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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66화 (266/394)

266화

병실 안쪽에 있는 욕실에서 씻고 미리 준비된 새 옷을 꺼내 입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천사연이 병실로 들어섰다.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살짝 의외라는 표정으로 내 모습을 살핀 천사연이 입을 뗐다.

“벌써 일어나 있었군.”

“아까 깼어. 몸은 찝찝해서 씻었고.”

셔츠 단추를 마저 채운 나는 천사연의 뒤를 살펴봤다.

“다른 사람들은? 여우랑.”

“하태헌과 우서혁은 클로에를 만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옆방에서 쉬고 있지. 그 희멀건 놈은 민아린 힐러가 데리고 있는 것 같군.”

“넌 어디서 오는 길인데?”

“클로에랑 얘기 좀 하고 왔는데. 왜 그러지?”

마침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클로에를 만나기 전에 천사연에게 하려던 말이 있던 참이었다.

“이리 와 봐.”

내가 손짓하자 천사연이 잠시간 눈을 깜빡이더니 얌전히 걸어왔다. 그는 웬일로 품이 넉넉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천사연의 왼팔을 붙잡아 소매를 위로 올렸다. 그사이 치료를 받았는지 드러난 팔은 아무 상처 없이 깨끗했다.

“누구한테 치료받았어?”

“민아린 힐러.”

“민아린 씨가 너는 안 혼내냐?”

재밌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픽 웃은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뭐, 좀 째려보는 것 같긴 하던데.”

“민아린 씨가 그래도 길드 마스터라고 좀 봐주셨나 보네.”

“불만이면 네가 혼내 주면 되겠군.”

나를 내려다보며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천사연이 엄청나게 재수 없었다.

“넌 항상 그 입이 문제야.”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쥐고 있는 천사연의 팔을 다시 살폈다.

그가 상황이 나빠지면 제 몸부터 해친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되니 그 충격이 예상보다 컸다.

“다시는 그러지 마.”

“…….”

천사연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강하지만 그만큼 위험했다. 씁쓸함을 느끼며 천사연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왜 그 귀걸이를 네게 선물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천사연.”

눈을 살짝 크게 뜬 채로 내 얘기를 듣던 천사연이 곧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에드워드에게 보답으로 받았던 S급 회복 아이템인 붉은 귀걸이. 받은 이후로 한 번도 빼지 않은 귀걸이는 지금도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천사연의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서 빛을 받아 반짝였다.

자신의 피가 있어야만 능력이 발동되는 천사연에게는 상극인 아이템이었다. 그럼에도 주고 싶었고, 끝내 내 손으로 그의 귀에 꽂아 줬다.

제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그 점을 나와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는 천사연이 입꼬리를 유려하게 올린 채로 내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만졌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한이결, 내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면 너도 변해야 하지 않나?”

“…맞는 말이네.”

천사연이 손길이 닿아 오는 손목에 옅은 간지러움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느끼며 대답을 이어 갔다.

“나는 오래전부터 남을 지키려면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어. 그래야만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천사연은 내가 왜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온전히 이해할 것이다. 그와 나는 닮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고… 그저 내 자만이었지.”

“자만이라고 하지 마.”

멀어지는 내 손을 이번에는 천사연이 잡아 왔다.

“확실히 너는, 그리고 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억지로 버텨 왔다. 그 길밖에 없다고 착각한 채로 지켜 내지 못한 목숨을 품고서.”

“…….”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모두 우리 때문은 아니야. 그걸 혼자서 감당하려는 게 오히려 자만이겠지.”

그의 말이 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힘겹게 답했다.

“그러려던 건…….”

“알아.”

나와 똑같이 씁쓸한 얼굴을 한 천사연이 천천히 손을 놔주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더 어찌할 수 없어. 그건 나로서도 어려운 일이지. 아무리 반복되는 시간이라 해도 내가 살아온 이전 삶과 같지는 않으니.”

회귀로 인해서 시간 속에 갇힌 천사연마저도 온전히 과거로 돌아가 제 잘못을 바꾸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완전히 같은 과거를 다시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권세현을 만나며 깊이 느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실수 없이 선택해야 해, 한이결.”

“…….”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권세현을 만났을 때 이미 각오했다.

“…나는 모두와 함께 계속 살아가고 싶어.”

이전에 나는 ‘살아 줬으면 좋겠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살아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내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써도 괜찮다고 여겼다. 남을 지킨다는 핑계를 내세워 계속해서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모두와 함께 많은 일을 겪고 권세현의 죽음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는 억지로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다 같이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졌다.

“그래.”

내 대답을 들은 천사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충분해.”

