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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68화 (268/394)
  • 268화

    엘로힘과 함께 응접실로 돌아오자 모두가 의아한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좀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

    중요한 대화 중에 갑자기 밖에 나가서 낯선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면… 나 같아도 이상하게 볼 거다. 천사연은 표정을 보아하니 벌써 엘로힘인 걸 알아챈 것 같지만.

    “음, 그러니까 이분은…….”

    “한이결.”

    “예?”

    내 뒤에 서 있는 엘로힘을 간단하게라도 소개해 주려던 그때였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하태헌이 사납게 말했다.

    “당장 이쪽으로 와.”

    그 모습을 보니 뒤늦게 엘로힘과 하태헌 사이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그보다 엘로힘이 아직 모자도 안 벗었는데 어떻게 알아챈 거지? 하태헌이 새삼 SS급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잠깐만요, 하태헌 씨! 여기선 싸우시면 안 돼요!”

    하태헌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느낀 나는 급히 엘로힘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놈이 여길 왜 온 거지?”

    그건 나도 모르는데.

    “아, 아무튼 여긴 아테나 길드입니다. 조금만 진정하세요. 기운도 넣으시고…….”

    “한이결 말이 맞아. 오자마자 내쫓을 필요는 없지 않나, 하태헌 부마스터?”

    팔짱을 낀 채로 지켜보던 천사연이 내 편을 들어줬다. 저 녀석이 웬일이지?

    “분명 이유가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걸 텐데. 얘기를 들어 본 후에 바로 내쫓으면 되겠지.”

    “…….”

    그럼 그렇지.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는데, 지금껏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있던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 아이야.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니 모두 당황할 만하지.”

    엘로힘이 쓰고 있던 검은 모자를 천천히 벗었다. 그러자 하얀빛과 함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허리 너머로 길어지며 차림새가 바뀌었다.

    사락, 부드럽게 흩날리는 하얀 머리카락과 흰 포엣 셔츠를 입은 엘로힘이 손에 든 모자를 빛 가루로 없애며 미소 지었다.

    “나도 나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온 거란다. 지금 난감한 상황이지 않니?”

    “난감한 상황이요?”

    “미국으로 오면서 이용했던 공간 이동은 거절의 답변이 올 거란다. 그러니 한국으로 빠르게 넘어갈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겠지.”

    엘로힘과 엘라하는 저 눈에 새겨진 능력으로 모든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그런 엘로힘이 알려 준 거니 믿을 만했다.

    “그리고 천사연, 네게 따로 부탁할 것도 있고.”

    이어지는 말에 천사연이 눈가를 살짝 좁혔다.

    웃고 있는 엘로힘과 불만스러워 보이는 천사연, 기분이 나빠진 하태헌. 그리고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우리 네 명을 구경하는 다른 사람들로 응접실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믿으라며…….’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해. 적어도 소개라도 끝내자는 마음으로 머쓱하게 말했다.

    “그, 제가 중국에서 신세 진 분입니다. 하태헌 씨는 이미 알고 계시고 천사연 마스터와는 다른 일 관련해서 아는 사이예요.”

    내 말을 들은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강하신데… SS급 능력자이신가요?”

    “아뇨. 이분은 그러니까… 음, 예언자로 불리는 분인데…….”

    말을 하면 할수록 다들 묘한 표정이 되었다.

    ‘신’이라는 단어를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대신 예언자라고 해 본 건데 평범한 이들에게는 그마저도 딱히 와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칼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갈 길이 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어수선한 분위기를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 앉은 나는 우선 내가 겪어 온 일부터 꺼냈다.

    “공간에서 본 권세현은 제 과거가 맞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한이결이 아닙니다. 박석재에게 배신을 당해서 죽었고, 눈을 떠보니 한이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가능한 건가?”

    “저도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하루아침에 만나 본 적도 없는 타인이 되었으니까요.”

    하태헌의 질문에 쓰게 웃으며 김우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호텔에서 내가 컵을 깨고 그 조각으로 팔을 그었을 때, 기억해? 그게 내가 막 한이결이 돼서 눈을 뜬 순간이었어.”

    “아…….”

    “처음으로 김우진을 만났고 대화하면서 이 몸의 이름이 한이결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이후에는 천사연을 만나서 명령을 따랐습니다. 이곳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천사연은 원래 한이결을 알고 있는 데다 시간을 반복해 왔으니 내가 언제부터 한이결 몸에 들어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했을 거다.

    “공간에서 다들 보셨죠? 능력자가 없는 세계. 이곳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저는 그곳에서 왔습니다.”

    “다른 세계…라니. 굉장하네요. 그리고 이결 씨가 다른 사람이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그럴 겁니다. 민아린 씨는 제가 한이결이 된 이후에 만났으니까. 천사연 마스터와 김우진을 제외한 사람들은 진짜 한이결을 만나 보지 못했을 겁니다.”

    “간간이 들려온 소문과는 너무 달라서 놀라기는 했었어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이번에는 흥미롭게 듣던 박건호가 질문을 해 왔다.

    “하태헌 부마스터의 말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거지? 평범한 능력으로는 어려워 보이는데.”

    “그건 내가 대신 알려 주도록 하지.”

    자연스럽게 끼어든 엘로힘이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나타난 새하얀 빛무리가 몰려들어 무언가를 형성했다.

    “자, 이게 현재 내가 관리하고 너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다.”

