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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77화 (277/394)
  • 277화

    70. 8년의 시간

    저택을 떠나가는 천사연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은 새까만 어둠에 먹혀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새하얀 복도, 옅은 약물 냄새, 흰 가운을 걸친 수많은 사람, 그리고…….

    “천사연?”

    커다란 유리 너머로 온몸이 묶여 있는 천사연이 보였다.

    눈이 가려져 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양 손목과 발목에는 모두 두꺼운 쇠로 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게 무슨…….”

    보기만 해도 숨이 절로 막혔다. 유리 너머 새하얀 방에는 천사연이 홀로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유리 밖에서 그를 감시하거나 무언가를 적고는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지나가는 연구원의 명찰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과거의 길드 관리 본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하필 지하인 거죠?」

    「위험 능력자는 안전을 위해 지하에서…….」

    「위험 능력자? 한국은 능력자를 그렇게 나눕니까?」

    복도 저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원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이는 분명 클로에였다.

    지금이 몇 년 전인 거지? 천사연의 기억 속에서 다시 마주친 클로에는 머리 스타일이 살짝 달랐고 말투도 좀 더 시니컬한 느낌이 강했다.

    바로 옆에서 쫓아오는 연구원에게서 시선을 돌려 유리 너머의 묶여 있는 천사연을 발견한 클로에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걸음 속도를 높였다.

    「잠깐만요. 이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예, 예? 무슨 문제라도…?」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거예요?」

    유리 바로 앞까지 다가간 클로에는 천사연의 상태를 천천히 살폈다.

    「대체 왜 저렇게 묶어 둔 거죠? 언제부터요?」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그 질문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위험하니 저렇게 해 둔 겁니다. 현재 이 건물에는 3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있으니까요. 기간은 얼마 안 됩니다. 일주일 정도…….」

    「일주일이요?」

    책임자와 연구원들을 둘러보는 클로에의 눈동자에는 불쾌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저 능력자는 게이트 폭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하던데요. 죽음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요.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해치지 않고 폭주하지도 않은 능력자입니다. 심지어 미성년자죠. 한국 관리 본부는 미성년자를 이런 식으로 대하나요?」

    「아뇨, 아닙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책임자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급히 변명했다.

    「아테나 부마스터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번 능력자가 우리 한국의 첫 번째 SS급 능력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래저래 체크할 확인 사항이 많고…….」

    「그래서요?」

    「근데 그… 직원들이 저렇게 하지 않으면 이 근처에 오는 것조차도 꺼려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국내 최초 SS급인 데다, 특히 능력이…….」

    천사연에게 힐끔 시선을 던진 책임자가 말을 이었다.

    「피가 조금이라도 흘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도 저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 혀라도 깨물었다가는 여긴 초토화가 되고 말 겁니다.」

    조용히 책임자의 얘기를 듣던 클로에가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저 능력자가 기회만 된다면 이곳을 공격할 거라고 믿고 있군요. 19살짜리 아이입니다.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은 게이트 피해자고요. 매일 수백 명씩 쏟아지는 그 피해자들과 똑같은 처지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 일반인들입니다. SS급 능력자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부의 명령이라 제가 멋대로 풀어 줄 수 없어요.」

    「그럼 그 상부에 전하세요.」

    겉에 ‘SS급 능력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자료 파일을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빼앗은 클로에가 말했다.

    「이 상태로는 전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또한 미국으로 돌아가서 제가 본 그대로를 주변에 알리겠어요. 제가 얘기하는 ‘주변’이 어디까지인지… 충분히 예상하실 텐데요.」

    난감한 기색으로 한숨을 푹 내쉰 책임자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구속을 풀고 유리 밖으로 벗어난 천사연은 취조실과 비슷해 보이는 좁은 방 안에 클로에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게 됐다.

    새하얀 백열등 하나와 회색빛으로 점철된 감옥 같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천사연을 가까이하게 된 클로에는 자기 앞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봤다.

    「음, 일단… 통역 아이템 착용했나요? 아니면 영어도 할 줄 아나요?」

    무표정한 상태로 앉아 있던 천사연이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본론으로 바로 갔으면 좋겠는데.」

    처음으로 천사연의 목소리를 들은 클로에가 잠시 멈칫했다가 곧 담담하게 말했다.

    「삐딱하게 들을 필요는 없어.」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군.」

    「말투가 무슨… 성공한 청년 사업가 같네.」

    클로에는 장난과 함께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는 노력이었다.

    「좋아. 본론부터 가자. 이름이 뭐야?」

    「이름?」

    「서류에 적힌 게 나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묻는 거야. 19살인 건 확실한 거지? 심지어 고아라고 하던데. 아무리 고아라도 출생 신고조차 안 되어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그런 게 왜 궁금하지? 내 능력을 써먹는 데엔 아무 쓸모 없지 않나?」

    「흠, 그건 그쪽 착각인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서류만 의미 없이 팔락거리던 클로에가 파일을 닫으며 천사연과 시선을 맞췄다.

