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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72화 (272/394)

272화

칼리의 피.

엘로힘의 나직한 답이 심장을 찔러 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그 피가 공간을 만들 때 사용됐다는 설명을 리웨이에게 들은 그 순간부터 짐작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많은 수의 제작자들이 모여서 만든 공간이라 해도 실제로 살아 움직이던 인물들을 그렇게 현실감 있게 구현해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건 정말로 기묘했네… 그 피만 있으면 정말 뭐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

정신 지배에 걸린 상태에서도 피의 존재를 정확히 기억해 냈다는 점과 홀린 듯이 찬양하던 말이 결정적이었다.

내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읽어 낸 엘로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 또한 칼리의 피라서 나타난 반응이란다. 전투 등급이 높았으면 나았겠지만, 그는 제작 능력자였으니.”

“그 피가 활용된 무언가가 또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군요.”

“그렇지.”

“지난 시간에서는 그랬던 적이 있습니까?”

내 질문에 묘한 미소를 지은 엘로힘이 내 앞에 놓인 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손이 전혀 움직이질 않는구나. 일단은 아침 식사 시간이니 먹는 것에 더 집중하렴.”

“엘.”

내 부름에도 그는 단호했다. 엘로힘은 내가 죽을 반쯤 퍼먹은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칼리도 우리와 같은 존재이니 제 피가 가진 힘을 정확히 알고 있단다. 세계와 가장 가까운 존재의 피가 가진 힘을. 그래서 오히려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았지.”

“비교적 최근이라는 거군요.”

“그녀도 알고 있을 테니까. 이 세계가 끝을 보인다는 사실을.”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낸 엘로힘이 내 앞에 잔을 놔 주고 주스를 채웠다. 샛노란 오렌지 주스가 잔에 가득 차올랐다.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프라우스 신도단도 똑같다. 그들도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기를 바라며 안달 내고 있지.”

“D45 구역 게이트 폭탄 테러부터 길드 관리 본부 습격, 마약 사건, 닥터의 공간까지. 프라우스 신도단의 행보에서 그놈들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건 눈치챘습니다.”

“…….”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봤던 길드 관리 본부 습격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무너지는 건물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비명, 자욱하게 퍼져 나가는 연기를 뚫고 나타난 검은 가면을 쓴 자들.

-실패해서 참 아쉬워. 네가 미치는 꼴을 한번 보고 싶은데.

천사연의 앞에 선 하얀 가면의 정신 지배 능력자, 사마엘.

-시간을 돌리기 전에는 몇 번이고 봤다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가 기억을 못 하잖아.

그가 내뱉는 독약 같은 말과 창백하게 굳은 천사연의 얼굴이 한데 엉켜 가슴속에서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일어서라, 진화된 이들이여. 우리는 정당하게 이 세계를 지배할 존재들이다.

-더는 힘이 있음에도 억눌려 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침묵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올 때까지, 이 반석 위에 그분의 업적을 세우리라.

사마엘에게 정신이 지배당한 상태로 프라우스 신도단의 목적을 읊은 후에 천사연이 막아서자마자 곧바로 죽어 버린 한 명의 민간인 능력자까지.

그 장면을 찍고 있던 수십 대의 카메라와 시체 분석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자칫 천사연이 난감해질 수 있던 상황이었다.

“세계가 망가지면 프라우스 신도단의 목적 또한 이루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텐데, 프라우스 신도단은 어째서 이렇게 강압적으로 움직이는 겁니까?”

어딘가 슬픔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하고서 내 얘기를 듣던 엘로힘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결정권은 그쪽이 갖고 있기 때문이지.”

“결정권이라는 게 무슨 뜻이죠?”

“내게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나을 거다.”

“천사연의 과거를 통해서요?”

“그래.”

그 말에 혼란스러워진 건 오히려 나였다.

“…대체 천사연은 칼리에게 어떤 존재인 겁니까?”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줄 존재.”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이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열어 둔 창문에서 불어온 가을바람에 엘로힘의 긴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살아온 천사연은 보통 SS급보다 강한 힘을 갖게 됐지. 그 아이가 본래 가진 능력 자체도 위험한데 그 긴 시간을 쉬지 않고 싸워 왔으니… 누적된 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

“클로에 에스너라는 능력자가 알아챌 정도이니 말이다. 같은 SS급인 하태헌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이지.”

천사연은 반복된 시간까지 합치면 하태헌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당연히 강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이번 시간에서는 천사연이 아직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으니 모를 만하지.”

“설명을 들으니 조금은 감이 잡힙니다.”

닥터와의 싸움에서 박건호와 우서혁이 다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제 팔을 그어 내던 천사연.

자신의 피를 무기로 써야 하는 그가 이제껏 얼마나 자신의 몸에 상처 내는 짓을 해 왔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입맛이 뚝 떨어져서 수저를 내려놓자 엘로힘이 이해한다는 기색으로 대신 주스가 담긴 잔을 내게 밀어 줬다.

“억지로 먹지 마렴. 대신 조금 이따가 샌드위치 하나라도 먹는 건 어떠니? 조금씩 자주 먹는 게 낫겠구나.”

“감사합니다.”

확실히 죽 대신에 새콤한 주스를 마시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주스를 반쯤 마신 후에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서 물었다.

“책은 언제쯤 보면 좋습니까?”

“오늘까지는 쉬어라. 다 보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나흘 이상 걸릴 가능성이 큰가 보네요.”