이렇게 해서 나와 천사연의 목적은 온전히 같아졌다.

세계를 불안에 빠트리고, 천사연을 시간에 가둬 두고, 내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프라우스 신도단과 칼리를 막아야 한다. 이번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

우리가 공간 속에서 한 달 반 이상을 지내는 동안 현실 세계의 시간은 15일이 흘렀다.

다행히 현실보다 공간 속 시간이 더 빠르게 흘렀던 모양이다. 레드 마켓에 들어간 우리가 돌아오지 않자 클로에와 제이크는 다음 날 즉시 능력자를 통해 마지막으로 사라진 위치를 확인한 후 그때부터 기다렸다고 한다.

“직원 중에 공간 능력자가 있었거든요. 그 직원이 공간으로 들어간 것 같다고 말해 줘서…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아예 자리 펼쳐 놓고 기다렸죠.”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이 주일이나 걸려서.”

“모두 무사히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홍차가 채워진 찻잔을 내 앞에 놔준 클로에가 부드럽게 웃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한 달도 더 넘게 공간에 갇혀 있었다고 하던데. 에디를 지켜 줘서 고마워요.”

“오히려 저희가 에드워드 씨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에드워드 씨가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괜찮다면 감사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괜찮죠. 다만 지금 에디는 아까 식사를 끝낸 후에 다시 자고 있어서… 나중에 만나는 게 어떤가요? 아무래도 피곤이 많이 쌓였던 것 같아서요.”

그런가. 아무래도 무사히 현실 세계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서 긴장이 풀렸나 보다.

에드워드는 의젓하게 우리를 바깥으로 이끌어 준 실력 있는 제작자였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다. 새삼 그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전 언제든 좋습니다. 에드워드 씨에게 말씀 전달 부탁드립니다.”

“그럴게요. 참, 한이결 능력자는 제작자 한 명을 찾고 있었죠? 리웨이…라고 하던. 그분은 제가 특별히 따로 길드 건물 병실에서 쉬실 수 있도록 조처를 해 놨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구조된 제작자들 명단에서 익숙한 이름이 있길래 병원 대신 길드로 옮겼어요.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혹시 바로 만나 볼 수 있습니까?”

“지금쯤이면 그 제작자도 깨어났을 듯한데, 만날 수 있도록 수행원에게 미리 말해 둘게요. 함께 온 분들에게도 제작자가 지내고 있는 병실 위치를 알려 줄까요?”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이 정도는 얼마든지 부탁하셔도 좋아요.”

눈치 빠른 클로에 덕분에 리웨이를 더 쉽게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클로에와 안부 대화를 조금 더 나눈 후 응접실을 나오자 복도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수행원이 나를 리웨이가 있는 병실로 안내했다. 직원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병실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두가 보였다.

“클로에 부마스터는 잘 만났나?”

“예.”

“에드워드 제작자도 만나셨나요?”

그들을 향해 다가가는 내게 천사연에 이어 민아린이 질문을 해 왔다. 다들 나처럼 어린 에드워드가 걱정스러웠겠지.

“에드워드는 아직 자고 있다고 합니다. 피로가 쌓였다고 해요.”

“휴, 다행이네요.”

내 말을 들은 민아린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피익! 곧이어 낯익은 울음소리와 함께 볼에 부드러운 털이 느껴졌다. 투명화한 상태로 민아린에게 있다가 내게로 날아온 여우였다.

어깨에 올라선 채로 내 볼에 자기 몸을 비비적거리는 여우를 나도 안아 주고 싶었지만 여긴 이래저래 보는 눈이 많은 터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이결, 들어갈 건가?”

가장 병실 문 가까이에 서 있던 하태헌이 물었다. 아쉬운 마음을 담아 여우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들어가 보죠.”

노크를 두어 번 한 후에 문을 열었다. 내가 눈을 떴던 곳과 똑같은 인테리어의 병실에서 때마침 허리를 두드리며 침대에서 일어서는 리웨이가 보였다.

“으잉? 뭐야. 뭔데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는 거야?”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하자, 리웨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 이놈, 너는……!”

“어디 아프신 곳은 없습니까?”

이미 클로에에게 그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모른 척하고 물어봤다. 하지만 리웨이는 내 말을 싹 무시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만난 염병할 재수 더럽게 없는 놈!”

염병할 재수 더럽게 없는 놈은 뭐야. 수식어가 왜 이렇게 길어.

리웨이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내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흐음… 아는 사이가 확실하군.”

“이결 씨가 또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반응일까요?”

“하태헌 부마스터는 같이 만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작자분이 왜 저러는지 아십니까?”

“…저는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

어이없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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