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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65화 (265/394)
  • 265화

    67. 물망초를 품에 가득 안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어느 정도 잦아드는 것을 기다린 우리는 불에 탄 시체들을 넘어 닥터에게로 향했다.

    강승건의 등에 붙어 있던 뼈로 된 촉수에 어깨와 배, 옆구리를 꿰뚫린 닥터는 폭발 버튼을 누른 직후에 바로 숨이 끊긴 것 같았다.

    눈을 부릅뜬 채로 몸에 박힌 뼈를 빼내지도 못하고 사망한 닥터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실험한 융합체에게 살해당해서 죽는 삶이라. 그에게는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품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변신을 풀고 옷을 챙겨 입은 우서혁이 닥터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전에도 봤던 구슬 아이템이었다.

    “깨져 있군.”

    “강승건의 공격으로 망가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번과 달리 도망가지 못했던 건가. 이 몸으로는 도망갔어도 살 수 없었겠지만.

    “한이결 씨, 저기 봐요!”

    내 곁에 서 있던 에드워드가 소매를 잡아당기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에드워드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새까만 어둠이 점차 사라지며 커다란 쇠창살이 드러났다.

    “저 사람들은 설마…….”

    그 안에는 수십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기절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신도단의 정신 지배를 모두 끊어 낼 때 이 사람들도 함께 끊긴 모양이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발견한 나는 바로 얼굴을 확인했다.

    “리웨이 제작자입니다.”

    “정말요? 이분이?”

    “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제작자일 가능성이 있겠네요. 민아린 씨, 상태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민아린이 내 부탁에 철창 가까이 다가가 리웨이와 사람들을 신중히 살폈다.

    “일단 보기에는 숨도 제대로 쉬고 있고 다친 곳도 없어요. 자세한 건 더 가까이서 봐야 알겠지만요.”

    “다행이네요. 그럼 철창부터 없… 읏!”

    바람으로 철창을 벌려 내려고 기운을 쓰려던 나는 심장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훅 빠지며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한이결!”

    김우진이 비틀거리는 내 몸을 급히 잡아 줬다.

    아찔하고 묘한 감각이 온몸에 수십 번 스쳐 지나갔다. 김우진에게 안긴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덜덜 떨던 나는 심장 주변에 가득 차 있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읏, 아…….”

    김우진의 옷깃을 강하게 붙잡은 손의 흉터가 점차 옅어지고 작아졌다. 예전처럼 아무 흉터 없이 깨끗한 한이결의 손으로 돌아온 것과 동시에 권세현의 기운도 모습을 감추었다.

    “이결 씨, 괜찮아요?”

    “…다시 한이결의 몸으로 돌아왔군.”

    “으…….”

    그 잠깐 사이에 식은땀이 나고 몸 자체에 뜨끈한 열이 올랐다. 다시 한이결로 돌아왔는데도 빠져나간 힘은 돌아오지 않아서 혼자 설 수가 없었다.

    축 늘어진 나를 묘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천사연이 명령했다.

    “김우진은 한이결을 계속 부축하도록. 에디,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나?”

    “공간 자체가 이미 무너지고 있어서 조금만 있으면 바깥과 이어질 거예요.”

    “좋군. 그동안 갇힌 제작자들을 꺼내면 되겠어. 박건호 팀장, 움직여.”

    “부상자한테 이런 명령이나 하시고. 너무하시네, 정말.”

    박건호가 투덜거리면서도 한 손으로 손쉽게 철창을 벌려 냈다.

    내 두 팔을 제 목에 걸친 김우진이 나를 훌쩍 들어 올려 안았다.

    “한이결, 그냥 힘 풀어. 내가 계속 안고 있을게.”

    이 자세 싫은데. 게다가 김우진 이 자식… 어째 좀 신난 것 같다. 나는 치솟는 열에 끙끙 앓으면서 김우진을 슬쩍 노려봤다.

    “으음, 고생을 많이 하셔서 열이 좀 오르는 것 같네요.”

    “또 몸살에 걸리는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닐 것 같긴 한데… 이결 씨도 병원부터 가 봐야겠어요.”

    김우진과 민아린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으며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김우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확실히 지친 상태라 그런지 이상하게 안긴 상태에도 제법 편해서 긴장이 좀 풀렸다.

    “앗, 저기 봐요! 공간이 사라지고 있어요!”

    “익숙한 풍경이군. 미국 레드 마켓 내부인가?”

    어둠으로 가득했던 주변이 하얀빛으로 가득 차오르며 건너편의 미국 레드 마켓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웨이 제작자의 마지막 흔적을 찾았던 공터, 바로 그 장소였다.

    “세상에, 에디!”

    우리가 공간 밖으로 빠져나오자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로에와 제이크가 한걸음에 달려와 에드워드를 껴안았다. 그 뒤로는 아테나 길드 직원들과 의료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실종됐던 이들이 모두 돌아왔습니다!”

    “부상자가 있습니다.”

    “의료팀, 이쪽으로 와서 상태 확인 바란다.”

