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69. 그 아이, 천사연
엘로힘과 미리 상의해 둔 대로 책을 읽을 날이 오자 천사연은 1층 가장 안쪽에 있는 홈 시어터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은 적당히 넓었고 누울 수 있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소파가 따로 놓여 있었다.
“나쁘지 않네요.”
“다행이군.”
방을 살펴본 내가 간략한 감상을 말하자 뒤에서 지켜보던 천사연이 픽 웃었다.
“바로 시작할 건가?”
“아뇨, 그 전에…….”
나는 천사연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내가 오늘부터 책을 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모두 시간을 비운 것이다. 책을 펼치면 다 볼 때까지 잠들어 있을 텐데, 모두에게 무리를 시킨 것 같아서 신경 쓰였다.
“잠깐 대화 좀 하죠.”
혹여 얘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방문을 굳게 닫으며 말하자 천사연이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거지?”
“뭐겠어.”
품에 안고 있는 책을 살짝 들어 보이자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내가 보는 게 싫으면 싫다고 말해.”
“별걱정을 다 하는군.”
책을 다시 내 쪽으로 가볍게 민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동의 없이 네 과거를 보게 된 건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너도 내 과거를 봐야 공평하지.”
“그거랑은 다른 상황이잖아. 공간을 들어간 건 어쩔 수 없는…….”
“내 과거를 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망설임을 끊어 낸 천사연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잖아. 너도 그걸 아니까 기록자 형제에게 이 책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거 아닌가?”
“…….”
“결정을 내렸으면 흔들리지 마. 고작 이런 일로 흔들린다면 아무도 지키지 못할 거다.”
지키지 못한다는 말에 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도가 몰아치는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는 가슴속을 힘겹게 진정시킨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천사연.”
내가 진정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준 천사연이 힘겹게 나온 내 대답에 쓰게 웃었다.
“다녀와.”
그의 서늘한 손이 눈꼬리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현실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천사연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과거를 보는 것을 받아들였다.
도리어 물러서지 말라고 격려까지 받았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천사연의 과거를 통해서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었다.
내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아챈 엘로힘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책을 든 채로 소파에 앉는 나를 모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책을 펼치면 바로 시작된단다, 세현아. 저번에 한이결의 과거를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거다.”
“알겠습니다.”
“책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결코 끊을 수 없다. 그러니 그저 책이 보여 주는 과거라고 여기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엘로힘이 드물게 굳은 얼굴을 한 것이 보였다.
“특히 네가 가진 개입 능력은 절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니.”
“네. 능력을 쓰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쓰는 건 어쩔 수 없다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엘로힘이 한 걸음 물러섰다.
“대가는 네가 원한 대로 책을 다 본 이후에 가져가겠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책을 보기로 결정했으니, 대가가 무엇이 됐든 천사연의 과거부터 본 후에 치르기로 미리 얘기를 끝내 뒀다.
“프라우스 신도단과 칼리에 대해서 못다 한 설명은 네가 책을 보는 동안 내가 대신해 주겠다. 그러니 마음 편히 보고 오렴.”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요, 이결 씨.”
피이익, 픽!
민아린과 여우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책을 펼친 그 순간이었다. 지금껏 조용히 서 있던 천사연이 내게 말했다.
“과거의 나도 잘 부탁해, 한이결.”
무슨 뜻인지 채 묻기도 전에 드러난 책 속지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시야를 집어삼킨 빛과 함께 몸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뒤틀린다. 수백, 수천 가지의 빛줄기가 내 몸을 스쳐 지나가며 오싹한 소름이 쉴 새 없이 등줄기를 치고 지나갔다.
현재가 멀어진다. 나는 지금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
“허억……!”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끔찍한 감각에 헛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온몸이 떨리도록 저릿한 통증이 아주 잠깐 느껴졌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쿵쿵거리는 강렬한 두통이 잦아든 다음에야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풀 냄새…….’
바람에 살랑거리는 초록색 풀이 보였다. 그사이에 활짝 피어난 붉은 꽃송이도.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펴고 일어섰다.
잡초가 무성히 돋아난 작고 낡은 놀이터가 펼쳐졌다. 끼익, 끼익. 바람에 녹슨 그네가 삐거덕거리며 흔들렸다.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그때였다. 밝은 웃음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앗, 공…!」
햇살을 등지고 내게로 다가온 어린아이 앞에는 샛노란 공이 흙바닥을 통통 튀기며 굴러가고 있었다. 내 허벅지에도 못 올 만큼 체구가 아주 작은 남자아이가 열심히 뛰어서 공을 잡았다.
동그란 뒤통수와 가볍게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유독 시야에 박혀 왔다. 설마…….
