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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79화 (279/394)

279화

레퀴엠 길드가 세워진 지 4년이 지났다.

길드원을 위한 복지는 물론이고 생명 수당과 기본 아이템 지급까지 해 주는 레퀴엠은 능력자를 이용해서 돈 벌어먹을 궁리만 해 대는 타 길드들을 제치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그즈음 레퀴엠 길드는 판교에서 강남의 10층짜리 건물로 사무실을 옮겼으며 소유 게이트의 숫자는 20개를 훌쩍 넘겼다.

한국 최초 SS급 각성자라며 떠들었던 언론은 이제 젊은 나이에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천사연 자체에 관심을 집중했고, 레퀴엠 길드는 능력자들이 가고 싶은 길드 1위로 선정됐다.

「이제 슬슬 개인 비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올해부터 서울 대표 길드 중 하나로 선별되어 길드 관리 본부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천사연은 처음으로 슈트를 입었다.

박건호가 회의에 참석하는 길드 목록이 적힌 서류를 성의 없이 넘기며 말하자 천사연이 손목시계를 착용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1년 중 대부분을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데 뭐 하러?」

「그게 문제라고 말하는 겁니다.」

짧았던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긴 박건호의 모습은 최근과 꽤 비슷했다.

「게이트에 들어갈 만한 길드원이 부족했을 때는 이해하지만, 이제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마스터께서 일일이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얘기만 들어도 지루하군.」

「원래 대표 자리는 지루하죠. 명색이 길드 마스터인데 쓸 만한 무기도 좀 구매해서 쓰시고.」

「오늘따라 잔소리가 많은데. 나는 필요 없으니 애인한테나 가서 해.」

「어제 차였는데요?」

픽 웃은 박건호가 천사연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제 말은… 열심히 하는 건 알겠습니다. 근데 이제 길드도 자리 잡았으니 여유를 가져도 괜찮다는 거죠.」

어느새 자신과 엇비슷한 눈높이가 된 천사연을 바라보는 박건호의 검은 눈동자에 씁쓸한 감정이 비쳤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달리기만 해 봤자 결국 끝은 지쳐서 쓰러지는 것뿐입니다.」

「…….」

「본인 몸을 좀 챙기십시오.」

그 진심 어린 충고에 천사연이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천사연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여유를 가지라고?」

자신은 살면서 한 번도 여유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원래 남들도 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지 않나? 솔직히 천사연은 박건호가 하는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길드의 규모가 커지면서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서류 작업은 관련 부서가 대부분 처리해 주니 마지막 확인만 자신이 하면 됐고, 게이트도 일정을 나눠 주면 길드원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길드 초기부터 함께해 온 박건호가 중심을 든든하게 잡아 주고 있으니 더욱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몸을 아끼지 않고 움직였다. 게이트에 빈자리가 나면 용병을 고용하기보단 등급에 상관없이 자신이 들어갔다. 그편이 더 안전하기도 하니까. SS급인 자신이 움직일수록 많은 사람이 편해진다는 것을 박건호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저런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 같군.」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천사연은 속으로 결론을 내려 버렸다. 그걸 눈치 빠르게 알아챈 박건호가 어깨를 놓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뭐, 별로 와닿지 않는 잔소리였으면 무시하십쇼. 회의 가서 만날 꼰대들 잘 감당하시고.」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딴 건 넘겨도 괜찮은데 개인 비서는 이제라도 찾아보시죠? 정 없으면 제가 할까요?」

천사연이 미쳤냐는 시선으로 박건호를 한 번 보고는 미련 없이 대표실을 나갔다.

***

평균 나이 50세. 등급은 고사하고 각성조차 안 한 사람이 대다수인 길드 관리 본부 회의는 무척이나 시시하고 지루했다.

능력자들을 이용해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길드를 세운 자들이었다. 그사이에 앉아 있는 수려한 외모의 젊은 청년인 천사연은 시선을 잡아 끌기 충분했다.

강한 힘을 가진 SS급 능력자, 떠오르는 혜성, 어린 나이에 길드를 세우고 키워 낸 화제의 인물. 그런 천사연을 고운 눈으로 볼 리가 없었다.

「고아 새끼.」

회의 내내 눈초리를 받던 천사연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욕설을 들었다. 다른 일로 방문했는지 출입증을 목에 건 강승건이었다.

천사연을 대놓고 비웃은 강승건은 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 녀석도 정말 한결같네…….’

시기상 강승건이 아직 각성하기 전이었다. 저택에서 살면서 이런 악의에 익숙해진 천사연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시했다.

「천사연 마스터.」

그래도 모두가 강승건 같지는 않았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천사연을 불러 세웠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로헌 길드의 마스터 자리를 맡은 김형원이라고 합니다.」

「레퀴엠 마스터 천사연입니다.」

정중한 악수 요청에 천사연도 거절하지 않고 인사를 받았다.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예전에 자료에서 본 로헌 길드의 1대 마스터였다.

로헌을 세운 초기 마스터이기도 한 김형원은 각성한 이주하를 직접 데려와서 여러 가지를 알려 주고 부마스터 자리까지 일임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천사연 마스터처럼 실력 있는 능력자가 길드를 이끌어 나가서 참 좋습니다. 이 자리에 우리 부마스터가 없어서 참 아쉽군요. 천사연 마스터처럼 미래가 아주 기대되는 아이라.」

「그렇습니까?」

「제 뒤를 이어서 로헌을 책임져 줄 중요한 아이죠.」

주름진 얼굴이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안전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길드는 앞으로도 많은 발전이 필요합니다.」

「…….」

「천사연 마스터와 우리 부마스터는 좋은 협력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품에서 명함을 꺼내 천사연에게 건네준 김형원이 먼저 자리를 떴다.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사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형원이 준 명함을 매만지는 천사연은 심정이 꽤 복잡해 보였다.

