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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78화 (278/394)

278화

「자, 부탁한 서류야. 총 10명이고.」

클로에가 책상에 내려놓은 파일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집어 든 천사연이 천천히 살펴봤다.

「한 명 말고는 죄 쓸모없는 놈들이군.」

「맞는 말이긴 한데, 좀 재수 없네.」

맞은편 의자에 앉은 클로에가 턱짓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야.」

「마음에 안 들어.」

「쓸 만한 놈들은 이미 다 소속이 있어서 어쩔 수 없어.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바꿀 수 있긴 해. 어때?」

그 말에 천사연이 미련 없이 파일 하나를 밀었다.

「이놈은 빼.」

「응? 아니, A급을? 왜? 차라리 C급 중의 한 명을 바꾸는 게 낫지 않아?」

「범죄자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살짝 당황한 클로에가 정말 괜찮겠냐는 듯이 물었다.

「범죄 이력이 있긴 해도 중범죄도 아니고. 무엇보다 A급이잖아. 안 그래도 10명밖에 없는데 개개인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개개인의 능력, 물론 중요하지. 그래서 빼는 거고.」

천사연이 흔들리지 않는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길드가 세워지면 길드원과 같이 게이트를 수도 없이 들어가야 할 텐데, 범죄자에게 내 뒤를 맡길 수는 없어.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길드원도 마찬가지일 텐데.」

「음…….」

마땅한 반박거리를 찾지 못한 클로에가 결국 수긍하며 파일을 챙겼다.

「미리 말해 두는데, 이 범죄자 대신 데려올 능력자는 잘해 봐야 B급이야. 솔직히 C급일 가능성이 커.」

「상관없어.」

「그리고 거기 적힌 S급 한 명은…….」

잠시 머뭇거린 클로에가 이내 말을 이었다.

「너랑 직접 만나 보고 싶어 해. 나쁜 녀석은 아니야. 좀 장난기가 많아서 문제긴 하지만. 그러니까 시간 좀 내 봐.」

「그것도 상관없어.」

「쿨해서 좋네. 알겠어. 마지막으로 이것도 챙겨 가.」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느 주소가 적힌 작은 메모지를 천사연에게 건네줬다.

「저번에 말한 건물 2층 사무실이야. 나중에 갚아.」

「그러지.」

「S급은 현재 미국에 있어. 나도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 길드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돌아올 때 녀석도 데리고 올게. 그때 만나면 되겠네.」

핸드백을 챙긴 클로에가 방을 나서기 직전에 인사를 보냈다.

「다음 주에 봐, 천사연.」

철컥, 쿵. 철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에 혼자 남은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걸 끝으로 또다시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갔다.

클로에가 구해 준 욕실이 딸린 방 두 개짜리 사무실이 천사연의 새로운 집이 되었다. 그간 용병 일을 하며 벌어 온 돈으로 사무실에 필요한 가구 몇 가지를 채운 천사연이 지친 숨을 내쉬었다.

그쯤에서 나는 천사연이 어렸을 때를 빼고는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저택에서 살았던 천사연은 오랫동안 학대를 당했고 타인의 그림자로 살아가도록 강요받았다. 저택이 무너지고 복수를 했지만, 그건 오히려 천사연의 정신을 갉아먹을 뿐이었다.

원치 않은 능력을 얻어서 높은 강도의 훈련을 받으며 많은 압박 속에 끊임없이 몬스터와 싸워 왔다. 한국의 유일한 SS급 능력자인 천사연에게 사람들은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았다.

난방을 틀지 않아 서늘한 사무실의 작은 소파에 몸을 구겨 누운 천사연이 피로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옅은 달빛이 그의 피부를 새하얗게 비췄다.

***

「오. 생각보다 덩치가 꽤 있네?」

클로에가 소개해 준 S급 능력자, 박건호가 천사연을 보자마자 뱉어 낸 첫 한마디였다.

쿵, 들고 있던 짐 가방을 서류가 쌓여 있는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은 박건호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네요. 아, 이젠 마스터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부르기엔 많이 어리지만.」

「5살밖에 차이 안 나는 거로 아는데.」

「길드 대표를 맡기엔 어리죠.」

능청스러운 태도와 달리 천사연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제법 냉정했다.

29살과 34살이 아닌 20살과 25살의 만남은 여러모로 신선한 장면이었다. 과거의 박건호는 천사연보다 체격이 훨씬 컸고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천사연도 느꼈는지 악수를 마치고는 물었다.

「S급이니 다른 길드로 갈 수 있을 텐데, 왜 이 제안을 승낙했지?」

「재밌어 보여서. 큰 이유는 없습니다.」

천사연에게 묻지도 않고 소파에 앉은 박건호가 팔짱을 끼며 사무실 내부를 둘러봤다.

「예상보다 더 험난할 것 같긴 한데… 며칠 해 보고 그만둘 마음으로 온 건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

「나 외에 9명이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언제부터 옵니까?」

박건호와 천사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간 그를 응시하던 천사연이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저택에서 천제헌을 마주칠 때면 항상 짓던 가면 같은 미소였다.

「그거참 기대되는군. 다른 사람들은 사흘 후부터 올 거야. 받아.」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박건호의 태도에도 천사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내밀었다.

박건호 또한 그 자연스러운 하대를 신경 쓰지 않고 순순히 서류를 받아 들었다.