    「네가 SS급인 건 알아. 굉장히 위험하고 강한 능력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가 밝은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조금도 다듬어지지 않았어. 지금 상태로는 넌 능력을 제어하지도 써먹지도 못해. 자칫 잘못했다가는 무고한 사람은 물론이고 본인마저도 죽을 테니까.」

    「…….」

    「지금 너는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아. 봤잖아? 다들 두려워하는 모습. 그래서 저런 취급을 얌전히 받아 준 거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가시 그만 세우고 좋게 가자고. 출생 관련한 건 제외할 테니까 이름 정도는 알려 줘. 어째서 그 저택에서 처음 발견됐는지도. 대답해 주면 나도 그 대가로 도와주지.」

    「돕는다고?」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 제공과 훈련이 끝나면 들어갈 만한 길드를 찾아 줄게. 요즘 다들 하는 거잖아? 미래 계획.」

    미래 계획. 아무런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천사연의 생각이 들려왔다.

    「이런 힘은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어.」

    그가 시선을 내리자 새하얀 불빛에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현실이 뼈아팠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운이었다.

    「…거래 받아들이지.」

    나지막이 나온 천사연의 대답을 끝으로 모든 것이 물에 번지듯 흐려졌다.

    클로에의 도움으로 정식 훈련을 받게 된 천사연은 기운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연습부터 신체를 단련하는 무술까지 하나씩 익히기 시작했다.

    계절은 봄과 여름을 지나가 가을로 접어들었다. 그 몇 개월의 시간 동안 천사연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장면들이 마치 파노라마 사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현대의 무술을 어느 정도 배운 내 시선으로 봐도 천사연은 놀랄 만큼 단기간에 뛰어난 성장을 이뤄 냈다. 신체가 일반인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SS급이긴 해도 천사연이 그만큼 재능 있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훈련을 얼추 끝낸 천사연은 날이 추워지기 시작한 11월 초부터 국가에서 받은 A급 검을 들고 여러 게이트로 불려 나갔다. 주로 클리어팀의 부족한 인원을 충당하는 용병 일이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 지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세계는 아직도 불안정했다. 길드의 숫자보다 생겨나는 게이트 숫자가 더 많았고, 그만큼 게이트 폭주도 자주 일어났다.

    복원 능력자나 힐러의 수가 적어서 쑥대밭이 된 지역의 피해 복구가 너무 느렸다. 사망자와 각성자가 쉬지 않고 등장하여 병원은 항상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관리 본부는 밀려오는 업무를 감당하지 못했다.

    천사연이 막 20살이 된 1월 말, 국가의 부름을 받고 급히 찾아간 의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게이트 폭주로 인근 주택가가 모두 무너지고 몬스터가 여기저기 퍼진 상황이었다.

    사람의 비명과 오열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사이에서 천사연은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가 몬스터를 모두 죽이고 30분이 더 지나서야 지원 인력이 도착했다.

    「고생했네.」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지 지원 인력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클로에가 천사연에게 다가와 한마디 던졌다. 천사연은 아무런 반응 없이 정면만 응시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들어내자 죽은 사람이 나왔다. 가족의 시신을 품에 안은 채로 울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것 외에도 몬스터에게 신체 일부가 뜯어 먹히거나 어딘가에 깔리거나… 죽은 사람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억지로 싸우다가 죽은 능력자도 수두룩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길드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었지.」

    의외라는 눈빛으로 천사연을 본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물어봤을 때만 해도 관심 없다더니, 웬일이야? 들어가고 싶은 길드라도 생겼어?」

    「없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천사연이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없으면 직접 만들어야겠지.」

    「뭐?」

    「내가 직접 길드를 만드는 것도 따져 보면 길드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잠깐만. 길드를 만들겠다고? 네가? 혼자서?」

    「같은 말을 몇 번을 하게 하는 거지?」

    「이런 싸가지…….」

    잠시 울컥한 클로에가 골치 아프다는 기색으로 이마를 짚었다.

    「길드가 그렇게 쉽게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아니? 초기 멤버도 있어야 하고 복잡한 절차도 거쳐야 하고… 뭐, 넌 SS급에 용병 일도 여러 번 했으니 실력은 인정받겠지만.」

    「알아서 할 테니까 사람이나 구해 줘.」

    「어휴, 정말…….」

    갑작스러운 요구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는지 클로에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게 한참의 정적 끝에 클로에가 포기한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길드 이름은 정했고?」

    「정했어.」

    「뭔데?」

    천사연이 고개를 들고 폐허가 된 눈앞의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그것을 나란히 서서 바라본 나는 천사연이 어떤 이름을 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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