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파라라락,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풍경도 빠르게 변해 갔다.
꽃송이가 폈다가 지고, 새파란 잎사귀가 붉게 물들어 바닥으로 떨어지며 회색빛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떨어졌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가 보이는 창문에 서 있던 천사연이 의자에 앉자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가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연이니……?」
「네.」
겨우 1년 사이에 아이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키가 조금 크고 옷차림이 단정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한 점의 빛도 찾아 볼 수 없는 어둑한 표정이었다.
놀이터에서 공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여자에게 과자를 먹고 싶다고 조르던 아이는 이제 없다.
「…사연아.」
여자가 바싹 마른 손을 들어 올리자 아이, 천사연이 새하얀 손으로 마주 잡았다.
「네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좀 더… 같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던 여자가 기력이 다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복잡한 눈빛으로 보던 천사연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열린 방문 너머로 상대의 옷자락이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천사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올게요.」
「벌써…?」
「네. 약 잘 챙겨 드세요.」
「걱정하지 마렴.」
흐트러진 이불을 제 가슴 위로 덮어 주는 천사연을 잠자코 보던 여자가 힘겹게 팔을 올려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지나치게 창백한 손은 그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덜덜 떨렸다.
「내 사랑하는 아가.」
「…….」
「엄마는 항상 널 사랑해.」
그 말에 감정이 북받친 듯 일순간 눈가를 찌푸린 천사연이 잔뜩 흔들리는 음성으로 낮게 대답했다.
「저도요.」
상체를 숙여 여자의 움푹 팬 볼에 입을 맞춘 천사연이 방을 나섰다.
소음이 나지 않도록 방문을 닫은 아이는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향했다. 그제야 나는 이 장소가 정원 구석에 있는 작은 별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여기 오지 마.」
천사연이 별채에서 멀어지는 또 다른 아이를 향해 소리 높여 외쳤다. 그걸 들은 아이가 몸을 천사연을 향해 돌렸다. 드러난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뭐?」
「오지 말라고.」
천제헌이라고 불린 아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 앞에 섰다. 체구 차이가 워낙 커서 천사연의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엄마는 너 싫어해.」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천제헌을 코앞에 두고도 천사연은 조금도 겁먹지 않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오지 마.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
아무런 대꾸 없이 듣던 천제헌이 짜증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대뜸 손바닥을 휘둘렀다.
철썩!
피할 새도 없이 제 얼굴만 한 손바닥에 옆머리와 볼을 그대로 얻어맞은 천사연이 정원 바닥을 뒹굴었다.
「병신 같은 새끼가.」
맞을 때 한 번,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한 번 더 부딪힌 천사연은 쉽사리 일어서지 못했다.
통증에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천사연을 벌레 보듯 응시하던 천제헌이 다시 등을 돌려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던 천사연이 화들짝 놀라며 손바닥을 확인했다. 하필 옆에 정원 가위가 놓여 있던 탓에 손바닥이 길게 베여 피가 흘렀다.
「아, 아파….」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자 당황한 천사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의 시선이 저택과 작은 별채를 한 번씩 오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중얼거렸다.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
그러고는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반대쪽 손으로 가린 채로 절뚝거리며 저택으로 걸어갔다.
정원을 돌아다니는 여러 명의 수행원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천사연을 도와주지 않았다. 다친 채로 혼자서 거대한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마치 괴물에게 먹히는 것처럼 보였다.
***
이 집에서 천사연의 역할은 기업의 뒤를 이을 천제헌이 겪어야 할 쓸모없는 일들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 저택에 끌려오듯 들어와 억지로 결혼하여 천제헌을 낳았다.
그리고 4년 후, 둘째인 천사연이 태어나자마자 갓난아이를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7년이 지났다.
서울 변두리에서 7년 동안 가문 소속 전문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이를 키워 오던 여자 앞에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천제헌을 위한 아이가 필요해서.
남자는 여자가 떠나자마자 재혼했다. 재혼한 여자에게서 대신 고생할 아이를 얻어 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재혼한 여자는 남자의 예상보다 더 큰 야욕을 품고 있었다. 고분고분하던 이전 여자와는 모든 게 달랐다. 그녀에게서 아이를 봤다가는 굉장한 소음이 뒤따를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보험으로 들어 둔 천사연을 여자에게서 뺏듯이 가져왔다. 물론 깔끔한 뒷정리를 위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여자 또한 끌고 와 별채에 처박았다.
천사연은 출생 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버려진 아이였다.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아이. 천제헌의 그림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외톨이. 그게 천사연이었다.