    공중에 떠오른 여럿의 구체 중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을 엘로힘이 가리켰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다른 구체로 손을 옮겨 갔다.

    “그리고 여기가 세현이가 살아오던 세계지.”

    세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구체들을 보며 계속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비슷한 형태의 세계는 그 외에도 수십, 수백 가지가 있단다. 물론 전혀 다른 생김새의 다른 종족들이 살아가는 세계도 있지. 그리고 그 수많은 세계는 각자 관리하는 존재들이 있는데… 이곳은 나와 내 쌍둥이 형제가 관리하고 있다.”

    “신이라는 말씀입니까?”

    “비슷하겠구나. 다만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 전지전능하진 않다. 세계에 깊이 관여할 수 없도록 제약이 걸려 있으니.”

    모든 구체가 크게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응접실 안이 어두워지며 작은 빛들이 넓게 퍼져 나갔다.

    마치 은하수가 떠 있는 밤하늘을 보는 듯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이 절로 놓였다.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세계가 관리자의 보호를 받으며 존재한다. 세계와 세계끼리는 절대 충돌해서는 안 되고 이어져서도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세계는 그 굳건한 섭리가 무너지고 있지.”

    황금색 구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표면이 비틀렸다.

    “다른 세계와 이어진 게이트가 열리고 시간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세계는 빠른 속도로 불안정해지고 있다. 게이트의 등장과 사람들의 각성이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것도 모두 다른 세계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거고.”

    “그럼 이결 씨가 이곳으로 넘어온 이유도 게이트 때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이해가 빠르구나, 아이야.”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은 엘로힘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세현이는 죽기 직전 능력을 각성했다. ‘개입’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여 측정이 불가한 등급 외 능력이지.”

    “등급 외라면 SS급보다 더 높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간이 한이결 씨의 과거로 만들어진 거군요.”

    “와, 저 등급 외 능력자 처음 봐요. 바로 옆에 있었다니…….”

    “…….”

    우서혁의 말에 민아린이 나를 어쩐지 대견한 자식 보듯 바라봤다.

    내가 가게를 관리하던 그 권세현이라고 방금 막 알려 주지 않았나? 겉모습은 한이결이라도 그 속은 시꺼먼 아저씨가 들어 있는 건데, 태도에 변함이 없다니. 역시 민아린이라고 해야 할지.

    “세현이는 본인의 능력을 사용해서 이곳으로 넘어온 거란다. 세계가 약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등급 외 능력이라 한들 실패했겠지만.”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로 앉아 있던 하태헌이 설명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입을 열었다.

    “왜 하필 한이결인 거지? 본인의 몸이나 좀 더 등급이 높은 사람에게 들어갈 수는 없었던 건가?”

    “그러게요. S급 정도의 몸이었으면 이결 씨도 덜 고생하셨을 텐데.”

    예상치도 못한 부분을 하태헌이 날카롭게 짚어 냈다. 내 본래 몸은 이미 죽었으니 함께 오지 못했고 다른 능력자에게 들어갈 수 없었던 건…….

    ‘어비스에서 등장한 인물 중에 죽기 직전인 건 한이결뿐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비스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분명 그게 뭔지도 설명해 줘야 할 텐데.

    차마 모두에게 내가 즐겨 보던 소설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게 좋아한다고 했던 하태헌에게는 더욱이…….

    그런 나를 스치듯 본 엘로힘이 미소를 띤 채로 대답했다.

    “한이결이라는 아이의 몸이 상태가 제일 좋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 몸의 영혼은 소멸하기 직전이었지. 만약 세현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아이는 그대로 죽었을 거다. 권세현과 한이결은 서로를 살린 셈이지.”

    “그럼… 이결 씨 몸 안에 예전 한이결이 아직 있다는 건가요?”

    민아린의 목소리를 들은 천사연의 손이 크게 움찔했다. 천사연과 한이결의 관계를 떠올리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해가 됐다.

    “그래. 남아 있지. 하지만 아주 미약한 상태란다.”

    “그렇군요…….”

    민아린을 포함한 모두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잠시간 고민하던 김우진이 나를 정확히 응시하며 말했다.

    “한이결, 네가 위험하지 않고 계속 살 수만 있다면 난 뭐든 상관없어.”

    “으음… 저도요. 솔직히 전 이결 씨 안전이 제일 중요해요.”

    “나도 이전 한이결은 알지 못하니 저 두 사람 의견에 동의하긴 한다만… 근데 한이결,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불러야 하지?”

    “예?”

    박건호의 뜬금없는 질문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그가 이어 물었다.

    “그럼 한이결이 아니라 권세현 아닌가? 공간에서 만나 보니 실제 나이도 한이결보다 많아 보였고.”

    “아, 그…건…….”

    “앗, 그러네요! 이젠 세현 씨라고 불러야 하나? 근데 몇 살이에요? 공간에서 지낼 때도 궁금했어요.”

    내게 쏠린 모두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소파에 등을 바싹 붙인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주세요. 나이는 그… 물론 한이결보다야 많지만…….”

    “몇 살인데?”

    “몇 살인데요?”

    “몇 살이지?”

    “…….”

    무, 무서워. 조금의 희망을 품고 우서혁과 천사연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 둘도 궁금했는지 끼어들지 않았다. 진짜 너무하네.

    막상 나이를 알려 주려고 하니 목덜미와 귓가에 뜨거운 열이 몰려들었다. 결국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35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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