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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67화 (267/394)

267화

루젤과 루크에 대한 소식과 프라우스 신도단, 그리고 다른 제작자들과 함께 정신 지배로부터 구조됐다는 설명을 모두 들은 리웨이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어쩐지 기억이 불안하다 했더니, 쯧쯧.”

“정신 지배를 당하는 동안의 기억이 조금은 있으신 겁니까?”

“별거 없어. 그나마도 흐릿하고. 마치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이야.”

이마를 긁적인 리웨이가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나를 포함해서 제작자들이 한 거라곤 공간 하나를 만들어 낸 것뿐이야. 네 녀석이 들어갔다는 그 공간.”

“그렇지 않아도 공간에 관해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나는 공간에서 지내며 본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내 과거 기억을 그대로 재현해 낸 장소와 길을 지나다니는 평범한 사람들, 에드워드가 봤다는 선으로 가득 찬 주변까지.

“아무리 등급 높은 제작자 여럿이 모여 있었다고 해도 그런 세세하고 넓은 공간을 구현해 내는 게 가능한 겁니까? 특히 개인의 과거를 토대로요.”

“그건 나도 몰라. 기억나는 것도 적고… 그 공간 속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짚이는 부분은 있어.”

“그게 뭐죠?”

“희미한 기억 속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유일한 순간이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리웨이가 더듬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닥터…라고 했던가? 그 미친놈 말이야. 공간을 만들기 전에 그 망할 놈이 이상한 것을 들고 내게 왔어.”

그때가 떠오르는지 허공을 바라보는 리웨이의 두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생겨났다.

“작은 샘플 병에 가득 담겨 있는 붉은 액체… 아무리 봐도 그건 누군가의 피였네. 그걸 내게 건네주며 공간을 만들 때 사용하라고 하더군.”

“피?”

“그래, 피. 내가 받고 나서 실제로 사용했으니 확실해. 그건 아주 대단한 기운이 느껴지는 피였어. 아니, 사람 피에 기운이 느껴진다는 게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 그랬지.”

기운이 느껴지는 피라고? 그것도 대단한 기운이 느껴지는?

나는 반사적으로 옆에 서 있는 천사연을 살펴봤다. 나처럼 무언가를 느낀 그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제법 실력 있는 공간 능력자라고 자부하지만, 자네들이 말한… 그런 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 온 세상 제작자가 다 모여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걸 가능하게 만든 건 망할 놈이 준 피의 힘일 거다.”

“그 피에 대한 다른 정보는요?”

“없어. 나는 그때 정신 지배로 오로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만 이루려고 움직이는 기계였으니까. 지금은 솔직히 그 피를 다시 한번만 더 가져 보고 싶어.”

“…무슨 뜻입니까?”

리웨이가 초점 나간 눈을 하고서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정말로 기묘했네… 그 피만 있으면 정말 뭐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

무언가 단단히 홀린 듯한 그 모습에 옅은 소름이 끼쳤다. 리웨이가 말하는 ‘피’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공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리웨이 제작자님의 목소리가 들렸었습니다. 가장 강한 이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 재현된다고 하던데… 제작자님이 직접 하신 말이 맞습니까?”

“그래. 내가 했을 거다.”

계속되는 질문에 상념을 멈춘 리웨이가 순순히 긍정을 표해 왔다.

“공간과 공간을 잇거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작업은 굉장히 무섭고 위험한 일이지. 그래서 나는 항상 능력을 쓸 때면 공간의 약점을 알려 주는 힌트를 심어 놔.”

“정신 지배를 당한 와중인데도요?”

“놈들은 내가 그런 버릇을 갖고 있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 자네들은 운이 좋았어. 그렇게 치밀하게 만들어진 공간은 보통 빠져나올 출구가 하나뿐이야.”

빠져나올 출구가 하나뿐이라는 설명에 명치에서 옅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그런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자세히 알려 주셔서 감사드려요.”

“쯧, 귀찮지만 자네들이 나를 구해 줬으니 이 정도는 해야겠지. 특히 너! 네 잘난 면상은 아직도 보면 화가 치솟아!”

“에이, 사파이어 꼬리나비 날개 4장도 잘 받아 가셨으면서 왜 또 이러신대. 루젤과 루크 남매에게 연락이나 하시죠.”

내 눈짓에 하태헌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루젤에게 전화를 건 후 리웨이에게 넘겨줬다.

[여보세요? 하태헌 부마스터?]

“아가야. 나다.”

[하, 할아버지? 으아, 미친! 할아버지, 진짜 이러실 거예요?]

“허허, 고놈… 입버릇 험한 것 좀 고치라니까.”

하태헌에게 미리 대략적인 얘기를 들은 루젤은 리웨이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울먹거리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리웨이가 루젤과 루크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루젤을 달래 주는 리웨이에게서 등을 돌리고 모두에게 말했다.

“클로에 부마스터께 응접실 하나를 빌렸습니다. 거기로 이동하죠.”

***

“한국은 다행히 아직까진 별문제 없다는군.”

리웨이를 만난 후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본격적으로 프라우스 신도단의 움직임과 한국 상황을 확인해 봤다.

본래 일주일 정도로 잡았던 미국 일정이 한참을 지난 터라 레퀴엠과 로헌 둘 다 수습할 거리가 제법 많았다.

