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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76화 (276/394)

276화

쿠우웅!

귀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저택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아주 짧은 시간, 내 쪽을 바라봤던 천사연은 바닥이 무너져 내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키에에엑! 크르륵!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타오르는 불덩이가 계속해서 저택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쿠르릉, 쿠웅!

저택이 무너지고 불에 타올랐다. 주변이 비명과 애원으로 뒤덮였다.

허겁지겁 저택 밖으로 도망쳐 나온 사용인과 수행원이 달려드는 몬스터에 의해 목이 꺾이고 머리가 터지며 죽어 나갔다. 새싹이 피어났던 정원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나는 눈앞을 가리는 메케한 연기와 불길을 뚫고 아래로 떨어진 천사연을 찾아 움직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게이트가 갑자기 생겨난 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하지만 입구가 생기자마자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게이트 폭주는 몇 개월간 클리어하지 않을 때 생긴다. 이런 경우는 본 적 없었다.

처음 게이트가 생겨난 건 20년 전이고 길드가 세워진 건 그로부터 5년 뒤. 그러니 원래 저곳에 게이트가 있었다고 해도 관리할 길드가 충분히 있을 시기인데, 어째서…….

크르륵, 크륵! 키익!

폐허가 된 저택의 잔해들을 밟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가 밀려왔다. 거대한 팔 네 개가 달린 인간형 몬스터로, 눈이 없는 대신 다른 감각을 이용하는지 날카로운 이빨과 기다란 혀를 내두르며 짐승처럼 먹잇감을 찾아 뛰어다녔다.

「윽…….」

1층 구석에서 천사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그곳으로 가자 천사연이 잔해들을 치워 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게 보였다.

「쿨럭, 쿨럭.」

메마른 기침을 뱉어 낸 천사연이 왼팔을 움켜잡았다. 떨어지면서 잘못 부딪혔는지 위 팔에 손바닥만 한 길이의 쇠가 꽂혀 있었다.

붉은 핏물이 팔을 타고 흘러내려 손끝에서 떨어졌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과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크륵, 크륵.

몬스터가 들고 있는 기다란 장검이 불빛에 섬뜩하게 빛났다. 검은 타액을 흘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몬스터를 발견한 천사연이 급히 몸을 숙였다.

하지만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먹이를 구분하는 몬스터라 숨는다고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피 냄새가 나는 방향, 거친 숨소리까지. 몬스터를 생전 처음 보는 천사연은 자신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키에에엑!

금방 천사연이 숨은 잔해 앞까지 기어 온 몬스터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천사연에게 달려들었다. 천사연은 황급히 바닥을 굴러 공격을 한번 피해 냈다.

「허억, 헉…….」

제 앞에서 검을 쥔 채로 울부짖는 몬스터의 모습에 천사연이 본능적으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피가 흐르는 팔을 힘겹게 움직여 겨우 쇠 파이프를 쥔 동시에 몬스터가 다시 달려들었다.

「크윽!」

2m가 넘는 거대한 체구에 온몸이 튼튼한 피부 가죽으로 뒤덮여 있는 몬스터가 천사연을 물어뜯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쇠 파이프로 겨우 몬스터의 목을 가로막은 천사연이 비교적 자유로운 다리를 이용해서 몬스터의 상체를 걷어찼다.

크르륵, 크륵!

몬스터의 아래에서 겨우 벗어난 천사연이 다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세 걸음도 가기 전에 몬스터에게 목덜미가 붙잡혀 옆으로 날아갔다.

「커억…!」

무너진 난간 기둥에 허리와 옆구리를 제대로 부딪친 천사연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마에서 피가 쏟아져 흐르며 강렬한 두통이 찾아왔다. 도망을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흐릿하게 뜬 시야로 날카로운 것에 베여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바닥이 보였다. 천사연은 정원 가위에 손이 베였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책이 시작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들린 적 없던 천사연의 생각이 죽음을 앞두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죽고 싶지 않아.」

노란 불꽃에 비친 천사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채로…….」

핏방울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꿰뚫린 팔과 베인 손바닥에서 나온 피가 바닥을 타고 번져 나갔다.

「죽고 싶지 않아.」

천사연의 피에서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새빨간 장미가 개화하는 것처럼 한번 피어난 불꽃은 피를 생명 삼아 크기를 빠르게 키워 나갔다.

크륵, 크륵.

그걸 모른 채로 피 웅덩이를 밟으며 다가온 몬스터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장검의 뾰족한 끝이 쓰러져 있는 천사연의 미간을 노리고 내리꽂히려던 그 순간이었다. 몬스터의 검에 묻어 있던 천사연의 피가 마치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검날을 녹여 버렸다.

키에에에엑! 키익!

갑자기 무기가 녹자 당황한 몬스터의 왼쪽 다리 또한 불에 타올랐다. 천사연의 피를 타고 올라온 불꽃이었다.

고통에 발버둥 치던 몬스터는 곧 온몸이 불에 집어삼켜져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하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천사연이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드득, 우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며 체격이 엄청난 속도로 커졌다.

