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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69화 (269/394)
  • 269화

    68.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내 대답을 들은 민아린이 놀란 표정을 하고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저, 정말요? 많아도 28살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럼 저보다 오빠인 거네요?”

    “…나이만 따지면 그렇긴 한데요…….”

    “민아린 힐러만 어려지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어려지는 거 아닌가?”

    “그… 그것도 그렇긴 하죠…….”

    미치겠다. 예상보다 훨씬 창피해서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목을 통해서 올라온 열기가 어느새 얼굴을 모두 덮어 버렸다.

    “그럼… 이제 세현 씨나 세현 오빠라고 부를까요?”

    “아뇨, 아닙니다!”

    민아린이 눈을 깜빡이며 묻는 말에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빠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어색해서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다들 그냥 하던 대로 해 주세요. 그게 편합니다.”

    권정한이 내가 왜 거절하는지 이해를 못 한다는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왜요? 세현 형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지 않나요?”

    “좋기는 뭐가 좋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복잡함에 목덜미를 쓸며 입을 열었다.

    “그간 한이결이라고 불려서 익숙해지기도 했고, 주변에 보는 눈도 있으니 권세현이라는 이름이나 오빠라는 호칭은 좀 부담스럽습니다.”

    “으음, 하긴 그렇겠네요. 다른 사람들은 한이결로 알고 있을 테니까요.”

    “예. 그러니 지금껏 했던 대로 불러 주세요. 저도 그게 편합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린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권세현은…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 없고요.”

    “…….”

    “그러니 여러분도 권세현을 너무 의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며 쓰게 웃자 잠자코 듣던 박건호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다행이군. 솔직히 돌아가겠다 해도 순순히 보내 주긴 싫어서.”

    “엄청 솔직하시네요.”

    어쨌든 내가 필요하다는 그 대답에 기분이 조금은 편해졌다. 나와 관련된 얘기가 어느 정도 정리된 걸 알아챈 엘로힘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세현이의 개입은 될 수 있는 한 숨겨야 하는 능력이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알아챈다면 앞으로가 더욱 복잡해질 테니.”

    “그건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엘로힘의 얘기를 들으며 닥터와의 충돌을 다시 떠올렸다.

    사마엘의 정신 지배를 단번에 끊어 낼 수 있었던 개입 능력. 잘만 활용한다면 더는 정신 지배에 휘둘리지 않겠지만, 만약 이걸 신도단에게 들킨다면…….

    “엘. 저번 전투에서… 사마엘 그 사람이 무언가 느꼈을까요?”

    “본인의 능력이 강제적으로 끊긴 거나 다름없으니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최소한 닥터라 불린 인간의 시체가 있어야 한다.”

    닥터의 시체…….

    우리가 기절한 제작자들을 데리고 빠져나온 그 순간 전투가 벌어졌던 공간은 즉시 입구가 닫혀서 사라졌다. 닥터를 죽이는 건 성공했어도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얻지 못한 셈이었다.

    내가 권세현으로 변해서 개입 능력을 쓰는 모습을 본 신도단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남은 이야기는 한국 가서 마저 하는 게 낫겠구나.”

    “알겠습니다.”

    “물론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열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만.”

    “예?”

    갑작스럽게 나온 대가라는 단어에 놀란 내가 되묻자 엘로힘이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너희에게 무언가를 해 주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한 터라.”

    “음…….”

    “네게 받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렴.”

    놀리듯 덧붙여 말한 엘로힘이 시선을 들어 천사연을 바라봤다.

    “대가는 네게 받겠다, 천사연.”

    “안 본 사이 꽤 뻔뻔해지셨군요.”

    “너만 하겠니? 그리고 이유가 있단다.”

    이죽거리는 천사연의 행동에도 엘로힘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세현이가 며칠 동안 지낼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나와 엘라하가 지내는 곳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려면 큰 대가가 있어야 하니… 천사연, 네가 사는 집이 적당해 보이는구나.”

    “네? 잠깐… 천사연 집이요?”

    “그래. 마침 그곳도 한국이니 지금 상황에서는 이래저래 좋지 않니?”

    “오. 마스터, 집 구경 시켜 주는 겁니까?”

    “우서혁 비서님은 아시나요?”

    “아뇨,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천사연의 집이라는 말에 박건호와 민아린, 우서혁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중에 미간을 험악하게 구긴 하태헌이 물었다.

    “왜 하필 그곳이지?”

    “내가 만들어 준 은신처나 다름없기 때문이지. 천사연도 나와 엘라하에게 있어서 중요한 아이니까.”

    “앗, 마스터를 아이라고 부르는 분은 처음 봤어요.”

    “내겐 다 아이란다.”

    민아린의 해맑은 질문에 엘로힘도 해맑게 대답했다.

    “바로 갈 수 있습니까?”

    “언제든 바로 떠날 수 있단다. 그러니 정리할 것이 있으면 정리하고 오렴.”

    도착지가 천사연의 집이라는 게 영 찝찝했지만 그래도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건 아주 좋았다.

    “알겠습니다. 클로에 부마스터와 에드워드 씨에게 인사만 하고 바로 떠나죠.”

    ***

    클로에의 배려로 가장 넓은 응접실에서 바로 한국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된 우리는 배웅하러 와 준 클로에와 에드워드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래저래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죠. 리웨이 제작자도 끝까지 잘 보호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리웨이는 기력을 회복하고 한국의 레드 마켓으로 넘어갈 때까지 아테나에서 계속 지내기로 결정됐다.

    그는 세간에서 알아주는 제작 능력자이니 아테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한이결 씨.”

    “네. 에드워드 씨도 잘 지내세요.”

    “다음에는 제가 한국으로 놀러 갈게요. 꼬, 꼭… 다시 만나 주세요.”

