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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71화 (271/394)

271화

손길이 목선을 따라 멈추지 않고 쇄골 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몸이 절로 움찔 떨렸다.

‘잠깐…….’

뽀뽀만 한다고 하지 않았나? 멈추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쇄골을 지그시 누른 손은 다시 목 위로 올라왔다.

“읏.”

귓불을 꾹 누른 엄지손가락이 귓바퀴 안쪽을 따라 둥글게 움직였다. 오싹한 소름에 더는 참지 못한 내가 막 그 손을 치우려던 그때였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에서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하태헌이 내게 입을 맞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꾹 감고 있던 눈을 놀라서 번쩍 뜨자 코앞에 있는 하태헌의 잘난 얼굴이 보였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온몸이 굳어 버렸다.

“하태헌 씨, 잠… 읏, 읍…….”

쪽, 쪽, 쪽, 쪽.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그가 쉬지 않고 입술에 입을 맞춰 왔다. 나는 그제야 하태헌이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이유를 알아챘다.

차라리 내가 할걸! 그럼 간단하게 볼에 뽀뽀해 주고 끝났을 텐데!

귀에 들려오는 쪽쪽거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내게 입을 맞춰 오는 이가 하태헌이라는 사실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황급히 상체를 뒤로 기울였지만, 그도 똑같이 따라와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뒤로 물러서다 보니 어느새 폭신한 침대가 등에 닿아 왔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귀를 잡은 채로 뽀뽀를 하던 하태헌이 그제야 멈췄다.

“그렇게 피하면 좀 상처인데.”

“…계속하셨잖아요.”

“한 번만 하겠다고 한 적 없다.”

그건 그렇지만. 어째 나만 당하는 것 같은데.

지나치게 가깝게 붙어 있는 하태헌의 어깨를 밀어 내며 눈가를 찌푸리자 그가 픽 웃었다. 그러고는 제 어깨에 얹은 내 손을 가져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또다시 쪽,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음 같아서는 더 하고 싶다만 장소가 영 별로군.”

“예? 이만큼 하셔 놓고 더 하고 싶다고요?”

“그런 뜻의 더 하고 싶다는 게 아니다. 아무튼 일어나.”

…그럼 무슨 뜻인데?

손목을 잡아당겨 나를 가뿐히 일으킨 하태헌이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기분은 확실히 좋아 보이네.

“다음번에는 다른 수를 써야 할 것 같군.”

“다른 수고 뭐고 절대 안 넘어갈 거니까 포기하시죠.”

“라이벌이 워낙 많으니 이렇게라도 힘내야 하지 않나?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35세 아저씨가 들어 있는 남자를 누가 좋아한다고. 하태헌의 저 이상한 취향이 참 걱정스러웠다.

“제게 이런… 감정을 갖는 사람은 하태헌 씨밖에 없을 겁니다.”

하태헌이 별로 동의하지 않는 표정을 하고는 대화 주제를 다시 책으로 돌렸다.

“늦어도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중에는 돌아올 텐데. 기다릴 순 없는 건가?”

“그건 엘과 조율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쉬라고 했으니 바로 들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처음 엘로힘이 책을 꺼내 들었던 그 순간, 나와 같이 책에 시선을 보내던 천사연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천사연과도 따로 얘기를 한번 할 계획입니다. 천사연의 과거니까요.”

“그렇군.”

복잡한 표정으로 책을 응시하던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과 대화해 보는 건 찬성이다. 본인 과거니까 중요하거나 조심해야 할 부분을 알고 있겠지.”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게 과거를 보여 줘야 하는 천사연의 입장도 신경 쓰입니다.”

“글쎄.”

그가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천사연이라면 별 상관 안 할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보는 것이니.”

“네?”

“가능하다면 내 과거도 보여 주고 싶군.”

“아, 그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태헌의 과거를 본 적은 없었지만, ‘어비스’를 통해서 살아온 삶을 엿보기는 했던 터라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아니, 제대로 따져 보면 저번 시간대의 하태헌이라 해도 과거는 과거이니… 나는 당사자에게 허락받지 않고 과거를 소비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흥미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놔야 하나?’

어비스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왜 그를 이해하고 도와줬는지 그 이유까지도…….

하지만 생각과 달리 쉽사리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하태헌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예상이 가지 않았다.

고작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가볍게 읽었다는 사실에 실망할까, 아니면 그 책의 주인공과 혼동하지 말라고 화를 낼까.

내가 망설이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난 하태헌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저 쉬어라. 그간 일이 많았으니 오늘까지는 여유롭게 지내는 게 좋다.”

“저, 하태헌 씨.”

방을 나가려는 하태헌이 내 부름에 멈춰 섰다.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뇨, 아닙니다. 하태헌 씨도 푹 쉬세요.”

“잘 자라.”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하태헌을 내보냈다.

달칵,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홀로 남겨진 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죽으로 된 책의 겉표지를 느릿하게 쓸어 만졌다.

‘천사연의 과거부터 보고…….’

설명은 그 뒤에 하자. 굳이 지금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습게도 나는 어비스에 대해서 알게 된 하태헌이 내가 과거를 보는 동안 곁을 떠나지는 않을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엘로힘과 함께 70일을 지내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예전에 나는 오로지 하태헌이 내게 실망할까 봐 겁을 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태헌이 떠나간 이후에 그 빈자리를 보고 느낄 상실감이 무서웠다.

어느새 이렇게 됐구나. 그제야 하태헌과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럼 이결 씨, 푹 쉬고 계세요.”

“금방 갔다 올게.”