이제 8살이 된 아이는 제 방으로 들어가 서툰 손놀림으로 손바닥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덕지덕지 붙였다. 좁고 먼지가 날리는 방은 창고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겨우 피가 멈춘 상처에 천사연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천제헌에게 필요한 존재였으니 다쳤다고 얘기하면 사용인이 의사를 불러 주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세세하게 상처를 봐 준다고 해도 그건 애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여자도 생명이 꺼져 가는 와중이었으니 아이에게 신경을 써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집에 가고 싶어.」
지친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어 낸 천사연이 두 눈을 굳게 감았다. 그걸 끝으로 다시 모든 게 흐려졌다.
또 1년이 지나갔다. 이제 9살이 된 천사연의 취급은 여전히 똑같았다.
입김이 희게 나오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재혼한 여자가 변덕으로 틀어 둔 캐럴이 옅게 퍼지고 창밖에는 굵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져 내렸다. 천사연을 낳은 여자가 죽은 건 그날이었다.
하필 천사연은 천제헌을 대신해서 벌을 받고 있었다. 자신의 방에 사흘간 갇혀 있어야 하는 아주 간단한 벌이었지만, 여자가 위독한 상태라는 말을 들은 천사연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내보내 주세요!」
천사연은 필사적으로 외치며 문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9살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소리 지르고 애원했다.
끼이익.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기적처럼 열리며 그 앞에 남자가 나타났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맞춰 입은 정장과 서늘한 인상의 미남자. 저택의 주인이었다.
「네 어미를 보러 가고 싶나?」
그는 천사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남자는 천사연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
천사연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회할 텐데.」
「보러 가게 해 주세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남자가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했다. 사용인이 저택 문을 열어 주자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휘몰아쳤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추울 만도 할 텐데, 정원을 지나 별채로 가는 동안 천사연은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갔다.
천사연의 안색이 불안으로 창백하게 질려 갔다. 별채 문이 열리고 여자가 있는 방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천제헌이었다. 그가 와 있었다. 자신보다 더 먼저.
그걸 알아챈 천사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방으로 향하는 걸음 속도도 한층 더 빨라졌다.
「네. 저도 알아요.」
덜컹, 발이 뒤엉켜 넘어질 뻔한 몸의 중심을 겨우 잡은 천사연이 방 앞에 섰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침대 근처에 서 있는 의사들과 천제헌이 보였다.
그는 여자의 마른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천사연이라도 된 것처럼.
「그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상체를 기울이고 여자 쪽으로 귀를 갖다 댄 천제헌이 여자가 무어라 말한 내용을 듣고 나서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랑해요.」
삐이이, 그걸 끝으로 여자의 심장이 멈춘 것을 알리는 기계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천제헌이 손을 놓고 물러서자 의사가 여자의 얼굴에 흰 천을 씌웠다.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던 천사연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뭘?」
뻔뻔하게 웃은 천제헌이 문을 가로막은 천사연의 앞에 섰다.
「네가 멍청하게 미적거려서 인사도 못 하고 보낼 뻔한 거 내가 해 준 건데 고맙다고 해야지.」
「어, 엄마는 날 기다린 거야. 그걸 왜 네가 멋대로…….」
「야.」
커다란 손이 아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캑캑거리는 천사연을 끌어당긴 천제헌이 부릅뜬 눈으로 짓씹으며 말했다.
「여기에 있는 건 다 내 거야, 병신아. 그러니까 당연히 내 마음대로 하는 거지.」
「…….」
천사연을 거칠게 밀쳐 낸 천제헌이 비웃음을 입가에 단 채로 옆을 지나갔다. 멍하니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던 천사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엄마가 뭐라고 하셨어?」
「알려 주기 싫은데?」
장난치듯 나온 대답에 천사연이 두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지는 천제헌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대로 망설임 없이 뛰어간 천사연이 천제헌에게 달려들었다. 쿠웅, 별채 현관 앞에 천사연과 천제헌이 뒤엉켰다.
「기다려.」
몸싸움을 시작하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본 수행원들이 나서려는 것을 남자가 막았다. 그러고는 흥미로운 기색으로 둘을 바라봤다.
「시발 새끼가!」
미친 듯이 달려드는 천사연을 겨우 떼어 낸 천제헌이 주먹을 휘둘렀다. 체격과 힘이 둘 다 밀리는 천사연은 반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맞았다.
씩씩거리며 쉬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던 천제헌은 천사연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서야 때리던 것을 그만두고 몸을 일으켰다.
「벌레 새끼.」
퉤, 천사연의 몸 위로 침까지 뱉은 천제헌이 별채를 나갔다. 그 모든 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천사연의 옆에 섰다.
눈두덩이가 붓고 코피가 터져 온 얼굴이 피범벅이 된 아이를 내려다본 남자가 말했다.
「약하군.」
「…….」
「벌은 마저 받아야지. 적당히 치료해서 방에 던져 놔.」
「예.」
명령에 수행원들이 천사연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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