    나는 에드워드를 안은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변을 가득 채운 소란이 무척이나 달가웠다.

    뒤늦게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끔찍했던 악몽이 끝나고 우리는 꿈에서 깨어났다.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후련하게 웃던 권세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조금 서글퍼졌다.

    ***

    사무실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권세현이 시야에 들어왔다. 따스한 한낮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옅게 퍼졌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권세현에게 다가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가 보고 있는 책 겉표지가 새까만 것을 본 나는 조용히 물었다.

    “재밌냐?”

    “당연히 재밌으니까 보는 거지.”

    “그렇게 많아 봤는데도 여전히 재밌어?”

    계속되는 질문에 책에서 눈을 돌린 권세현이 픽 웃었다.

    “너도 다 알면서 뭘 또 물어?”

    “몇 권인데.”

    “2권.”

    권세현이 책을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와 비슷한 자세로 앉은 그가 이번에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뭔데.”

    “천사연 말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 심기가 좀 불편해진 것을 알아챈 권세현이 보란 듯 눈꼬리를 살짝 휘며 책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내가 상상했던 성격과는 많이 다르더라고.”

    “아아… 하긴. 그랬겠지.”

    어비스에 등장했던 천사연의 모습을 차례로 기억해 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괜히 헛기침한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그놈도 이래저래 고생을 좀 했더라고. 책에는 안 나와 있지만.”

    “너를 꽤 챙기는 것 같던데.”

    “협력 관계야. 일단 지금은.”

    묘한 미소를 띤 채로 내 얘기를 듣던 권세현이 흉터 가득한 손으로 책 표지를 천천히 쓸어 만졌다.

    “하태헌은…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였어.”

    “그래?”

    “주인공이라 그런가? 목소리 좋던데. 얼굴도 멋있고.”

    “나도 처음 들었을 때 놀랐다. 무슨 사람이 목소리도 저렇게 좋나 싶어서.”

    “그랬을 것 같다. 참, 그런 것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는데.”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야. 누구든 하태헌 씨 목소리 들으면 좋다고 생각할걸.”

    “그것도… 맞는 말이네. 김우진은 의외로 꽤 귀여웠어. 민아린은 소설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착했고.”

    “김우진은 낯을 좀 가려서 그렇지, 애가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성격도 좋아. 민아린 씨는 의외로 단호한 구석이 있다. 자주 혼나는데 꽤 무서워.”

    “혼날 짓을 했으면 혼나야지. 너무 사고 치고 돌아다니는 거 아냐?”

    “사고 치는 건 사실이긴 한데… 너한테 듣고 싶진 않네…….”

    떨떠름히 중얼거리자 권세현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포기해. 우린 예전에도 연선우나 고동주한테 잔소리 듣고 그랬잖아.”

    “그땐 둘이 예민하게 구는 줄 알았지. 근데 아무래도 우리 문제가 맞는 것 같네.”

    “나도 널 만나 보니까 알겠더라. 우리가 그 두 명 속을 많이 썩였지.”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혀끝이 썼다.

    “그래, 정말로…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진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어.”

    “…….”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우리의 미래도 달라졌겠지.”

    내가 버텨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도와주려는 주변의 손길도 모두 쳐내고 혼자서 어떻게든 될 거라고 자만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지금은 그저 우스웠다. 그로 인해 지켜 내지 못한 많은 인연이 가슴을 아프게 찔러 왔다.

    “괜찮아.”

    권세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

    “너는 계속 살아가야 하잖아.”

    마지막 순간, 나를 보며 연선우가 짓던 힘겨운 미소가 떠올랐다. 내 팔을 힘 있게 잡아 오던 손길도.

    “살아갈 거야.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곁에 사람들도 많이 생겼잖아.”

    “내겐 과분한 사람들이지.”

    “그래도 좋아하는 거 아닌가?”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있는 권세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좋아한다면 소중히 여겨야지.”

    “…소중해. 그 무엇보다도.”

    “이번에는 꼭 지켜 낼 수 있기를 바란다.”

    창문을 비추는 햇빛이 점차 강해졌다.

    기적처럼 주어진 시간이 끝나 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권세현의 옆얼굴로 하얀빛이 드리웠다.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권세현.”

    “잘 가라, 한이결.”

    눈앞이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얀빛에 부서지듯 사라지는 권세현의 모습이 아프도록 찬연했다.

    의식이 빠르게 선명해졌다. 하얀빛을 가르고 눈을 뜨자 병실로 보이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거친 숨을 내쉬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눈물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아…….”

    비틀거리며 침대 밖으로 나서려던 나는 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발견했다. 나를 병실로 데려다준 사람이 따로 챙겨 준 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 화면이 켜지며 날짜와 시간이 보였다.

    “…….”

    그걸 보자 허탈한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선명히 새겨진 숫자들이 마치 나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9월 2일. 우리가 공간에 들어간 지 이 주일이 지난 시점이자… 권세현의 생일이었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핸드폰을 쥔 채로 무너졌다. 9월 2일이라 써진 액정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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