나와 엘로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외출할 채비를 마쳤다.

무소속인 나와는 다르게 다들 밀린 일 처리를 하기 위해 길드로 돌아가 봐야 했다.

“다녀오세요.”

민아린과 김우진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데 옆에 있던 박건호가 갑자기 볼을 잡아당겼다.

“으, 뭡니까?”

“생각보다 더 말랑말랑하네.”

“장난치지 마세요.”

나와 박건호가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조용히 보던 우서혁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좀 더 주무시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수면 시간이 5시간도 채 안 되지 않았습니까?”

“잠이 좀 깨서 당장은 괜찮습니다. 이따가 피곤하면 낮잠이라도 자죠, 뭐. 집에 침대도 많던데.”

“칭찬 고맙군.”

심드렁히 덧붙이자 천사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해 왔다. 장난 아니게 재수 없네.

“어느 방 어느 침대에서 자고 있는지 찾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거기까지 하시죠. 다들 언제쯤 돌아올 것 같습니까?”

“마스터께서 출발하실 때 같은 차를 타고 올 예정이에요. 아마 자정 넘어서 출발하지 않을까 싶은데… 하태헌 부마스터는 어떠세요?”

“하태헌 씨는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중에 돌아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다들 비슷하게 오겠네요.”

“엇… 두 분이 이미 얘기를 나눴었나 보네요?”

아차. 반사적으로 내가 얘기해 버렸다. 어색하게나마 얼버무리려는데 하태헌이 한발 먼저 선수 쳤다.

“새벽에 따로 만났었다.”

“어머, 그래요?”

으스대듯 나온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나와 하태헌에게로 꽂혔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민아린의 뒤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김우진과 복잡한 미소를 지은 박건호, 미간을 얼핏 찌푸린 우서혁이 보였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천사연과 입가를 매만지는 권정한, 흥미롭게 지켜보는 엘로힘까지도.

“그… 잠깐 대화를…….”

너무나도 궁색한 변명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설마 하태헌의 감정이 들킨 건 아니겠지? 걱정되는 와중에 자꾸만 하태헌과 있었던 뽀뽀 사건이 떠올라서 혹여 엘로힘이 생각을 읽을까 봐 굉장히 신경 쓰였다.

“새벽이라 피곤해서 바로 잠들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나 보군.”

비꼬듯 나온 박건호의 말을 시작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뱉어 냈다.

“한이결. 나, 나도… 따로 할 얘기 있어.”

“그럼 수면 시간이 5시간보다 더 적으시겠군요.”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형?”

“남의 집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하긴 뭘 합니까? 그냥 잠깐 대화한 게 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언제 차별을 했어?”

억지로 외면하던 뽀뽀 장면이 천사연의 한탄 한 번에 기억 위로 불쑥 솟구쳤다. 그걸 내리누르며 천사연의 등을 현관문 밖으로 꾹꾹 밀었다.

“헛소리들 그만하고 빨리 갔다 오세요. 벌써 8시가 넘었습니다.”

“이것 봐. 또 나만 밀잖아. 이 적나라한 애정 차이에 가슴이 아릴 듯이 아파지는…….”

“아, 좀!”

“그럼 이따 봐요, 이결 씨~!”

겨우 문밖으로 밀어 내자 마지막으로 나간 민아린이 활짝 미소 지으며 인사를 보내왔다. 억지로 마주 웃어 주며 쾅, 소리가 나도록 힘 있게 문을 닫자 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엘로힘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이게요? 잘못 보신 겁니다.”

“웃고 있어서.”

“이건 배웅의 뜻으로… 됐습니다.”

어차피 다 알 텐데도 저렇게 묻는다는 건 놀리려고 일부러 질문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엘로힘이 눈을 사르르 접었다.

“눈치가 더 빨라졌구나.”

“오늘따라 심술이 좀 과하시네요.”

“그래 보이니?”

“예.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내게 다가온 엘로힘이 새하얀 손으로 내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구나. 아까 재밌는 장면을 읽어서.”

“……!”

무엇을 의미하는 손짓인지 단번에 이해한 나는 얼굴을 확 붉혔다.

젠장, 눈치챘구나. 이럴 것 같아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 건데.

“생각이라는 건 그럴수록 더 선명해지는 법이지.”

“엘…….”

어깨를 으쓱인 엘로힘이 내 볼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등을 돌렸다.

“알겠다. 그만하마. 아침 식사부터 하자.”

“먹을 게 있습니까?”

“네가 일어나기 전에 아이 중 하나가 나가서 사 왔단다. 도시락부터 샌드위치, 샐러드, 죽까지 별것이 다 있더구나.”

“그게 누굽니까?”

“박건호라는 아이다. 차고에 바이크가 있어서 그걸 타고 다녀오던데. 아무도 건들지 않았으니 오로지 네 것이란다, 세현아.”

박건호가? 게다가 바이크를 타고? 천사연 차고에 바이크도 있었다는 건가?

놀라움의 연속인 데다 고맙기도 했다. 새벽부터 줄곧 굶은 터라 솔직히 좀 허기지던 참이었다.

1층 안쪽에 있는 식탁으로 향하자 엘로힘이 미리 준비해 놓은 건지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수저를 들자 내 앞에 죽을 밀어 준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편하게 먹으면서 들으렴.”

“네. 말씀해 주세요.”

“그래. 우선 네가 가장 궁금해했던 질문의 답이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엘로힘이 말을 이었다.

“네가 구한 제작자가 봤다는 그 피는 칼리의 피가 맞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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