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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82화 (282/394)
  • 282화

    ‘아니야.’

    저건 박건호가 아니다. 나는 이미 이런 비슷한 일을 한번 겪어 봤다. 권정한이 에드워드에게 찔렸을 때…….

    나와 달리 S급인 박건호가 정신계 능력에 당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아래쪽에서 지금…….」

    「아래? 아아.」

    무성의한 대답과 함께 우서혁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 낸 박건호가 대표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하하, 천사연. 천사연!」

    「……!」

    「정말 천사연이야!」

    제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박건호의 모습에 천사연이 주춤 물러섰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천사연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구지?」

    「누구긴? 네 충실한 부하지.」

    박건호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걸 보자마자 천사연이 황급히 움직였다.

    「우서혁…!」

    「서프라이즈, 마스터!」

    은빛 쇠구슬 수십 개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우서혁의 팔을 움켜쥔 천사연이 유리창을 깨고 바깥으로 몸을 날린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확 터져 나오며 폭발이 일어났다.

    「크윽!」

    천사연이 시계에서 S급 검을 꺼내 길드 건물 벽에 꽂아 넣었다.

    카가가가각, 검날이 벽면을 쭉 긁으며 추락을 멈춰 냈다. 오른손만 변화해서 겨우 벽면에 매달린 우서혁도 마찬가지였다.

    3층 높이에서 벽에 꽂힌 칼을 뽑아 아래로 뛰어내린 천사연은 비틀거리며 내려온 우서혁을 부축했다. 폭발의 여파로 양다리에 유리 조각이 셀 수 없이 꽂힌 우서혁은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는지 제대로 걷질 못했다.

    우서혁의 팔을 어깨에 얹은 채로 길거리로 나온 천사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넋을 놓았다.

    온갖 폭발물과 능력자들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강남 거리는 새까만 가면을 쓴 자들 외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갈라지고 부서진 도로와 무너진 건물들, 뜨겁게 일렁이는 불길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

    우서혁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잔해를 헤치고 레퀴엠 길드 건물 앞까지 걸어간 천사연은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폭발에 휩쓸렸는지 민아린과 김우진이 피를 흘린 채로 지저분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숨은… 쉬지 않는다.

    「…….」

    막막한 공포심이 해일처럼 들이닥쳤다. 어찌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천사연의 맞은편에 검은 가면을 쓴 능력자가 몰려들었다.

    빽빽하게 모여든 군단 중앙에 선 자들이 보였다. 방독면을 쓴 거대한 체구의 남자, 눈가만 가려지는 반가면을 쓴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자와 금발 머리를 틀어 올려 묶은 성인 크기의 구체관절인형, 그리고…….

    「표정이 제법 볼만한데.」

    새하얀 가면을 쓴 남자. 그가 창백하게 질린 천사연을 보며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천사연.」

    「넌…….」

    이전에 들어 봤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천사연이 눈을 크게 떴다. 사마엘이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익숙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천사연과 똑 닮은 얼굴에 중앙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9년 만에 만난 형한테 인사해야지.」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지? 천사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온 생존자가 나 하나가 아니었다고?

    끊어 낸 줄 알았던 불행의 그림자가 어느새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목 끝까지 가득 들어찬 절망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런 천사연을 느긋하게 구경하던 천제헌이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저 위에서부터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선물이다, 동생아.」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땅에 처박혔다.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박건호였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박건호를 본 천사연이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허억, 헉…….」

    천사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과한 충격으로 인한 과호흡 증상이었다. 그걸 보며 천제헌이 킥킥거렸다.

    「불쌍하네, 저 남자도. 사람 하나 잘못 만나서 저렇게 개죽음을 당했으니.」

    그 말이 심장에 꽂혀 들었다. 천사연은 가슴이 뒤집히는 통증에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자, 얘들아.」

    다시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 천제헌이 정신 지배에 걸린 신도단에게 명령했다.

    「적당히 상대해 놔. 곧 그분께서 도착하시니.」

    「예.」

    신도단이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피부로 와닿는 살기에 정신을 겨우 다잡은 천사연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쥔 그때였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박건호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우서혁이 천사연의 팔을 붙잡아 반대쪽으로 강하게 밀어 냈다. 강제로 우서혁의 등 뒤로 밀려 난 천사연이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신도단의 공격이 쏟아졌다.

    「우서혁!」

    천사연의 앞을 가로막은 우서혁이 온몸으로 공격을 받아 내며 거대한 늑대로 변신했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능력을 쓴다 해도 쏟아지는 공격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변신을 마쳤을 때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피투성이 상태였다.

    피를 뚝뚝 흘리며 늑대가 신도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1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옆구리가 날카로운 창에 꿰뚫려 그대로 쓰러졌다.

    「덩치부터 맷집까지… 꽤 쓸 만한데? 이거 내 연구 재료에 아주 좋겠어.」

    「또 이상한 괴물 만들려고? 가죽만 벗겨서 내 인형에 쓸래! 안 그래도 이런 동물형 인형을 써 보고 싶었어.」

    「인형은 다른 거로도 대체할 수 있잖아.」

    「둘 다 바보 같기는. 어차피 소용없는 거 몰라요? 그분 말씀대로라면 이제 시간이 되돌아갈 텐데.」

    「아, 맞다.」

    헐떡거리며 죽어 가는 우서혁의 근처로 모여든 닥터와 아벨, 아자젤이 한마디씩 뱉어 냈다.

