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놔.”
잡힌 팔이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뿌리치려고 노력하며 재차 외쳤다.
“놓으라고!”
아래로 쓰러지려는 내 허리를 뒤에서 안아서 지탱해 준 상대가 낮게 속삭였다.
“기다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천사연이었다.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겨우 마음을 먹고 움직인 건데. 죽일 수 있었던 기회를 막아 버린 천사연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왜, 왜… 막는 거야…….”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이제 와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계속해서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천사연이 왜 나를 막는 건지, 권세현은 어째서 저런 얼굴을 하고 나를 보는 건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죽여야 해.”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이 공간이 앞으로 얼마나 버틸지 아무도 몰랐다. 당장 발아래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걸 천사연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죽인 다음에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한이결?”
“그딴 게 지금 뭐가 중요해?”
“중요해.”
천사연이 내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화끈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과한 긴장으로 한계까지 내몰린 몸은 잠깐의 고통을 버텨 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힘이 빠졌다.
덜그럭, 내 손을 떠난 잭나이프가 바닥에 몇 번 튕기며 권세현 앞에 떨어졌다. 성인 손바닥만 한 길이의 잭나이프 칼날이 반짝였다.
“에드워드가 이 공간을 다시 확인하고 있어.”
“…….”
“네가 이런 짐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그러니까…….”
나를 안은 채로 설명을 하던 천사연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항상 이득을 생각해서 움직이는 천사연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게 어쩐지 웃겨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용없어.”
이 공간의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권세현을 죽이는 것만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어차피 죽여야 한다면 그건 내가 직접 하고 싶었다. 아무리 천사연이 막아선다 해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선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잭나이프를 줍기 위해 천사연을 힘겹게 밀어내는데, 권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사연 말이 맞아, 한이결.”
나보다 먼저 권세현이 잭나이프를 주워 들었다.
“하마터면 네게 쓸데없는 부담을 줄 뻔했네.”
복잡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권세현이 곧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원인이라면 내 손으로 끊어 내는 게 맞겠지.”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그 얼굴은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봤었다. 옥상에서 내게 여전히 자신을 싫어하냐고 묻던 권세현의 모습이 기억났다.
“아…….”
권세현이 양손으로 잭나이프를 잡고 팔을 들어 올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며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아, 아니야… 안 돼, 잠깐만… 잠깐…….”
더듬더듬 겨우 말을 뱉어 내며 권세현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그럴수록 천사연이 나를 더욱더 강하게 잡아 왔다.
권세현은 나였다. 방금 내가 어디를 노리고 잭나이프를 휘둘렀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예상대로 그가 들어 올린 잭나이프의 끝은 정확히 자신의 명치를 향해 있었다.
“기다려…….”
천사연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자 하태헌까지 나를 붙잡아 왔다. 본능적으로 생겨난 바람은 천사연의 오른손 능력에 가로막혀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한 채로 사라졌다.
“하지 마, 권세현. 하지…….”
“잘 가라, 한이결.”
“권세현…!”
잭나이프의 칼날이 허공을 빠르게 갈랐다.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명치를 뚫고 들어갔다. 망설임 없이 제 명치에 칼을 꽂아 넣은 권세현이 상체를 숙인 채로 허억,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아, 으, 흐윽……!”
나 또한 명치에서 강한 통증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숨을 헐떡이며 권세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검은 정장 재킷 안쪽으로 보이는 흰 셔츠가 피로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무력하고 비참했다. 결국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현실을 깨닫자 숨이 막히도록 고통스러웠다.
쓰러지는 권세현을 향해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권세현의 몸에 가려졌던 홀 뒤편이 드러나며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
조명이 꺼져서 어두워진 가게 내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빛 사이로 백금발이 보였다. 쓰러진 권세현을 보는 은회색 눈동자가 뇌리에 박혔다.
쿠구궁!
“천장이 무너지고 있어요!”
“한이결!”
굉음과 함께 주변이 크게 흔들렸다. 나를 품에 안은 채로 하태헌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뒷문 앞에 서 있던 유시혁이 권세현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닥에 피가 퍼져 나가는 권세현을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걸 끝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왜…….’
다이스가 멀어진다.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하늘이 어둠에 먹혀든다.
‘왜 당신이…….’
이전에 봤던 그 출구를 다시 찾은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나를 안은 하태헌이 마지막으로 출구로 뛰어든 동시에 공간이 모조리 사라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우리를 집어삼켰다. 아래로 추락하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 표정을 해?’
***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어둠도 사라지고 흙바닥이 나타났다. 겨우 정신을 차려서 바람으로 모두의 몸을 감쌌다.
바람으로 속도를 늦춘 덕분에 다치지 않고 무사히 땅에 내려선 그 순간, 적의를 담은 기운들이 피부를 날카롭게 찔러 왔다.
“여긴 어디죠?”