“책이 꽤 두꺼운 데다 내용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칼리가 직접 등장하니 보는 동안 힘이 그만큼 소모될 거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보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기 전에 천사연과 잠깐 대화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엘로힘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난 상관없단다. 어차피 천사연도 네게 할 말이 있어 보였으니까.”

“그런가요?”

천사연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늦어도 새벽에는 돌아올 테니 그때 기회 봐서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제안해 봐야겠다.

***

아침 일찍 나갔던 사람들은 다들 자정이 조금 넘어서 돌아왔다.

해야 할 일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던지 천사연과 하태헌을 포함해서 모두가 제법 피곤해 보였다.

“팀원들이 얼마나 생난리를 치던지… 해외 두 번 나갔다간 기 빨려서 죽겠군.”

“저도요. 가뜩이나 힐러팀은 일거리가 많은데 제가 자리를 비우니까 쌓인 게 장난 아니더라고요.”

투덜거리는 박건호와 민아린 뒤로 김우진과 우서혁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가 보통 회사처럼 굴러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이만큼 지친 것도 이해가 갔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들고 계신 건 뭡니까?”

“먹을 것 좀 사 왔습니다.”

우서혁이 들고 있던 봉투를 내게 건넸다. 도시락…인가? 이 플라스틱 용기에 뭐가 담긴 거지?

봉투 속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주방을 확인하고 온 박건호가 음식의 정체를 알려 줬다.

“족발이랑 보쌈, 도시락을 좀 사 왔는데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보다 한이결. 왜 먹은 게 하나도 없는 거지?”

“예?”

“설마 온종일 굶은 건가?”

내 주변에 옹기종기 서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의심이 깃들었다. 금방이라도 거세게 추궁당할 기세라 급히 외쳤다.

“아닙니다! 먹었어요. 죽도 먹고 샌드위치도 먹고… 그렇죠, 엘?”

“성인 남성의 식사량보다 굉장히 낮지만 먹기는 먹었단다.”

앞에 왜 그런 쓸데없는 설명을 붙이고 그러세요. 슬쩍 시선을 피하자 하태헌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식사부터 하도록 하지.”

“오, 찬성합니다.”

“좋아요~! 이결 씨, 식탁으로 가요.”

“예? 아니, 저는…….”

나 샌드위치 먹은 지 2시간도 안 됐는데.

민아린과 권정한에게 양팔이 붙잡혀서 끌려가며 뒤를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로 나란히 서서 나를 구경하던 천사연과 엘로힘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짙게 웃었다.

‘도와 달라고…….’

뻔히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둘의 모습이 엄청나게 얄미웠다.

결국 강제로 식탁 의자에 앉혀져서 늦은 식사를 하게 된 나는 한참 뒤에나 풀려날 수 있었다. 피로한 몸을 끌고 비척비척 방으로 돌아와서 곧장 씻었다.

피익, 픽!

창틀에 앉아서 바깥을 구경하며 꼬리를 살랑이던 여우가 욕실을 나오는 내게 슝 날아와 안겼다. 비비적거리는 여우의 등을 토닥거리며 하품을 길게 했다.

“오늘은 바로 자자.”

픽!

내 말에 여우가 눈을 길게 접어 웃었다.

그 모습에서 어째 아까 나를 도와주지 않고 웃기만 했던 엘로힘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이렇게 보니 은근 닮았네.

바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이번에도 하태헌인가? 천사연이 따로 준비해 준 파자마의 단추를 채우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얼마 가지 않아 문이 끼익 열리며 온 얼굴을 붉게 물들인 김우진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선 방으로 들어왔다.

“김우진? 무슨 일이야? 안색은 또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 그냥… 할 얘기가…….”

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나갈 때도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던가. 쭈뼛거리며 서 있는 김우진을 대신해서 열린 문을 닫으며 침대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

“…….”

“뭔데 그래?”

하태헌과 대화를 나눌 때와 마찬가지로 김우진과 침대에 나란히 앉으며 재차 묻자 녀석이 한층 더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도…….”

“어.”

“지, 집을… 이렇게 큰 집은 힘들겠지만… 집을…….”

집? 갑자기 무슨 집? 이해하기 힘들어서 막 미간을 찌푸린 그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가 김우진의 말을 뚝 끊어 냈다. 이번에야말로 하태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잠깐만.”

“으응…….”

다시 문으로 걸어간 나는 손잡이를 잡고 벌컥 열었다. 그러자 가장 앞에 서 있는 박건호와 민아린부터 시작해서 권정한, 우서혁, 하태헌, 천사연, 엘로힘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이결 씨! 우리 새벽 수다 떨어요!”

“이야, 김우진은 어디 갔나 했더니 이미 와 있었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형, 클로에 부마스터께서 챙겨 준 간식도 좀 들고 왔는데 먹을래요? 양치만 한 번 더 하면 되잖아요.”

“그나마 넓은 방을 줘서 다행이군.”

“왜 다들 제 방을… 잠깐만요!”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나를 밀치고 모두가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뭐야? 기가 막혀서 머리가 다 아팠다.

“이럴 거면 그냥 1층 거실로 가면 되잖습니까!”

“달라. 장소가 주는 기분이 다르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렴, 세현아. 자, 네가 좋아한다던 마카롱이다.”

넉넉했던 방 안이 순식간에 꽉 찼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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