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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75화 (275/394)

275화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 작은 등 너머로는 사람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와 캐럴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흰 눈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아래층에서는 천제헌이 불러 모은 사람들이 함께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자신을 예뻐해 주는 사람들 곁에서 잔뜩 쌓인 선물을 하나씩 풀어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천제헌과 온 얼굴이 피멍으로 물든 채로 창고 방에 혼자 누워 있는 천사연. 두 아이의 삶이 극명하게 갈렸다.

책이 보여 주는 과거의 장면들을 한걸음 뒤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처음으로 어린 천사연에게 다가갔다. 느릿하게 걸어서 아이의 곁에 앉자 어둠에 가려졌던 다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천사연의 검은 머리카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예상했던 대로 손은 아무것도 만지지 못하고 통과됐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 나는 쓰게 웃으며 속삭였다.

“네가 왜 나랑 그토록 닮을 수 있던 건지 이제 좀 알겠다.”

내 손길이 아이에게 닿지 못한다 해도 나는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천사연의 머리를 한 번도 쓰다듬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그 덩치에 성격도 예민한 놈을 무슨 수로 쓰다듬어.’

헛웃음과 함께 실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낸 나는 아이의 얼굴에 맺힌 붉은 피멍을 또 한 번 바라봤다.

천사연이 이번에 겪은 일은 굉장히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겠지.

“지는 싸움도 있는 거야.”

모든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다. 그건 누구라도 불가능했다.

“다시 하면 돼.”

분했을 거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껏 줄곧 두려워한 상대에게 무작정 덤벼들 만큼.

소중한 사람을 지켜 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이 끔찍했을 거고.

하지만 아이는 여기서 결코 멈추지 않을 거다. 엘로힘이 설명했던 것처럼, 천사연을 완전히 끝낼 수 없는 고통은 그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천제헌에게 달려들기 직전의 천사연이 보인 그 눈빛의 의미를 나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어리다고 해도 그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으니.

“힘내, 천사연.”

작은 목소리로 나온 응원에 천사연의 굳은 표정이 조금은 편해졌다.

파라라락,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며 옆에 누워 있던 천사연이 흐려졌다. 곧이어 시간이 쉬지 않고 빠르게 흘러가며 점차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1년, 2년, 3년… 그리고 10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밖에 나가지 못하는 천사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에 갇혀 지냈다. 남자가 붙여 준 사람에게서 기본 에티켓과 공부, 승마 같은 고급 스포츠를 배웠다.

또래 아이들보다 더 작은 체구를 가졌던 천사연은 그 10년간 엄청난 성장을 이뤄 냈다. 자신보다 4살 많은 천제헌의 키를 따라잡았고 체격 또한 비슷해졌다.

자신을 사랑해 준 유일한 사람이 죽은 그날, 천사연은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겁을 먹고 눈치를 살피느라 의사 표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이는 사라졌다. 올곧게 세운 허리와 깔끔한 시선 처리, 군더더기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에는 기품이 묻어났다.

그쯤부터 천제헌도 조금씩 천사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쉽게 써먹을 수 있는 도구 정도로 생각한 천사연을 이제는 제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로 여겼다.

「벌레 같은 새끼.」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천사연을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천제헌은 웃는 얼굴을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걸 들은 천사연은 똑같은 얼굴로 웃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고맙네, 그렇게 봐 줘서.」

조금도 타격이 없는 천사연의 모습에 천제헌의 입꼬리가 살짝 굳었다.

처음 서로를 마주한 이후로 12년이 흘렀다. 비슷한 키, 닮은 얼굴. 천사연과 눈을 마주한 천제헌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꿈틀거렸다.

「도련님.」

나란히 서 있는 둘에게 밖을 나갔던 사용인이 다가왔다. 천사연은 철저하게 무시한 채로 천제헌에게 보고를 올렸다.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천제헌이 보란 듯이 천사연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표정 변화 없이 부딪힌 어깨만 툭 털어 낸 천사연이 다시 제 방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같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용인이 이어 말했다. 천사연과 천제헌이 동시에 걸음을 멈춰 섰다.

***

「흠. 2년만인가?」

「정확히는 2년 3개월만입니다, 회장님.」

남자가 정장 재킷을 벗으며 묻는 말에 비서가 재킷을 받아 들며 깍듯하게 대답했다.

「그 여자는?」

「외출하셨습니다.」

「쯧, 싸구려 같기는.」

혀를 차며 넥타이까지 풀어낸 남자가 그제야 두 아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천제헌과 천사연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남자가 넥타이도 비서에게 넘기며 말했다.

「지금이 몇 살이지?」

「23살입니다.」

「군대 갈 나이군.」

비웃듯이 나온 얘기에 천제헌이 무어라 반응하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지난 2년간 내가 보냈던 서류에 답은 잘 받았다.」

남자는 저택을 비운 2년 동안 서류를 천제헌에게 여러 차례 보냈다.

쉽게는 3개 국어로 된 외국어 질문부터 경영과 실무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서류로, 일종의 테스트였다.

「너희 둘 다.」

하지만 천제헌은 천사연도 같은 서류를 받았다는 사실은 지금 처음 알았다.

