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71. 대가
칼리에게서 불온한 기운을 느낀 천사연은 그 후로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 올려 주변을 경계했다.
칼리가 천사연에게 했던 말을 그저 미친 자의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많았다. 일반인보다 발달한 모든 감각이 칼리를 위험인물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천사연이 각오한 게 무색하게도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전처럼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될 뿐이었다.
「뭐지?」
이쯤 되자 불안해진 사람은 오히려 천사연이었다.
그때 만난 칼리라는 존재는 자신의 계획을 반드시 이행할 거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이렇게 쉽게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런 불안한 마음마저도 시간이 흐르자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천사연은 국내 1위 길드의 마스터였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처리해야 할 문제도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 와중에 10월에 접어들면서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건이 터졌다. C12 구역 게이트 폭주였다.
「도, 동생. 동생이라도… 제발…….」
「…….」
몬스터에게 쫓기다가 크게 다친 한이결의 애원을 들은 천사연이 눈가를 좁혔다. 불길이 치솟는 좁은 골목, 메케한 연기와 진한 피 냄새.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여자아이를 향해 힘겹게 기어가는 한이결을 바라보던 천사연은 자신이 각성했을 때를 떠올렸다.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각성할 확률이 높겠군.」
그렇게 생각한 천사연은 곧 도착한 직원들에게 한이결과 그의 여동생을 구하도록 명령했다.
「천사연 마스터. 알겠지만 이번 일은 나는 몰랐던 거야. 어? 관리 본부에 말 좀 잘해 줘!」
C12 구역 담당인 블런 길드의 마스터, 강승건이 뒤늦게 달려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예전부터 자신만 마주치면 고아 새끼라는 말을 달고 살더니. 속으로 비웃은 천사연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였다.
「거짓말이야. 일주일 전에 왔다가 그냥 갔잖아!」
「무, 무슨…….」
「이딴 곳은 관리 안 해도 된다면서, 으… 귀찮으니까 미루자고 말하는 거 다 들었다고!」
「시발, 무슨 개소리야!」
한이결의 악에 받친 외침에 당황한 강승건과 앞다퉈 카메라를 들이미는 취재진으로 주변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속에서 천사연은 한이결을 살펴봤다.
「보기보다 성격이 좀 있는데.」
유약하고 소심할 줄 알았더니. 한이결에 대한 인상을 바꾼 천사연이 조용히 생각했다.
「정말로 각성을 한다면 길드에 데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하지만 한이결은 그로부터 이틀 후,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능력을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천사연이 예상한 대로 한이결은 A급 바람 능력자로 각성에 성공했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뭐, 자살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각성을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엔 죽었겠지만.
「바람 능력이라면 활용할 곳도 많았을 텐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우서혁이 전달한 서류로 한이결의 최후를 확인한 천사연은 잠깐의 아쉬움을 끝으로 그들의 존재를 잊었다. 천사연에게 한이결은 그저 게이트 폭주로 생겨난 수많은 피해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한이결이 죽은 지 2개월이 더 지나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중반, 새로운 게이트가 등장했다.
「N19 구역이라고 합니다.」
「흠…….」
N19 구역 신 게이트라면… 내가 한이결의 몸으로 들어와 제일 처음 들어갔던 SS급 게이트였다.
입가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천사연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건 넘어가는 게 낫겠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마스터?」
우서혁과 함께 대표실을 찾아온 박건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 게이트가 SS급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많던데요. 다 출처 없는 찌라시긴 하지만.」
「이제껏 나왔던 게이트 중 최고 등급이 S급이니 SS급도 나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로헌도 그걸 알고 있으니 아마 이번 게이트는 그쪽이 가져갈 거다.」
「그런데도 포기한다는 겁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억지로 게이트를 늘릴 필요는 없어. 안전이 최우선이다, 박건호 팀장. 그리고…….」
잠시간 무언가를 떠올린 천사연이 곧 말을 이었다.
「이제 로헌도 SS급 능력자가 있으니 믿고 넘겨도 괜찮겠지.」
단호하게 내린 결정에 우서혁이 일정을 조율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답을 길드 관리 본부에 전달하겠습니다.」
셋의 대화를 구경하던 나는 뒤늦게 천사연이 이 게이트가 SS급임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천사연은 시간에 갇히기 전이라서 그렇구나.’
SS급 게이트도, 릴리스가 가진 SS급 검도 알지 못하는 거다.
그럼 천사연은 칼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게이트를 빼앗았을 뿐, 원래는 로헌에게 넘겨준 건가.
천사연은 길드를 아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세계의 안전이었다.
많은 길드가 안정적으로 게이트를 나눠 갖고 SS급 각성자가 많아질수록 세계는 몬스터로부터 안전해진다. 그래서 천사연은 국내 두 번째 SS급 각성자가 올곧고 정직한 하태헌이며, 그가 로헌에 소속됐다는 사실을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러면…….’
