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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80화 (280/394)
  • 280화

    「로헌 소속 하태헌입니다.」

    천사연은 제 앞에 선 하태헌을 살펴봤다.

    한국의 첫 번째 SS급 각성자와 두 번째 SS급 각성자. 그 둘이 처음 마주친 장소는 길드 관리 본부 1층 홀이었다.

    2년 전, 로헌 길드 마스터인 김형원이 부마스터였던 이주하에게 마스터 자리를 넘겨주고 은퇴했다. 하태헌은 이주하가 개인 판단하에 데려온 첫 능력자였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무뚝뚝한 얼굴과 깔끔한 인사에 천사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만나서 반갑군.」

    마주 잡은 두 손에서 약하게 스파크가 튀었다. SS급의 기운이 맞부딪치면서 생긴 반응이었다. 천사연과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천사연과 마찬가지로 하태헌도 이 만남이 제법 불편했다. 국가에 단 둘뿐인 SS급인 데다, 하태헌은 자신과 비슷한 격의 능력자를 처음으로 만나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경계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태헌아, 이것 좀 최미진 센터장에게 전달해 주고 올래?」

    홍시아와 대화하면서도 천사연과 하태헌 쪽을 신경 쓰던 이주하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들고 있던 서류를 주며 부탁했다.

    최미진을 찾으러 자리를 떠난 하태헌이 어느 정도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이주하가 곧 천사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태헌이랑 정식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죠?」

    「그렇지.」

    「잘 좀 부탁드려요. 같은 SS급 능력자이니 공감할 부분도 많을 텐데.」

    「공감이라. 글쎄.」

    「최소한 티라도 덜 내 주시죠? 너무 얕잡아 보고 있잖아요. 그야 지금은 당신보다 여러 부분에서 다 미숙하긴 하지만…….」

    「귀엽긴 했지.」

    이주하의 뾰족한 말투에도 천사연은 불쾌해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미숙한 건 인정해. 하지만 요령을 피우지 않는 정직한 성격을 가졌으니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이주하는 천사연이 하태헌의 양손에 새겨진 가득한 흉터를 봤다는 것을 곧장 눈치챘다. 그제야 이주하도 굳은 표정을 조금 풀었다.

    「눈썰미가 좋네요.」

    「이주하 마스터는 참 든든하겠어. 저런 신입이 들어왔으니. 지금 부마스터 자리도 공석 아닌가?」

    「뭐, 당장은 힘들겠지만 든든한 건 사실이죠. 천사연 마스터는요? 레퀴엠도 비어 있잖아요.」

    「우리는 앞날이 캄캄하군. 좋은 인재가 없어서.」

    「이렇게 잘 나가면서 그런 소리 하면 엄청 얄밉거든요? 어쨌든 태헌이가 나쁜 인상은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럼 다음에 봐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이주하가 등을 돌렸다. 천사연도 근처에서 기다리는 우서혁과 합류하여 길드 관리 본부를 나섰다.

    천사연이 28살이 된 해의 4월이었다. 이때의 천사연은 로헌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하태헌의 곧은 성격을 인정해 줬으며, 정보를 캐내는 용도로 쓰려고 데려온 김우진은 마음을 바꿔서 경호원으로 정식 고용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천사연은 그 어느 때보다 길드를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레퀴엠’이 오래 헤맨 끝에 겨우 찾아낸 자신의 진짜 집이라 여겼다.

    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위해 주는 주변 사람들, 남들이 인정하는 지위와 능력, 드디어 안정을 되찾은 세계.

    평화롭고 아늑한 일상. 천사연은 점점 웃는 날이 많아졌다.

    ***

    밖을 뜨겁게 달구던 더위가 한풀 꺾인 가을 초, 천사연의 생일이 찾아왔다.

    이런 날에는 파티해야 한다는 박건호의 강력한 주장에 드물게 우서혁이 동의했다.

    「가끔은 쉴 시간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서울 대표 길드로 선발되어 길드 관리 본부로 회의하러 가는 천사연을 붙잡고 박건호가 해 주던 조언과 비슷했다.

    숨 돌릴 틈이 있어야 오래갈 수 있다는 말을 천사연은 이제 이해한다. 긴장할 필요 없는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미래를 살아갈 힘이 됐으니까.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여 파티를 크게 열었다. 1층 홀부터 5층까지 전문 업체를 불러서 화려하게 꾸미고 술과 음료, 요리를 준비했다. 전 직원에게 휴가를 주고 원하는 사람은 와서 파티를 즐기도록 했다.

    「천사연 마스터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파티 참가자들이 다 함께 샴페인을 들고 외치는 것으로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됐다.

    각기 다른 곳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물밀듯 들어왔고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두 환하게 웃으며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천사연은 2층 외부 복도에 서서 파티가 한창인 1층 홀을 내려다봤다.

    특수작전부 팀원들과 요란하게 떠들며 맥주병을 따는 박건호와 일하는 와중에 억지로 잔을 받았는지 서류와 와인 잔을 동시에 든 우서혁, 경호팀 사람들과 무어라 떠드는 김우진, 파티 장식물 아래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민아린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 다친 몸으로 창고 같은 방에 누워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아이는 이제 없다. 자신이 이뤄 놓은 것들을 보며 천사연은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천사연의 생각이 들려왔다.