    내게 인사하는 에드워드에게 마주 대답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그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우물쭈물 다음 약속을 잡아 왔다.

    “당연하죠. 시간 되면 놀러 오세요.”

    “네에…….”

    나와 에드워드를 흐뭇하게 웃으며 보던 클로에가 들고 있던 상자를 내게 건네줬다.

    “미국에서 인기 있는 과자와 디저트를 챙겨 봤어요. 한이결 능력자는 단 간식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가서 먹어요.”

    “가, 감사합니다.”

    “오~ 좋겠네, 한이결.”

    “간식 좋아하는 거 동네에 소문 다 났나 보군.”

    “앗, 마카롱도 있네요. 이결 씨, 마카롱 좋아하잖아요!”

    “…….”

    간식 상자를 받자 뒤에서 박건호와 천사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놀렸다.

    민아린도 그렇고, 다들 이제 내가 권세현인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딱히 태도 변화가 없어서 기분이 묘했다.

    “슬슬 공간을 연결해도 되겠니?”

    응접실 가장 안쪽에서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엘로힘이 물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클로에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클로에는 상대의 기운을 볼 수 있을 텐데. 엘로힘은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했다.

    “네. 이제 출발하죠.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다들 몸조심해요.”

    에드워드와 클로에가 함께 뒤로 물러서자 엘로힘이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예전에도 봤던 타원형의 새하얀 입구가 생겨났다.

    “천사연의 집 거실로 바로 이었다.”

    “집주인부터 들여보냅시다.”

    천사연의 등을 입구 쪽으로 꾹꾹 밀자 녀석이 처연한 얼굴을 하고선 상처받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일은 매번 나부터 시키는군…. 사람을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닌가?”

    “제가 언제 차별을 했다고 그러세요?”

    “하태헌도 좀 시켜 보지그래.”

    “하태헌 씨 집이랑 연결됐으면 당연히 그랬겠죠.”

    천사연을 밀어 넣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눈짓하자 어딘가 의기양양해 보이는 하태헌부터 박건호, 우서혁, 김우진이 줄줄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민아린과 함께 입구로 들어서자 엘로힘이 내 뒤를 쫓아오며 입구를 닫았다.

    “오…….”

    먼저 들어갔던 천사연이 불을 켰는지 내부가 환하게 밝아지며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들고 있는 간식 상자와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릴수록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런 곳에서 혼자 사는 거야?’

    미친 거 아냐? 무슨 성인 남자 혼자 사는 집이 2층짜리에 지하에 주차장도 있고 밖에 정원도 있고… 방은 대체 몇 개야, 이게.

    이 정도면 유시혁의 집이랑 거의 비슷한 규모였다.

    “레퀴엠 길드 마스터 자리가 돈을 이렇게 많이 버는 겁니까?”

    “……글쎄요.”

    끝도 없이 나오는 방의 개수를 세다가 질린 내가 우서혁에게 묻자 뒤쫓아 오던 천사연이 미소를 띤 얼굴로 놀리듯 한탄했다.

    “그동안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 알겠군.”

    “결혼한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큰 집에서 삽니까?”

    “그럼 네가 결혼해 주든가?”

    뻔뻔하게 되묻는 말에 예전에 공항에서 겪은 일이 생각났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헛소리 마세요.”

    “헛소리라니, 너무하는군. 내가 34살이 되면 결혼해 준다고 약속해 놓고서… 이렇게 매정하게 날 버리다니…….”

    이 자식이 또 이러네. 짜증을 담아서 노려보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묻는 하태헌의 모습에 뒤늦게 아차 싶어졌다. 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천사연 마스터가 장난치는 겁니다.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34살에 결혼해 주는 거면 나랑 바로 하면 되겠군. 난 지금 34살이니까. 그렇지, 형?”

    “조용히 하세요, 진짜…….”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나와 천사연을 번갈아 보는 하태헌과 능청스럽게 웃으며 끼어드는 박건호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이놈들 틈에 있으면 안 되겠다. 도망치듯 빠져나가 민아린과 대화 중인 엘로힘에게로 달려갔다.

    “이 집은 엘 씨께서 직접 구해 주신 건가요?”

    “엘 씨? 재밌는 호칭이구나. 집은 아이가 직접 구한 거란다. 은신처라는 뜻은 내가 이곳에 특별한 것을 뒀기 때문이지.”

    “특별한 것이라면…….”

    엘로힘이 우리를 모두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방 하나를 열었다. 아무것도 진열되어 있지 않은 방에는 새하얀 빛을 내뿜는 나무가 중앙에 놓여 있었다.

    “엘이 만든 겁니까?”

    “그래. 저 나무의 영향으로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에서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단다. 감지 기능이 있는 아이템은 그 힘을 잃을 거고. 무엇보다 프라우스 신도단과 관련된 이가 들어오면 집주인에게 바로 신호가 간다.”

    나뭇잎 하나 없이 빈 가지만 곱게 뻗은 흰 나무는 엘로힘이나 여우에게서 느낄 수 있는 청량한 기운을 풍겼다.

    “최소한의 방어막인 셈이지.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여기가 확실히 안전할 거란다. 세현아, 너는 이제부터 며칠간 이곳을 떠나야 할 테니까.”

    “떠난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내 얌전히 뒤만 쫓아오던 김우진이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확히는 몸은 그대로고 정신만 떠났다가 돌아오는 거다.”

    엘로힘이 손을 들어 올리자 방금까지 없었던 책 하나가 나타났다.

    붉은 가죽으로 덮인 두꺼운 책. 엘로힘이 나를 찾아온 순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완성된 거군요.”

    천사연의 과거가 기록된 책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책을 응시하는 천사연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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