‘그래도 한 명 정돈 제대로 된 어른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 로헌의 부마스터인 하태헌도 이주하가 직접 데려왔었지. 김형원의 뒤를 이주하가 이은 것처럼 하태헌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까?

파라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또다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1년, 2년, 3년…….

천사연이 26살이 된 해에는 박건호가 조언했던 대로 개인 비서를 고용하고 비서팀을 새로 만들었다. 개인 비서는 내 짐작대로 우서혁이었다.

폭주 위험성이 높다는 루머가 돌아 변신 능력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 시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개인 비서로 고용한 천사연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는지, 우서혁은 곁에서 일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결국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천사연을 의심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대신 마주칠 때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박건호에게 더 신경을 쏟았다.

「안녕하세요!」

천사연이 27살이 된 후에는 민아린이 레퀴엠으로 이적했다. 민아린은 곧장 힐러팀 팀장을 맡게 됐고, 박건호 또한 천사연의 허락하에 마음이 맞는 길드원을 모아 특수작전부를 만들었다.

그렇게 24살이었던 천사연은 28살이 되었고 그간 A급 보스 게이트와 S급 보스 게이트에서 각각 화염 저항 붉은 재킷과 치유 속도 저하 S급 검을 얻어 냈다.

길드도 이젠 누구나 인정하는 국내 1위 길드가 되었다. 레퀴엠을 따라서 올바른 형태의 다양한 길드가 생겨나고 성장했다. 그중 대표로 선발된 길드는 로헌과 제이나, 블런이었다.

어느새 주변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모습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사연은…….

「마스터,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 뭐가 억울한지 들어나 보도록 하지.」

「사람이 운동하다 보면 기구 한 개 정도는 부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가 아닙니다. 이번 달 총 합쳐서 5개이며 피해 금액은 대략 7,500만 원 정도입니다.」

「와, 엄청 비싸네요!」

박건호가 항의하자 우서혁이 태블릿PC를 두드리며 끼어들었고 차를 마시며 구경하던 민아린이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무슨 운동 기구가 그렇게 비싸지? 마스터, 우서혁 비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능력자 전용 기구라서 더 비쌉니다. 제가 당신인 줄 아십니까?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합니다.」

「7,500만 원이면 게이트 한두 번 다녀오셔야겠네요.」

「…박민재랑 심수연도 같이 부쉈으니까 삼등분해 주십시오, 마스터.」

「지금 팀장이 돼서 팀원들을 팔아먹겠다는 건가?」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뻔뻔한 대답에 서류를 보던 천사연이 살짝 웃었다. 그걸 지켜보던 나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스터.」

심드렁한 표정으로 박건호의 말을 모조리 무시하던 우서혁이 들고 있던 태블릿PC를 천사연에게 넘겼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각성자의 정보가 떴습니다.」

태블릿PC 화면에 사진과 더불어 인적 사항이 채워진 문서 이미지가 떴다.

「나이는 26세이고 가족은 없습니다. 5년 전에 게이트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었다고 합니다.」

「현재 위치는?」

「길드 관리 본부 3층 측정실에서 따로 관리받고 있습니다.」

팔짱을 낀 채로 천사연과 우서혁의 대화를 듣던 박건호가 누군지 알겠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사람입니까? 이번에 새로 SS급으로 각성했다던.」

「그래.」

뭐? 그 말에 나는 급히 천사연에게 다가갔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로 가자 태블릿PC에 떠 있는 사진이 보였다.

선명한 이목구비에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앳된 남자. 26살의 하태헌이었다.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은 내용이야.’

어비스는 하태헌이 각성을 끝내고 로헌에 들어간 이후부터 내용이 시작되어서 그전의 일은 나도 지금 처음 듣는 거였다.

하태헌도 따로 가족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게이트 사고를 당했을 줄은…….

「듣기로 로헌 마스터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오, 이거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른 길드도 아니고 로헌이 SS급을 데려가면 좀 무서워지겠는데요.」

입가를 매만지던 천사연이 우서혁에게 태블릿PC를 돌려주며 말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능력자 한 명을 구해 오도록.」

「어떤 능력자 말씀입니까?」

「남 미행하는 데에 쓸 만한 놈으로.」

천사연의 뜻을 곧바로 이해한 우서혁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SS급 각성자가 신경 쓰이는 거라면 스카우트하는 방향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글쎄. 관리 본부나 다른 길드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군.」

이미 SS급인 천사연이 마스터로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에 단 둘뿐인 SS급을 레퀴엠에서 모두 가져가는 짓을 다른 이들이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로헌이 발 빠르게 움직였으니 높은 확률로 로헌에 소속되겠지. 그래도 최소한의 정보는 얻어 둘 필요가 있으니 관련 능력자를 데려와.」

「알겠습니다.」

우서혁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걸음 물러서서 대표실 안을 둘러본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편해 보이는 천사연을 응시했다.

한이결을 만나고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제 1년밖에 남지 않았다. 대체 그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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