나는 직접 겪었던 SS급 게이트 내부를 상기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아무런 정보도 없는 로헌이… 무사히 클리어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
내가 짐작했던 대로 로헌은 SS급 게이트를 깔끔하게 클리어하지 못했다.
아니, 클리어 자체를… 성공하지 못했다.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주하와 하태헌을 포함한 수많은 로헌의 길드원이 그렇게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로… 사망했다.
「어쩔 수 없어요.」
「…….」
「죄송합니다, 천사연 마스터.」
최미진이 그 어느 때보다 지친 얼굴을 하고서 검은 양복을 입은 천사연에게 서류를 넘겼다. 공식적으로 SS급이라고 판명이 난 신 게이트의 소유권이었다.
국내 2위 길드인 로헌이 SS급 능력자를 데리고도 게이트 클리어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모든 길드가 신 게이트를 넘겨받기를 거부했다.
결국 국내 1위이자 SS급 능력자가 있는 레퀴엠이 이 게이트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길드 마스터와 어쩌면 부마스터가 됐을지도 모를 하태헌을 포함한 강한 능력자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로헌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일각에서는 그런 로헌을 레퀴엠이 흡수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천사연은 로헌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구나.’
로헌이 게이트로 들어간 지 벌써 3주일이 지났지만… 그래도 믿는 거다. 그들이 돌아올 거라고.
로헌이 국내 2위 자리에서 내려온 세상은 빠르게 평화를 잃어 갔다.
블런 길드가 담당하는 C13 구역 게이트가 또 폭주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은 수준이라 블런은 언론과 대중에게 강한 비난을 받았고, 강승건은 마스터 직에서 스스로 내려갔다.
그쯤부터 ‘능력자는 진화를 이뤄 낸 우월한 존재’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능력 우월주의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능력자인 그들은 일반인들을 멸시했으며, 빠르게 수를 불려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번 테러도 역시 우월주의 단체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하아…….」
가장 뛰어난 길드라고 알려진 레퀴엠 역시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건물에 공격 능력을 날리거나 소속 직원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당연히 길드 내부 상태는 최악이었고 여러 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천사연이 해결해 보려고 노력해도 정확한 숫자조차 어림잡지 못하는 단체의 테러 행위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사연은 드물게 우서혁을 앞에 두고도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믿고 있었던 로헌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충격부터 그 뒤처리를 제 길드가 해야 하는 상황, 블런 길드가 벌려 놓은 C13 구역의 복구 지원, 거기에 테러까지.
그중에서 천사연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SS급 게이트의 두 번째 클리어 일정이었다.
처음 들어갔던 클리어팀이 모조리 돌아오지 못한 악명 높은 게이트였다. 그런 게이트를 누가 가고 싶겠는가. 열심히 공고를 올렸지만, 박건호가 담당하는 특수작전부 외에는 그 어떤 팀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늘어나는 몬스터를 감당하지 못하고 게이트가 폭주할 테니까. 최대한 일정을 미뤄 봤자 3개월이 한계였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챈 우서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천사연이 겨우 대답했다.
「다른 길드에 도움이라도 요청해 보시는 게…….」
「글쎄.」
자신에게 온갖 아부를 떨던 길드들은 SS급 게이트를 떠안자마자 자신을 대놓고 피하고 있었다. 그게 우습지는 않았다. 씁쓸하긴 했지만.
「다들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어, 우서혁 비서. 우리가 어려운 처지라고 남에게 짐을 더 얹어 줄 수는 없지.」
「하지만…….」
「잠깐.」
우서혁의 말을 끊은 천사연이 잠시간 눈을 깜빡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소음이…….」
「예?」
그가 급히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비명과 부서지고 폭발하는 소리, 사이렌 소리가 한데 뒤엉켜 요란하게 들려왔다.
「마스터?」
창문 아래로 펼쳐진 건물 앞 거리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다중 추돌 사고라도 일어난 것처럼 망가진 차들과 쓰러져 있는 수십 명의 민간인, 도망치는 상대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흰 가면을 쓴 자들. 모든 게 이제껏 봐 온 테러와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가 봐야겠어. 우서혁 비서.」
천사연이 우서혁에게 박건호와 민아린, 김우진의 행방을 찾아보라고 명령하려던 그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가 대표실 안에 울려 퍼졌다. 천사연과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눈치챈 우서혁이 얼굴을 굳힌 채로 말했다.
「기다리십시오. 제가 열겠습니다.」
앞장서려는 천사연을 막은 우서혁이 천천히 문 가까이로 걸어갔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로 잠시간 멈춰 있던 그가 곧 문을 열었다.
「박건호 팀장.」
「안녕.」
능청스러운 인사에 우서혁과 천사연이 긴장을 살짝 풀었다.
하지만 나는 박건호가 평소와 다른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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