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최대한 필요한 내용만 정리해서 채워 넣었지만, 다 보려면 적어도 나흘은 걸릴 거다.”
엘로힘이 내게 책을 건네주었다. 품에 안겨진 책은 보기보다 훨씬 컸고, 무거웠다.
이 안에 천사연이 살아온 과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입 안이 절로 바싹 말랐다.
“세현아. 이미 해 봤으니 알겠지만, 책을 본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란다. 그러니 좀 더 쉬고 나서 시작하는 게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다 보는 동안 곁을 떠나지 않으마. 그러니 준비가 다 끝나면 말해 주렴. 그 전까지 책은 결코 열어서는 안 된다.”
내게 당부를 남긴 엘로힘이 복잡하게 엉켜드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쓰게 웃으며 힘이 들어간 미간을 손으로 꾹 눌러 줬다.
“그럼 그동안 집 구경이나 좀 하면 되겠구나. 괜찮겠니, 아이야.”
“…마음대로 하시죠.”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한 천사연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알아서들 쉬도록. 피곤한 사람은 손님방을 안내해 주도록 하지.”
시차 때문에 한국은 이른 새벽이라 대여섯 시간은 지나야 아침이 밝아 올 터였다.
“그럼 마스터, 주방 좀 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보니까 텅 비어 있던데요. 냉장고에는 물만 놓여 있고.”
“헉, 클로에 부마스터께 간식 상자 받아 오길 잘했네요.”
“그럼 배달시킵시다.”
“놀러 왔나, 박건호 팀장?”
도란도란 떠드는 대화를 들으며 시선을 내려 책을 바라봤다. 조심스럽게 겉표지를 만지자 거친 가죽이 손끝에 만져졌다.
그런 나를 보던 엘로힘이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또 자신을 몰아붙이는 생각만 하는구나.”
“그런가요?”
천사연이 자신의 과거를 대가로 넘겨줬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편했다.
“천사연을 무시하고 억지로 본다고 여길 필요 없단다. 이 세상은 대가 없이 굴러가는 일이 없으니 말이다.”
“무슨 뜻입니까?”
“어떤 식으로든 네가 이것을 보게 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뜻이란다. 세상이 정해 주는 대가는 언제나 균등하지. 그러니 일단 네 앞에 놓인 길부터 걸어가는 게 우선이다.”
엘로힘의 새하얀 손가락이 책을 가리켰다.
내가 이제부터 가야 할 길은 천사연의 과거를 보는 것이라는 건가? 이해하기 힘든 말에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고 서 있자 엘로힘이 제 어깨에 있는 여우를 내게 넘겨주었다.
피익, 픽!
발랄하게 울며 내 볼에 풍성한 꼬리를 비비는 여우의 모습에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지금은 내가 하는 모든 말이 어렵겠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란다. 네게 다가오는 미래가 천사연, 저 아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저는…….”
입을 열어도 말을 끝까지 하기가 힘들었다. 머뭇거리는 내게 엘로힘이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나중에 책을 읽기 전에 따로 대화하는 게 좋겠구나. 네게 알려 줄 것도 남아 있으니.”
“예.”
양손에 들린 책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 무게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
천사연이 안내해 준 방에 딸린 개인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미리 떠 놓은 물을 마셨다.
“미친, 집 진짜 넓네….”
덕분에 편하게 씻었지만. 아직 좀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사연은 엘로힘과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 둘이 한창 바쁠 거고. 다른 사람들은 거실에 모여 있으려나? 여우도 민아린에게 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긴 2층이라서 아래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 하는지 궁금하니 내려가 볼까 고민하던 차에 테이블에 올려 둔 천사연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네게 다가오는 미래가 천사연, 저 아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 미래가 천사연에게 의미 있다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엘로힘의 말을 곱씹어 보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대답을 들은 상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민아린이나 김우진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찾아온 손님은 하태헌이었다.
“피곤한가?”
“아닙니다. 방금 막 씻었어요. 하태헌 씨는요?”
“나도 씻었다.”
내게 걸어오는 하태헌의 상태를 찬찬히 살펴봤다.
좋은 기억이 없는 엘로힘과 갑작스러운 만남에, 원치 않았을 천사연의 집 구경까지 하게 된 하태헌은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지금은 좀 나아 보였다.
“날이 밝으면 바로 길드에 가실 예정입니까?”
“그래. 마스터께는 이미 연락을 해 놨다. 이 집에 널 두고 가고 싶진 않다만…….”
복잡한 눈으로 날 보던 하태헌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일이 많이 밀렸을 테니 어쩔 수 없지. 천사연도 길드로 돌아가야 할 거고.”
“아마 다들 일을 정리하러 나갈 겁니다. 엘이 있으니까 여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서 신경 쓰는 거다.”
…어째서지? 엘로힘은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한 존재이니 그만큼 믿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돌아올 테니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하태헌이 나를 두고 어딘가를 갈 때면 항상 하는 말이었다.