「사연아.」
저 멀리 놀이터 바깥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부름을 들은 남자아이가 겨우 잡은 공도 던져 버리고 여자를 향해 달려갔다.
「재밌게 놀았어?」
「응.」
「해 저무니까 이제 그만 놀고 집으로 가자. 저녁 먹어야지.」
조곤조곤 나오는 말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걸 아이도 아는지 작고 동그란 머리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수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는 내가 아는 사람을 아주 많이 닮았다.
「우리 사연이. 저녁으로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천장에 숨겨 둔 거.」
「그건 과자잖아.」
「응, 그거.」
「밥을 먹어야 과자를 주지.」
남자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은 채로 여자가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점차 멀어지는 두 사람이 곧 물에 탄 먹물처럼 확 번지며 흐려지다가 이내 다른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 하신 말씀은 이게 아니었어요. 약속을 이렇게 어기시면…….」
「그럼 어쩌겠다는 거지?」
주변이 순식간에 실내로 바뀌었다. 방 두 칸짜리, 생활의 흔적이 묻어난 집 안 풍경 사이로 낯선 남자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몸을 하고 아이를 계속 키우겠다는 건가? 혼자서?」
놀이터에서 봤던 작은 아이가 방문을 살짝 열고 거실을 훔쳐봤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불빛과 함께 남자와 여자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혼자 키울 겁니다. 저와 아이에게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상황이 바뀌었다.」
여자의 애원을 냉정하게 잘라 낸 남자가 명령하듯 고압적으로 말했다.
「새로운 아이가 필요해졌어.」
「그게 무슨…….」
「아이를 넘기고 너도 따라 들어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이의 미간이 불안하게 일그러졌다.
「그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절대 싫어요.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지!」
「죽어? 이 지저분한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죽겠다고?」
남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상황 파악이 이렇게 느려서야. 아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매정한 어미로군.」
「…….」
「얼마 살지도 못할 거면서 아이 미래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건가? 이 좁아터진 곳에 아이만 두고 죽으려고?」
비수처럼 쏟아지는 신랄한 비난에 여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지금 내 호의를 거절한다면 나도 더 볼일 없다. 이 쓰레기장에서 저 아이가 죽어 가도 일체 관여 안 하겠다는 뜻이다.」
「…….」
「어미의 사체 옆에서 굶다가 죽는다라. 참 멋들어진 끝이겠군.」
결국 여자가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아이가 작은 손을 꾹 말아 쥐었다.
또다시 모든 풍경이 물에 번지듯 옅게 흩어졌다. 새하얀 빛 사이로 화려하게 생긴 가구들이 빠르게 생겨났다.
이제 주변 모든 것은 값비싼 가구들뿐이었다. 높다란 천장과 호화로운 소파가 가득 들어찬 넓은 응접실. 이 공간을 씁쓸한 차 향기가 가득 채웠다.
「저 아이인가요?」
고급스러운 숄을 걸친 낯선 여자가 다리를 꼬며 묻자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넥타이를 잡아 풀며 답했다.
「그래.」
「흐음.」
제게로 꽂히는 깔보는 시선에 응접실 구석에 서 있던 아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뭐… 확실히 그 여자랑 닮았네. 첫째도 그렇고 둘째도 그렇고. 어째 그 여자랑만 닮고, 당신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쓸데없는 소리를. 천제헌은 불렀나?」
「네. 곧 오겠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수행원과 함께 어린 남자아이가 들어섰다. 좋은 옷을 입고 깔끔하게 정리가 된 머리를 한 남자아이는 딱 보기에도 곱게 자란 티가 났다.
「제헌이, 이리 와.」
내내 싸늘한 태도를 하던 여자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수행원과 함께 들어온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오늘부터 제헌이한테 동생이 하나 생겼어.」
「동생?」
「그래. 동생 갖고 싶다고 했지? 자, 서로 인사해.」
닮은 생김새의 두 남자아이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키. 한쪽은 불쾌한 표정을, 한쪽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딱딱하게 굳은 두 아이를 보며 뱀처럼 웃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자, 이쪽은 천제헌. 제헌이 형이라고 부르고.」
「…….」
「이쪽은 천사연. 사연이 동생이라고 하면 돼. 알겠지?」
「인사 끝났으면 올려 보내.」
「어머, 매정하기는. 그래도 이제 한집에서 같이 살 식구인데 친해질 필요는 있지 않겠어요?」
반대편 아이, 천사연이 그 말에 절망스러운 눈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에 고개까지 숙이니 훨씬 작아졌다.
“…….”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나도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눈앞은 모든 게 재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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