. 네가 주변을 지키기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 박동과 함께 불안하게 흔들리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불길한 예감이 다가왔다. 천사연이 어린 시절에 받아 왔던 학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을 모두 지켜본 나는 점점 기운을 억누르는 게 힘겨웠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자칫했다간 개입 능력을 써 버릴 것 같았다.

    천사연이 혼자 있을 때면 그나마 다행이지, 다른 사람들이 있거나 방금처럼 회의할 때 개입하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한숨을 내쉬며 한이결 기운 밖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내 기운을 겨우 억눌렀다.

    그 사이, 장면은 회의실에서 게이트 입구로 변해 있었다. 총 100명의 클리어팀을 모은 천사연은 가장 선두에 서서 검을 쥐었다. 그 뒤로는 우서혁과 박건호, 민아린도 함께였다.

    이전 시간대에서 50명으로 출발했던 로헌과 비교했을 때 2배로 많은 인원수였다. 하지만 이 많은 숫자로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천사연은 알고 있었다.

    「게이트 열립니다!」

    측정 능력자의 외침과 동시에 닫혀 있던 게이트 입구가 천천히 벌어졌다.

    긴장한 기색으로 입구 저편을 응시하던 천사연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나는 뒤에서 불안하게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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