헐렁했던 검은 터틀넥 셔츠가 커지는 몸에 맞춰 팽팽하게 늘어났다. 천사연이 내뿜는 기운을 감지한 몬스터 무리가 몰려들었다.

몬스터 한 마리 때문에 도망치고 죽을 뻔했던 방금과는 달랐다. 천사연이 제게 덤벼드는 몬스터의 목을 단숨에 낚아챘다.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가 잔뜩 묻은 몬스터는 목부터 부글거리며 녹아 내렸다.

죽은 몬스터가 들고 있던 장검을 주워 든 천사연이 검날 위에 피를 짜냈다. 뚝뚝, 은색의 매끈한 검날 위로 떨어진 피가 붉은 불길로 변해 타올랐다.

그걸 모두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는 B급이었다. 일반인은 절대 이기지 못하지만, SS급으로 각성을 마친 천사연에게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할 것이다.

‘강렬한 경험을 통해 각성한 자는 그 영향을 받는다…라는 건가.’

천사연의 불운했던 어린 시절부터 각성까지 봐 온 나로서는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결국 모든 운명이 천사연에게 피를 강요하는 것만 같아서.

‘정말이지… 네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불안하고 위태로운 어린 시절의 천사연을 그저 지켜봐야 한다는 건 내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현실 세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천사연이 조금은 보고 싶어졌다.

쓰게 웃으며 자리를 옮기는 천사연의 뒤를 쫓았다. 녀석은 저택 주변을 가득 채운 몬스터를 손쉽게 죽이며 무너진 저택 안쪽으로 들어갔다.

「쿨럭, 쿨럭! 거기… 누구… 없…….」

익숙한 목소리가 아무런 빛도 들어오지 않은 저택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눈치챈 천사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천장이 무너지며 전등이 모두 깨진 주방. 커다란 잔해에 하체가 깔린 남자가 거친 음성으로 도움을 청했다.

「이봐, 나를… 허억… 이것 좀 치워 줘…….」

강압적인 태도로 두 아들을 밀어붙였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머리를 세게 부딪혔는지 얼굴이 피범벅인 남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계속 머리를 왔다 갔다 흔들었다.

그걸 조용히 내려다보던 천사연이 곧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으… 뭐…? 다른 사람…….」

머리에 직접적으로 가해진 충격과 공포로 아들의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한 남자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없어. 없어. 여긴 나 말고 없어. 그러니까 빨리 이걸 치워서…….」

잠자코 그걸 들은 천사연이 픽 웃었다. 허탈함이 짙게 묻어난 텅 빈 웃음이었다.

「더 좋은 조건을 가져오시라니까…….」

날카로운 검날이 남자의 목을 망설임 없이 긋고 지나갔다.

남자는 목에서 피를 쏟으며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곧 숨을 거뒀다. 천사연의 첫 살인이었다.

「쯧…….」

천사연이 검에 묻은 남자의 피를 더럽다는 듯이 한차례 털어 냈다. 그때였다.

덜그럭.

돌이 굴러떨어지는 소음이 등 너머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인기척을 알아챈 천사연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주저앉아서 식은땀을 흘리는 천제헌이 보였다.

「시, 시발…….」

가까이 다가오는 천사연에게 욕설을 내뱉은 천제헌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도망칠 곳이 없는 구석까지 몰린 천제헌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외쳤다.

「오지 마, 살인자 새끼야!」

「…….」

「괴물 같은 새끼, 이것도 다 네가 한 짓이지?」

무표정한 얼굴로 욕설을 듣던 천사연이 고개를 숙여 들고 있는 장검을 응시했다. 천사연이 생각했다.

「죽일까.」

어차피 남자를 죽인 시점부터 자신은 천제헌이 말한 대로 살인자였다. 한 명 더 죽인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 없었다.

「죽일까.」

천제헌은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 온 상대였다. 자신의 것을 탐내고 빼앗아 가는 적이었다.

숨이 끊기기 직전,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비웃던 천제헌이 떠올랐다. 그러자 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곧이어 여자가 환하게 웃는 얼굴 또한 함께 떠올랐다. 자신을 꽉 안아 주던 따듯한 품도. 병마에 지치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제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던 그 다정함도.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을 알려 주듯 귓가에 ‘사랑해, 내 아들.’이라고 속삭이고는 미소 짓던 여자. 그날의 행복이 천사연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검 끝이 중심을 잃고 마구 흔들렸다. 이를 악물고 휘두른 검은 목이 아닌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어……?」

얼굴 중앙을 가로지르는 긴 상처. 베인 볼과 콧등에서 피가 넘쳐흐르는 것을 느낀 천제헌이 멍청한 눈을 하고는 제 얼굴을 더듬었다.

「시발, 뭐… 무슨… 어?」

천사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제야 천사연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천제헌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시발, 시바아알! 좆같은 새끼, 시발!」

끔찍한 절규에도 천사연은 꿋꿋하게 앞만 보고 나아갔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저택을 빠져나오자 정원에 남아 있는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헬기는 자신을 비추고 정문 너머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걸 올려다보며 천사연은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자신을 가둬 놓던 지옥 같던 저택을 등지고 천사연은 지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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