천제헌은 풍랑이 몰아치듯 크게 동요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제법 괜찮은 실험이더군. 흥미롭기도 했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천사연에게서 천제헌으로 이동했다. ‘실망스럽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에게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에 천제헌의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

「천제헌.」

「예, 아버지.」

「해외로 나갈 준비해라. 기간은 6개월이면 충분하겠지.」

「알겠습니다.」

남자가 천사연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다는 생각에 천제헌의 굳은 어깨가 조금 풀렸다.

「올라가 봐.」

천제헌을 내보낸 남자는 곧 뒤에서 대기하던 수행원과 사용인도 모두 물렸다.

넓은 응접실에 천사연만 남겨진 것을 확인한 남자가 그의 앞에 서며 명령했다.

「고개 들어.」

조용히 서 있던 천사연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많이 자랐다고는 하나, 남자보다는 아직 한참 작았다.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새하얀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막 봄에 접어들어 따듯해진 햇살이 천사연의 검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서류를 보내는 족족 재밌는 답변을 적어 보냈더군.」

「제 생각을 적었을 뿐입니다.」

「그게 재밌다는 거다.」

눈꼬리를 살짝 접어 웃은 남자가 천사연의 턱을 힘 있게 잡아 왔다.

「천제헌은 내가 짐작한 그대로를 보여 주더군. 이성적이고 냉정하지. 질문에 정답이 있었다면 천제헌은 90점 정도 나왔을 거다.」

이어지는 말을 들은 천사연이 대놓고 뭐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는 감정에 치우쳐서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렸더군.」

「…….」

「이 저택에서 자라면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다. 사람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살아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건지.」

남자의 반대편 손이 천사연의 허리를 천천히 감아 왔다.

「생긴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성격까지도 나보다 그 여자를 더 닮았군.」

그 여자. 그걸 들은 천사연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남자가 10년 만에 처음으로 천사연의 어머니를 언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은 달라졌다, 천사연. 하루에도 수백 명씩 괴물에게 죽어 나가는 만큼 돈 굴릴 방법은 많아졌지. 하지만 네 세상은 아직도 이 저택이 끝이구나.」

천사연의 귓가 가까이에서 남자가 엄청난 비밀을 알려 주듯 조용히 속삭였다. 어떠한 의도를 품은 손이 천사연의 허리를 은근히 쓰다듬었다.

「어떠냐. 내 말만 잘 따르면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마. 천제헌의 그림자가 아니라 천사연, 너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그제야 남자의 말뜻을 이해한 나는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렸다.

‘저 역겨운 새끼가…….’

심장 속에 잠겨 있던 차가운 기운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 순간, 무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던 천사연이 제 턱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쥐었다.

예상보다 강한 악력에 남자가 눈가를 좁혔다. 그걸 보며 천사연이 비웃음을 단 채로 입을 열었다.

「2년 동안 엉덩이가 많이 허전하셨나 봅니다.」

「뭐?」

「나이 먹을 대로 먹어서 발정 난 꼴이 제법 웃기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별로 끌리는 제안이 아니어서.」

남자의 손목을 뼈마디가 도드라지도록 강하게 움켜쥔 천사연이 제 얼굴로부터 느리게 떼어 냈다. 힘에서 밀린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 아쉬우면 외국 나갈 준비로 들뜬 형에게 가 보지 그러십니까? 그쪽은 고민할 것도 없이 하겠다고 할 텐데.」

「이 새끼…….」

「저랑 하고 싶으면 더 좋은 조건을 가져오시고.」

남자에게서 한걸음 물러선 천사연이 보란 듯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묵례를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분노와 수치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남자를 지나쳐 급히 천사연의 뒤를 쫓아갔다.

‘큰일 날 뻔했네.’

너무 기분 나쁜 나머지 하마터면 개입 능력을 쓸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걸어가는 천사연의 등을 바라봤다.

천사연도 이런 취급은 처음 당해 봤는지 성큼성큼 나아가는 걸음이 굉장히 거칠었다.

그저 지켜보는 나도 어이없고 기분이 더러웠는데 천사연은 오죽했을까. 그나마 천사연이 만만한 성격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이제 막 19살이 된 나이. 29살의 천사연을 알아서 그런가, 내 눈에는 9살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어려 보이기만 했다.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온 다음 날, 천사연은 아주 당연하게도 열흘간 방에 갇혀 있어야 하는 벌을 받게 됐다. 식사 또한 하루 동안 금지됐다.

‘아이 때는 적어도 밥은 챙겨 주더니.’

천사연이 성년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남자에게 모욕받은 것을 그대로 갚아 줘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식사 금지를 듣고도 천사연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러려니 했다.

핸드폰이나 TV 없이 책 몇 권만으로 열흘이나 방에 갇혀 지내야 하는 천사연은 무료한 눈을 하고서 창밖만 바라봤다. 나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

따듯한 날씨에 나무마다 연초록색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정원을 둘러보던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일순간 굳었다.

「…저건 뭐지?」

나와 마찬가지로 정원 너머를 본 천사연이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저택의 정문 바로 근처, 그곳에 검푸른 빛이 일렁거리는 타원형의 입구가 나타났다.

‘설마……!’

저 이질적인 것의 정체가 게이트라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앞으로 벌어질 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피해, 천사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던 천사연이 내 외침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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