    「내 집.」

    더는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끌어안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그게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잔에 담긴 샴페인을 모두 비운 천사연은 빈 잔을 내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기쁘면서도 씁쓸한 감정으로 엉켜 가는 천사연의 마음속이 내게도 닿아 왔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진 천사연은 옥상 정원으로 향했다. 조금 서늘한 공기와 함께 건물 아래에 넓게 펼쳐진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옥상 난간 가까이 걸어간 천사연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천사연의 옆에 나란히 서서 얼굴을 올려다봤다.

    겨우 7살이었던 그 작고 어렸던 아이가 28살이 되었다. 이렇게 보니 어릴 때의 얼굴이 남아 있어서 굉장히 신기했다. 천사연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도 비슷하려나?

    문득 미국 가기 전에 천사연과 따로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옥상 정원이었는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 천사연이 위로를 바라며 안겨 오던 그 날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위로해 주고 싶었다.

    ‘물론 지금의 천사연은 나를 모르니 순순히 안길 리가 없겠지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옅게 웃은 그 순간이었다.

    「안녕?」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향했다.

    허벅지까지 길게 내려온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어두운 밤에도 빛을 품고 반짝이는 와인색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책이 보여 주는 과거일 뿐인데도 등줄기가 오싹해질 만큼 강한 힘이 느껴졌다. 나와 천사연이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저 존재가 바로…….’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포식자를 마주친 피식자가 된 것 같은 본능적인 공포가 몰려왔다.

    이런 비슷한 경험은 이전에도 한 적 있었다. 나를 데려가려는 하태헌과 붙잡아 두려는 엘로힘의 기운이 동시에 부딪혔던 그때, 격이 다른 엘로힘의 기운에서 이와 같은 공포를 느꼈었다.

    칼리가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렸다. 새하얀 손을 들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무 반가워, 천사연. 정말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어.」

    「…누구지?」

    「내 이름은 칼리란다. 음, 지금의 너를 만들어 준 은인이라고 해야 하나?」

    나만큼이나 칼리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낀 천사연이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은인이라고?」

    「그래. 나는 네 가능성을 알아보고 도움을 줬으니 은인이나 마찬가지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예 감을 못 잡는구나.」

    혼란스러워하는 천사연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칼리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눈 한 번 깜빡할 사이 코앞에 나타난 칼리를 본 천사연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급히 상체를 뒤로 뺐다.

    「천사연. 네가 그 저택을 빠져나온 게 그저 우연이었을까?」

    「……뭐?」

    「널 가둬 둔 저택이 무너지고, 모두가 인정하는 강한 능력을 갖게 된 네 인생이 정말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해?」

    「…….」

    미간을 찌푸린 천사연이 검을 꺼내기 위해 시계에 손을 올렸지만, 아이템이 나오기도 전에 칼리의 작은 손에 손목이 붙잡혔다.

    「네 재능을 알아본 건 오로지 나 하나뿐이야.」

    「놓…….」

    「넌 선택받은 거란다. 기쁘지 않니? 내가 널 만든 거야.」

    천사연이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 자신보다 강한 이를 처음 마주한 천사연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아래로 들어와. 넌 그래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 널 여기까지 끌어올린 거니까.」

    칼리가 불쌍한 아이를 굽어보는 것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하고서 천사연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널 만든 것처럼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강하게 만들어 주려고 해.」

    「…….」

    「그러려면 적당한 재앙이 필요하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불러 모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끔찍한 이야기를 짙은 미소와 함께 뱉어 낸 칼리가 순순히 손목을 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천사연은 감히 무기를 꺼내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서 널 선택한 거야. 네가 가진 능력은 재앙으로 써먹기에 아주 제격이거든. 약한 자들은 불에 먹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고, 강한 자들만이 살아서 미래를 이어 나가겠지.」

    「…뭔가 했더니 미쳐 버린 쓰레기였군.」

    「내가 미쳤다고? 아니. 지금 이 세계는 너무나도 썩었어. 그건 천사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지. 신은 언제나 똑같았어. 세상이 썩었다면 필요한 몇만 빼놓고 다 쓸어 버린 다음에 다시 시작하면 돼. 깔끔하게. 내가 너를 선택한 건 그런 이유야.」

    칼리가 말을 하면 할수록 천사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온몸을 옥죄는 공포에서 겨우 벗어난 천사연이 뻣뻣하게 굳은 손을 움직여 겨우 검을 꺼내 들었다. 옥상 정원 조명에 비친 S급 검의 검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런 역겨운 사상에 동의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왜 화를 내는 거야?」

    그 반응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를 기울인 칼리가 천진하게 물었다.

    「세계가 망가지고 썩어 가고 있다는 거…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왔잖아. 다른 세계와 통로를 연결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했어. 약한 자들은 깔끔하게 사라졌고, 너처럼 강한 자들은 살아남았지.」

    천사연은 아무 대답 없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검을 들어 올렸다. 칼리가 뾰족한 검 끝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네가 내 제안을 받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기꺼이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재앙이 되겠다고 말할 줄 알았어. 이건 정말 아무에게나 주는 자리가 아니야. 영광스러운 상황이라고…….」

    「영광? 미치려면 혼자 곱게 미쳐. 남한테 피해 끼치지 말고.」

    천사연의 적나라한 비웃음에 칼리는 입가를 매만졌다.

    「그래. 어차피 지금 힘으로는 완벽한 재앙이 될 수 없으니…….」

    칼리가 혼자서 무언가 결론을 내린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천사연.」

    「잠깐……!」

    어딘가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시야를 가렸다. 칼리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을 든 채로 혼자 남게 된 천사연은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칼리에게 잡혔던 손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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