「B급 게이트군요.」

「현재 우리 길드의 직원 등급은 C급 3명, B급 6명, S급 한 명이다. B급 게이트 정도면 기본적인 호흡을 맞추는데 적당하겠지.」

「C급 3명도 데려갑니까?」

「아니. 사무실을 지키고 서류를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니 클리어팀에서 제외다.」

이제 막 시작한 길드라 천사연이 가진 게이트는 없었다. 그러니 게이트를 들어가려면 다른 길드가 소유하고 있는 게이트를 빌려 이용하거나 타 길드 클리어팀에 끼어야 했다.

「나쁘지 않네요.」

서류를 쭉 읽어 본 박건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이동할 때 필요한 차량은 특별히 제가 빌려주도록 하죠.」

또다시 장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옮겼는지 눈앞에 보이는 방 내부가 훨씬 넓고 깔끔해졌다.

눈이 내리는 창밖, 겨울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연은 20살 때보다 키가 더 커졌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책상에 올려진 신문과 서류를 바라봤다.

천사연이 처음 레퀴엠 길드를 만들고 박건호와 만난 지 2년이 지났다. 서울 외곽 낡은 건물에서 시작했던 사무실은 판교로 이전했고 직원의 숫자는 30명을 넘었다.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긴 채로 조용히 서 있는 천사연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2년이 지나고 곧 다가올 23살의 봄을 앞둔 천사연은 여전히 웃지 않았다.

「Hey.」

그때 문을 열고 박건호가 들어왔다. 손에 맥주병 두 개를 들고 있는 그는 머리카락이 아주 짧아진 데다, 오른쪽에 독특한 문양의 스크래치까지 새겨져 있었다.

희미하지만 흉터가 남아 있는 거로 보아 전투 중에 다쳤고 치료 겸 머리를 짧게 자른 것으로 보였다.

「노크 좀 하지?」

「아차, 안 했던가?」

까칠한 타박에 능글맞게 대답한 박건호가 맥주병 하나를 천사연에게 넘겼다.

「마실 것도 가져왔으니 봐주시죠? 직원들은 아래층에서 다 같이 먹고 마시는데 혼자 이게 무슨 궁상입니까?」

「대표는 저런 자리에 끼지 않는 게 센스 있는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력도 좋으셔라.」

내 예상대로 박건호는 레퀴엠을 나가지 않았다. 둘 사이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천사연의 곁에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눈송이를 보던 박건호가 말했다.

「예쁘네요. 이틀 전에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내리나 오늘 내리나 그게 그거지.」

「이틀 전에 내렸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잖습니까. 가끔은 또래처럼 굴어 보시죠.」

「네가 할 말이야?」

천사연의 심드렁한 대꾸에 픽 웃은 박건호가 복잡한 표정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마시던 박건호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도 눈 오는 걸 참 좋아했었습니다.」

「또 여자를 갈아 치웠나 보군.」

「흠, 여자애인 건 맞지만 그런 상대는 아니고.」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아니, 이제는 없지만.」

「…….」

「사실 클로에 부마스터에게 처음 길드 관련 제안을 받았을 때 사진을 하나 받았습니다.」

「무슨 사진인지 알 만하군.」

「좀 뻔하긴 하죠. 그렇게 묶인 채로 일주일 동안 어떻게 버텼습니까? 장난 아니게 심심할 텐데.」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던 시기라 나쁘지 않았어.」

「그 일 때문에 정신이 나가서 또라이가 된 줄 알았는데 원래부터 또라이였던 거군요.」

「잘리고 싶나, 박건호 직원?」

「한 번만 봐주시죠.」

남은 맥주를 모두 마신 박건호가 빈 병을 창문틀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사진을 보고 나니까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더군요. 그 아이도…….」

박건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목 끝까지 올라온 뜨거운 감정을 힘겹게 삼켜 낸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과거 이력이 좋지 않은 A급을 빼고 C급을 넣었다는 얘기도 늦게나마 전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C급 친구는 얼마 안 가 도망쳤지만, 뭐.」

「문서 작업 실력이 나쁘지 않았으니 평범한 회사로 가는 편이 좋지.」

「하긴. 여기 있어 봤자 몬스터 시체나 징그러운 자료만 실컷 보긴 하죠. 대신 저 같은 거물의 마음을 잡아 냈으니 이득 아닙니까?」

「그 A급 범죄자한테 뒤통수 맞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군.」

천사연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기색을 보이자 박건호도 그랬다면 제법 스펙터클하고 재밌었을 거라며 가볍게 수긍했다.

‘동생이 있었구나.’

박건호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천사연의 과거를 보다가 의도치 않게 박건호의 속마음도 들어 버린 셈이었다.

천사연이 당했던 것처럼 어느 기관에 잡혀가기라도 한 건가? 말하는 걸 보면 지금은 곁에 없는 것 같은데.

‘책을 다 보고 돌아가면… 따로 만나서 사과해야겠네.’

천사연과 3년 가까이 동고동락했으니 어렵게 털어놓은 개인사일 텐데,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양심이 너무 찔렸다.

심지어 나는 예전에 박건호와 우서혁 앞에서 한이결인 척 죽은 동생이 떠올라 울었다고 거짓말하지 않았던가.

“하아…….”

항상 장난기가 넘치고 어른스럽던 박건호에게 이런 과거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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