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83화 (283/394)

283화

천사연이 창문 가까이에 서서 밖을 내려다봤다.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강남 거리는 여느 때처럼 평화로웠다.

「꿈이 아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천사연의 생각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그게 꿈일 리가 없어.」

자신의 앞에서 허무하게 죽어 간 이들의 얼굴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을 마구잡이로 떠올리던 천사연이 고개를 숙였다.

「천제헌…….」

죽었을 거라 여겼던 그가 살아 있었다. 무너지는 저택에서 빠져나온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니었다.

19살, 처음 각성했던 그때. 천사연은 천제헌을 죽일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뒤늦게 살인을 하는 것이 무서워졌다거나 천제헌이 해 온 짓을 용서했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천사연은 그저 그를 동정했을 뿐이었다.

천제헌도 천사연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채로 자라 왔다. 어찌 보면 자신을 낳아 준 여자에게마저 외면을 당했으니, 그도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다르게 만났으면 어땠을까.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천사연과 천제헌의 관계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느 형제들처럼 서로 애정을 느끼는 그런 가족이 됐을지도.

천제헌이 저택에서 12년간 살면서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제 위치를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남자는 제 성에 차는 아들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천제헌이 아니어도 큰 상관이 없었다. 천사연과 천제헌 둘 다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 해도 천제헌이 지난날 자신에게 해 온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의 목숨은 망설임 없이 끝냈던 천사연도 천제헌만큼은 건들지 못했다.

그래서 외면하고 도망쳐 나온 것이다. 저택의 불길이 자신을 대신해서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기를 바라며.

하지만 결과는…….

「나 때문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신이 그때 천제헌을 죽였더라면 이후에 테러를 당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강한 죄책감과 함께 무력감이 몰려왔다.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쉰 천사연이 얼굴을 쓸어 만지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막아야 해.」

칼리라는 존재와 가면을 쓴 자들을.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시간을 되돌렸는지는 모르지만, 제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테러단이 언제부터 활동했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겪어 봤으니 이번에는 대응하기도 더 쉬웠다.

「당장 테러단의 정체부터 알아보고 미리 대비책을…….」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하는 천사연을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우서혁이 주고 간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건 힘들 거야, 천사연.’

칼리가 시간을 반복하는 데에 시작점을 이날로 정한 건 다 계획된 부분일 거다.

천사연이 칼리가 원하는 대로 세계의 재앙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한다. 그러니 반복되는 시간에 가둬 두고 끊임없이 시련을 주겠지.

책을 통해 과거를 보면서 깨달았다. 프라우스 신도단은 천사연이 레퀴엠을 세운 것만큼이나 오래된 단체였다. 그런 이들이 테러를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만큼 준비가 다 끝난 상태라는 거고.

그러니 천사연은 결코 쉽게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

시간은 또다시 흘러간다. 독기를 품은 천사연은 테러 단체를 찾아내고 그들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래를 모르는 주변인들은 천사연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극도로 예민하고 날카롭게 변한 천사연을 보다 못한 박건호가 한 소리를 했다.

「왜 이렇게 안달 내는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마스터.」

「몇 번째 얘기하는 거지? 위험한 테러 단체가 있어. 그놈들이 언제 공격을 해 올지 모른다고.」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단체는 없지 않습니까. 벌써 한 달째입니다. 길드 분위기도 좋지 않고요.」

「…내 말을 믿지 않는군.」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답답하다는 기색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박건호의 눈빛에 천사연은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본 박건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마스터. 문제가 있으면 제대로 설명을 하십시오. 그래야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를 믿지 않는 건 오히려 마스터 아닙니까?」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끝까지 아무런 변명도 반박도 하지 못했다.

천사연이 지키고 싶은 사람은 어디까지나 제 길드 직원들뿐이었다. 이번에도 한이결은 자살했고 SS급 게이트에 들어간 하태헌과 이주하가 사망하면서 로헌은 무너졌다.

오로지 프라우스 신도단의 뒤만 집착적으로 쫓던 천사연은 결국 또다시 아무것도 이뤄 내지 못하고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다.

박건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천제헌이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천사연을 보며 비웃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여전하네.」

「…….」

「벌레 같은 새끼.」

제게 쏟아지는 조롱을 들으며 천사연은 지친 기색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박건호의 심장을 꿰뚫었던 검이 이번에는 천사연의 목을 잘라 냈다.

천사연의 목숨이 끊어진 동시에 다시 시간은 거꾸로 돌아갔다. 천사연은 대표실 소파에서 두 번째로 깨어났다.