“그래도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 보입니다.”

내 말에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이용했던 JS 업체의 이동 서비스를 한 번 더 받기 위해 신청을 넣어 뒀습니다. 다만 사전에 예약해 둔 상황이 아니라 취소될 가능성이 큽니다.”

“음, 거긴 유명 인사들도 많이 이용하는 곳이라고 했으니 그렇겠네요. 비행기를 탄다면 준비까지 최소한 사나흘은 더 걸릴 텐데…….”

“JS 업체에서 오늘 오후 중으로 답변을 준다고 했으니 우선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만약 취소된다면 공간 제어 능력자인 리웨이 제작자에게도 따로 부탁해 볼 예정입니다.”

“그게 낫겠네요. 음, 그리고…….”

나는 쉽사리 뒤를 잇지 못하고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모두에게 내가 과거에 권세현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데, 서두를 어떤 식으로 열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천사연과 대화를 하면서 모두를 지키고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동시에 내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자고 각오했다. 하지만 다들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내 모습이 권세현으로 변한 걸 봤으니까 어느 정도 믿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해야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다들 바쁠 테니 지금이 기회였다.

고개를 들고 내게로 쏠린 시선들을 마주한 채 멈췄던 말을 다시 이었다.

“사실은 제가…….”

피이익! 픽!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투명화를 푼 채로 안겨 있던 여우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높게 울기 시작했다. 깜짝이야.

“뭐야, 왜 그래?”

피익! 픽!

풍성한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내 옷을 잡아당기던 여우가 훌쩍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아예 열어 둔 창문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여우!”

녀석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터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놀라서 뒤따라 벌떡 일어난 나는 바람을 끌어올리며 창틀을 밟고 올라섰다.

그새 투명화를 사용했는지 밖을 아무리 둘러봐도 하얗게 반짝거리는 여우는 보이지 않았다.

“하, 한이결!”

더 멀리 가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김우진의 외침에 답할 여유도 없었다. 급히 바람으로 몸을 띄우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나는 침착하게 주변부터 살펴봤다.

“……?”

그때였다. 시야에 여우 대신 어떤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아테나 길드 건물 앞에 서 있는 그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이나 큰 키로 보아 남자가 확실했다.

무엇보다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낯설지 않은 느낌에 나는 눈가를 좁혔다.

상대도 하늘에 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모자 아래로 살짝 드러난 은색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설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백발을 가진 이는 몇 없었다. 급히 하강한 나는 남자의 앞에 내려서며 조심히 물었다.

“……엘?”

“오랜만이구나, 세현아.”

정답이라는 듯이 짙게 미소 지은 그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모자의 챙 아래로 황금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정말로 엘이에요? 하지만 머리카락이… 엘라하인 줄 알았어요.”

“본래 내 머리는 아무래도 시선을 끄니 말이다. 머리 길이를 환상 아이템으로 조절했단다.”

허리를 넘는 장발이었던 엘로힘의 머리카락은 엘라하와 마찬가지로 귀를 살짝 덮는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슬슬 직접 만날 때가 된 것 같아서 와 봤단다. 너라면 나를 한 번에 알아볼 줄 알았으니까.”

다정한 음성을 듣자 정말로 눈앞의 남자가 엘로힘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다가온 그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피이익, 픽!

엘로힘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어깨 근처에서 여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녀석은 나보다 먼저 엘로힘의 존재를 알아채고 마중을 나온 모양이다. 어쩐지. 창문으로 나가기 전에 내 옷을 열심히 물어 당기더니만.

“여우가 아니었으면 오신 줄도 몰랐겠네요.”

“여우는 기운에 민감한 아이니 그럴 만하지. 그래서 믿고 와 본 거란다. 여우가 없었으면 다른 방법으로 네게 신호를 보냈을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렴.”

픽!

제 칭찬을 하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여우가 의기양양하게 울었다. 그걸 보니 엘로힘과 함께 지냈을 때 봤던 여우 형제들이 궁금해졌다.

“다들 잘 있습니까? 엘라하는요?”

“물론 잘 있지. 엘라하도 잘 지낸다만… 최근에는 심기가 좀 불편해 보이긴 하더구나.”

“심기가 불편해요?”

나는 뚱한 표정을 짓는 엘라하의 얼굴을 생각했다. 음, 항상 그러지 않나…?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엘로힘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평소랑은 좀 다르긴 하지. 일단 자세한 건 올라가서 마저 얘기하는 게 좋겠다.”

엘로힘이 시선을 옮겼다. 건물을 보는 그의 오른쪽 금안이 빛으로 차올랐다.

“마침 모두 모여 있으니 말이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응접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걱정이 몰려왔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이미 저들은 네가 가진 능력을 봤으니까. 그리고 프라우스 신도단을 설명하면서 그 이름도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니.”

“…….”

그 이름이라. 엘로힘의 말처럼 나는 모두에게 칼리의 존재를 말해 주려고 했다.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짚어 줘야 조금이라도 덜 위험해질 테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그래서 내가 직접 찾아온 거고. 엘라하도 동의한 일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단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요….”

“나를 믿으렴. 자, 그럼 가자.”

다시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엘로힘이 내 손을 잡고서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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