‘이제는 내가 한이결이 아니라 권세현이라는 것을 알 텐데…….’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하태헌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음, 근데 제가 할 일이 있어서 확답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디 가는 건 아니고요.”
“할 일이라면 저걸 말하는 건가?”
하태헌이 턱짓으로 테이블에 올려진 책을 가리켰다.
내가 엘로힘과 나눈 대화를 옆에서 들었으니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
“맞습니다. 저 책은…….”
이걸 말해도 될까.
어차피 나중에 책을 보고 나서 모두에게 설명하려던 내용이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쉽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천사연의 과거가 적힌 책입니다. 저는 그걸 보려고 하는데, 조금 길어서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천사연의 과거라고?”
“네.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중요합니다. 하태헌 씨도 어느 정도 눈치채셨겠지만, 프라우스 신도단과 천사연은 여러모로 얽혀 있으니까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하태헌의 셔츠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그가 순순히 끌려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옆에 마주 앉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엘로힘의 힘으로 만들어 낸 저 책은 펼치는 순간부터 천사연의 과거를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상처럼 재생된다는 건가?”
“비슷합니다.”
“위험하지는 않겠지?”
“그럼요. 저는 이미 한 번 해 봤습니다. 한이결의 과거… 그러니까, 지금 이 몸의 주인이 살아온 과거를 책을 통해서 봤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혹시 하태헌이 한이결에 관해서 물어볼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그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 다른 질문을 해 왔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정확하게 모르는 건가?”
“엘이 적어도 나흘은 걸릴 거라고 말했으니까 그보다 오래 걸릴 가능성이 큽니다.”
“쯧…….”
내 대답을 들은 하태헌이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천사연의 과거를 보기 위해 나흘 이상 시간을 써야 한다는 거군. 그것도 천사연의 집에서.”
“그, 그렇죠…….”
순식간에 기분이 저조해진 하태헌의 모습에 절로 눈치가 보였다.
뭐가 문제인 거지? 책이 위험할 것 같아서 그런가?
하긴, 직접 경험해 보지 않는 이상 책을 통해서 타인의 과거를 본다는 게 잘 와닿지 않을 만했다.
뭐라고 설명을 더 해야 하태헌이 걱정하지 않을지 열심히 고민하는 나를 보며 하태헌이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고선 먼저 입을 열었다.
“한이결, 난 지금 질투를 하는 거다.”
“예? 어… 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멍청하게 되묻자 하태헌이 또박또박 선명한 발음으로 재차 답했다.
“질투, 를 하고 있다고.”
“갑자기 질투를 왜…….”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 집에서 며칠을 지낸다는데, 당연히 질투하지 않나?”
“아, 아니, 잠깐만요. 하태헌 씨, 그…….”
질투라니, 상상도 못 한 이유에 당황한 나는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짚었다.
“제가 아까 미국에서 했던 얘기… 들으셨죠?”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지?”
“저는 한이결이 아니라 권세현입니다. 공간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제 진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아직…….”
더듬더듬 이어지는 내 말을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듣던 하태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나는 결국 너를 사랑하게 됐을 거다.”
“…….”
“그러니 지금도 질투를 하는 거지.”
큰 높낮이 없이 담담하게 뱉어 낸 고백에 뜨거운 열기가 목부터 얼굴로 빠르게 올라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죄, 죄송…….”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멋없는 사과 하나뿐이었다.
만약 하태헌이 ‘뭐가 죄송한 거냐?’라고 물으면 어떡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냥 다….’ 이딴 대답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식은땀이 절로 났다.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하태헌이 몸을 슬쩍 붙여 왔다.
“죄송하다는 말 대신에 내 기분을 좀 풀어 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풀립니까?”
그래. 차라리 이렇게 뭐라도 시켜 줘. 내가 한번 열심히 해 볼게.
의욕적인 내 태도에 입꼬리를 삐죽 올린 하태헌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뽀뽀.”
뭐?
“뽀뽀하면 풀릴 것 같은데.”
“뽀…….”
차마 ‘뽀뽀’라는 단어를 뱉어 내지 못하고 얼버무린 나는 그제야 하태헌과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히 상체를 뒤로 물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건 조금…….”
“싫나?”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런 걸 하기에는…….”
“이미 몇 번이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사이를 따지지?”
그건 그렇긴 한데…….
“뽀뽀 정도는 어린애들도 한다.”
…그런가?
“혹시 제가 해야 합니까?”
“아니. 그냥 가만히 있어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으음, 내가 하는 게 아니라면 한 번 정도는 괜찮을지도. 어쨌든… 하태헌에게는 마약 사건부터 미국 일까지 이래저래 신세 진 것도 많으니까.
‘1초도 안 돼서 끝날 것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태헌이 원한다는데 들어줘야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색하고 거절하기 애매하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그래. 눈은 감아도 상관없다.”
잘됐다. 솔직히 내게 뽀뽀를 하는 하태헌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냉큼 두 눈을 꾹 감으며 뽀뽀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볼에 뽀뽀해 올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하태헌의 따듯한 손길이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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