「허억……!」

「마스터?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검날이 지나갔던 제 목을 더듬으며 거친 숨을 내쉬는 천사연을 서류를 전달하러 대표실을 들른 우서혁이 발견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괜찮아.」

「힐러와 의사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호출하십시오. 그리고 말씀하셨던 서류입니다. C12 구역 피해자 두 명의 상태입니다. 여자아이 쪽은 사망했고…….」

이전에도 들었던 우서혁의 설명을 또 한 번 들으며 천사연은 눈을 감았다. 강한 두통에 머릿속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더 필요하신 것 있습니까?」

「없어. 이만 나가 봐, 우서혁 비서.」

「예.」

우서혁이 대표실을 나가자 천사연은 이마를 짚은 채로 소파에 몸을 뉘었다. 두통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강한 고통에 한참을 뒤척이던 천사연은 어느 순간 기절하듯 정신을 잃었다. 새하얀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나타난 풍경은 대표실이 아닌 넓은 들판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와 절벽 밑으로는 새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해 본 나는 이 장소가 꿈속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멍하니 서서 바다를 보고 있는 천사연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다, 아이야.」

어깨를 흠칫 떤 천사연이 급히 몸을 돌렸다. 옅은 바람결에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 엘로힘과 엘라하가 천사연을 맞이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경계하는 천사연에게 살짝 웃어 보인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네 꿈속이다.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꿈이라고?」

「그래. 네 무의식이 만들어 낸 장소지. 제법 아름답구나.」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엘로힘에 이어서 엘라하가 말했다.

「우리가 낯설겠지. 이해해. 우린 그저… 네게 정보를 주기 위해서 왔어.」

「정보?」

「이미 몇 번이고 만났을 텐데. 칼리라는 존재.」

엘라하가 언급한 이름을 들은 천사연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쿠구궁,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끼며 굉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 변화를 지켜보던 엘라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해. 우린 칼리의 부하가 아니야.」

「그럼 무슨 관계지?」

「우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엘라하를 대신해서 엘로힘이 설명했다.

「칼리와 비슷한 존재란다. 네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수호하는 관리자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구나. 칼리는 다른 세계의 관리자였지.」

「…다른 세계의 관리자가 왜 이곳에 온 거지?」

「그건 우리도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단다. 하지만 다른 건 설명해 줄 수 있지. 이를테면, 칼리에게 대가로 지불한 네 시간을 되돌려 받을 방법이라거나.」

천사연이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던 땅이 잠잠해진 것을 느낀 엘로힘이 쓴 미소를 지었다.

「긴 얘기가 될 것 같구나. 하지만 부디 들어 줬으면 좋겠다.」

「…….」

「너와 우린 이제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니까.」

엘로힘과 엘라하는 예전에 내게 해 줬던 것처럼 천사연에게 모든 일을 설명해 줬다.

칼리가 처음 이 세계로 넘어왔을 때부터 그녀의 배신, 다른 세계와 연결된 게이트를 만들어 낸 내용까지.

그중에는 나도 미처 몰랐던 몇 가지가 있었다.

「인간에게 우리가 가진 능력을 사용하거나 세계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세계의 시간을 되돌린 칼리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단다.」

「대가가 뭐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어야 한다는 대가다. 기간은 시간을 되돌린 그 시점부터 대략 6개월 정도겠구나.」

천사연이 두 번째 시간에서 칼리를 만나지 못한 이유였다. 그녀가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세상은 이미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잠식당했고 천사연은 천제헌에게 목이 베였으니까.

「칼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 네가 더 큰 대가를 이미 지불했기 때문이란다. 칼리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서 강요당한 거지만, 그래도 대가는 대가지.」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단 하나다.」

「오른쪽 손등에 새겨진 맹세.」

엘라하가 제 오른쪽 손을 들어 보이며 손등을 가리켰다.

「이 위치에 독특한 생김새의 문신이 새겨져 있을 거야. 그것만 없으면 우리가 칼리를 죽일 수 있어. 손만 잘라 내도 돼.」

「오른쪽 손만 잘라 낸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거군요.」

「쉽진 않을 거다. 네 시간은 칼리가 소유하고 있으니까.」

엘로힘의 말뜻을 천사연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천사연이 손을 잘라 내려고 하면 칼리는 그 순간 바로 시간을 되돌리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천사연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 세계를 관리하고 있고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까지 있으니 알고 있는 정보들도 많이 있겠죠.」

「그래.」

「당신들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제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천사연의 표정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 고통 끝에 간신히 얻어 낸 평화를 또다시 무참히 빼앗겼다. 그러니 어떻게든 제 손으로 끝을 내고 싶겠지.

엘로힘은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한 채로 고민했다. 이미 ‘시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긴 이에게 더 무언가를 가져와도 괜찮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입을 다물고 잠시간 서 있던 엘로힘이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그의 두 눈동자가 정확히 내게로 향했다.

“……!”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른 채로 몸을 굳혔다.

시선이 묘하게 어긋나 있어서 내 모습이 보이진 않은 것 같지만, 존재 자체를 알아챈 건 확실했다.

「…그래, 그렇게 되는 건가.」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달은 엘로힘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천사연을 바라봤다.

「천사연, 우리가 네게서 받아 갈 대가를 무엇으로 할지 정했다.」

「뭡니까?」

「네 기억. 과거부터 앞으로 겪을 미래까지. 그 기록을 우리에게 다오.」

그 제안에 놀란 것은 오히려 엘라하였다.

「잠깐, 그래도 되겠어? 저 녀석은 이미…….」

「걱정하지 마. 날 믿어.」

불안해하는 엘라하에게 엘로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거야.」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8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