    「연구 재료로 딱 맞았는데. 아쉽구만.」

    「응? 아직 살아 있는데?」

    「질긴 생명력이군. 어디 보자… 여길 이렇게 잘라 내면…….」

    「앗, 피! 피 튀잖아! 아우, 옷에 다 묻었네. 더러워.」

    끝내 죽어 버린 우서혁의 시체를 두고 떠드는 말이 모두 끔찍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천사연이 들고 있는 검 끝이 손을 따라 함께 덜덜 떨렸다.

    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비참했다. 어릴 적에 느꼈던 무력감이 또다시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흔들리는 손을 힘겹게 들어 올린 천사연에 자신의 손목에 검날을 갖다 댔다.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의 곁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본 나 또한 눈물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심장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는 기운을 몇 번이고 삼켜 냈다. 지금은 나조차도 도와줄 수 없었다.

    「가엾은 것.」

    검날이 손목에 박히기 직전, 새하얗게 빛나는 작은 손이 검을 쥔 천사연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작년 천사연의 생일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순식간에 나타난 칼리가 이전과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폐허가 된 거리와 쌓여 있는 시체를 밟고 선 채로 부드럽게 속삭이는 칼리의 얼굴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살랑이는 금발 머리 사이로 와인색 눈동자가 불꽃의 빛을 받아 핏빛으로 보였다.

    「불쌍해라. 소중한 사람을 모조리 잃었으니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크겠어?」

    「…….」

    「내가 도와줄까?」

    천사연에게서 한걸음 물러선 칼리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새하얀 빛이 더욱 강해지며 이내 손안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여길 봐, 천사연.」

    겹쳤던 두 손을 벌리자 허공에 떠오른 황금색 회중시계가 나타났다. 칼리의 새하얀 두 손 사이로 보이는 회중시계의 초침이 틱틱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건 네 시간이야.」

    천사연의 흐릿한 눈동자가 회중시계로 향했다.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니?」

    「…….」

    「평화롭고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평화롭고 행복했던 그때.

    천사연의 시선이 죽어 있는 박건호에게로 향했다. 닥터에게 목이 잘려 나간 우서혁도, 쓸쓸하게 죽어 간 민아린과 김우진에게도.

    「…….」

    지옥이 다시 한번 더 천사연에게 손짓했다. 그 어린 날에 강제로 저택에 끌려간 것처럼, 이번에도 천사연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

    메마르고 거칠게 나온 대답에 회중시계가 찬란하게 빛났다.

    「대가를 가져가겠다.」

    입술을 길게 찢어 웃은 칼리가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가진 시간은 모두 내 것이다.」

    쿠구궁, 땅이 흔들리며 순식간에 어두워진 하늘 너머에서 수많은 별이 엄청난 속도로 흘러갔다. 칼리가 손가락으로 천사연을 가리키며 저주를 읊었다.

    「너는 결코 죽을 수 없고, 죽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성취를 이뤄 내도 허무하리라.」

    세상이 뒤집힌다.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감각에 천사연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오로지 내 권한이며 너는 끝없는 시간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회중시계의 초침이 반대로 회전한다. 초침을 따라 분침과 시침 또한 거꾸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되돌아간다.

    「그게 대가다, 천사연.」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에 결국 버티지 못한 천사연이 두 눈을 감았다. 새까만 어둠이 천사연을 집어삼켰다.

    마치 죽는 것처럼 의식이 한순간에 뚝 끊겼다. 하지만 안식은 아주 잠깐일 뿐, 곧장 돌아온 의식은 천사연의 정신을 강제로 끌어 올렸다.

    「허억……!」

    숨을 거칠게 들이켜며 천사연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식은땀으로 젖은 몸에 오한이 밀려왔다. 천사연이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따스한 오후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서류가 쌓인 책상을 비췄다. 끼익, 제 몸에 눌린 소파가 옅은 소음을 냈다.

    자신이 있는 장소는 폭발로 무너졌던 대표실이 확실했다. 천사연이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제 몸을 더듬었다.

    「…꿈인가?」

    저를 보며 웃던 칼리의 얼굴이 생생했다. 처참히 죽어 간 직원들도. 그런데 그게 다 꿈이라고?

    …아니. 꿈일 리가 없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똑똑.

    「……!」

    눈을 깜빡이며 혼란스러워하던 천사연이 노크 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내 문이 열리고 서류를 든 우서혁이 들어왔다.

    「마스터?」

    「아…….」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우서혁의 질문을 듣고도 천사연은 넋을 놓은 채로 입을 열지 못했다.

    천사연의 상태를 잠시 응시하던 우서혁이 서류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알아보라고 하셨던 C12 구역 피해자 상태입니다. 한이연이라는 여자아이는 1시간 전 사망했고 그 오빠인 한이결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

    「마스터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한이결은 기운이 느껴지는 거로 보아 각성자가 확실합니다. 천천히 확인해 보십시오.」

    「…….」

    「…힐러와 의사를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아니야. 됐어. 나가 봐.」

    겨우 정신을 차린 천사연이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대답했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우서혁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호출하십시오.」

    우서혁이 대표실을 떠난 후로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 있던 천사연이 핏기가 없는 손을 뻗어 서류를 들어 올렸다.

    서류 맨 윗줄에 적혀 있는 날짜가 머릿속에 새겨졌다.

    10월 13일.

    칼리를 처음 만났던 자신의 생일로부터 3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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