“현실과 이어진 공간… 예전에 지났었던 레드 마켓에 붙어 있는 공간과 비슷한 곳이에요.”
권정한의 질문에 능력을 사용한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으…….”
“하태헌, 한이결 곁에 있도록.”
지친 상태로 능력까지 쓰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내 상태를 알아챈 천사연이 인벤토리에서 릴리스의 검을 꺼내 들며 싸늘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민아린 힐러와 에드워드 제작자도 한이결 곁에 계십시오.”
천사연, 하태헌과 마찬가지로 근처에 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박건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옆을 우서혁이 채웠고 김우진은 오랜만에 분신을 꺼냈다.
피이익, 픽!
민아린의 곁에 있던 여우가 내게 날아와 불안이 담겨 있는 울음소리를 냈다.
눈앞을 가렸던 안개가 옅어지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십 명의 가면을 쓴 능력자들이 다가왔다.
“Welcome, 한국에서 온 손님 여러분!”
거친 음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 가장 안쪽에 서 있는 거구의 남자를 곧바로 발견했다.
프라우스 신도단의 닥터. 그가 우리에게 외쳤다.
“내가 만들어 낸 세계에서 보낸 시간은 즐거웠나?”
킬킬거리며 쉰 소리를 섞은 웃음을 흘린 닥터가 이어 말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는데 말이지. 어때, 제법 그럴싸하지 않던가?”
“…….”
“재미없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얘기 좀 해 주지 그래! 나 같은 제작자에게 평가 한마디가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모양이군.”
코와 입을 가리는 투박한 방독면을 착용한 채로 목에 힘을 주고 소리치던 닥터가 말이 끝나자마자 피를 토하듯 기침을 했다.
온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도록 여러 차례 거친 기침을 뱉어 내던 그는 곧 손을 무성의하게 휘휘 내저었다.
“됐다, 시팔. 유머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놈들 상대로 뭘 바라냐. 죽여, 죽여.”
파지직, 전기가 튀어 오르는 방독면의 이음쇠를 조절한 닥터가 신도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방에 모여든 신도단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건 좀 큰일 났네요, 마스터.”
혹시 몰라 챙겨 뒀던 쇠구슬을 꺼내 든 박건호가 어마어마한 숫자에 질린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보다 강한 기운이 여럿 있는 거로 보아 신도단에 S급 능력자도 적잖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속에서는 두려움이 아닌 뜨거운 분노가 끓어올랐다.
‘고작 저딴 새끼 때문에…….’
눈앞에서 사라진 가게 직원들과 제 몸에 스스로 칼을 박아 넣은 권세현이 떠올랐다. 닥터의 함정에 걸려든 나 자신이 한심했고, 그로 인해 또다시 지키지 못한 희생자가 나왔다는 현실이 끔찍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이번에도 닥터를 놓치면 또 어떤 지옥이 생겨날지 모른다.
“하…….”
나는 몸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차가운 숨을 토해 냈다. 심장에서 생겨난 낯선 기운이 막을 새도 없이 몸집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한이결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어둡고 무거우며 서늘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온몸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한이결?”
곁에 있던 하태헌이 내게서 풍기는 기운을 알아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야에 보이는 한이결의 새하얀 손이 점차 커지고 흉터가 뒤덮였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몸이…….’
변하고 있었다. 시야가 훨씬 높아지고 뼈가 굵어졌다.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몸이었다.
지금 이게 본래 내가 가진 기운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A급인 한이결의 기운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기운이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와 나를 감쌌다.
기운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될 거라던 엘로힘의 말이 이런 뜻이었나. 나는 망설이지 않고 능력을 사용했다.
‘저건…….’
그러자 프라우스 신도단의 머리 위로 이어진 수십 개의 새하얀 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선은 어둠 너머에서부터 시작되어 신도단 개개인에게 하나씩 연결되어 있었다. 그걸 보자 호텔에서 에드워드가 해 준 설명이 떠올랐다.
-정신계 능력을 예로 들자면 이런 식이에요.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정신계 능력을 쓴다면 이런 선 하나가 연결되는 거죠. 실제로는 기운의 흐름이지만… 선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비슷해요.
정신계 능력자가 상대에게 능력을 사용하면 기운의 흐름이 연결된다. 저 선이 프라우스 신도단의 사마엘과 연결된 거라면…….
나는 시험 삼아 기운을 움직여서 가장 가까운 신도단의 선을 강하게 건드려 봤다. 그러자 선은 쉽사리 뚝 끊어지며 정신 지배에서 풀린 신도단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엉? 뭐야?”
갑작스러운 광경에 닥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이렇게 하는 거군. 직접 두 눈으로 결과를 확인한 나는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모든 선을 한 번에 끊어 냈다.
“으…….”
“끅…….”
나로 인해 정신 지배가 강제로 끊어진 신도단 수십 명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것이 내가 가진 능력, 개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