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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60)화 (260/394)

260화

권세현과 함께 1층으로 내려오자 가게 직원들 사이에 껴서 우유를 마시던 에드워드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내 뒤에 서 있는 권세현에게 향했다.

“술 엄청나게 쌓아 놨네…. 이거 다 마실 수 있겠어?”

“물론이죠, 형님!”

고동주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권세현이 330mL짜리 작은 맥주병을 들었다. 내가 예전부터 즐겨 마시던 맥주였다.

나도 마시려고 같은 맥주를 잡아 드는데, 갑자기 권세현이 내 것을 휙 뺏어 갔다.

“뭡니까?”

“넌 이거 말고 아까 마신 맥주 캔이나 따.”

“예? 왜요?”

“이게 도수가 더 높아.”

“허…….”

당연히 안 된다는 태도에 기가 막혔다.

“헛소리 말고 내놓으시죠.”

다시 손을 뻗어서 권세현이 뺏어 간 맥주병을 쥐어 당기자 권세현도 손등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을 주며 버텼다. 나와 권세현 손 사이에 낀 맥주병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주량도 약해 보이는데 고집부리지 말지?”

“그걸 사장님이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아무리 주량이 약하다 해도 고작 맥주 마시고 취하진 않거든요?”

“어른 말 좀 듣지?”

“무슨… 여기서 어른이 왜 나와요?”

“큭… 크…….”

나와 권세현의 대화를 듣던 천사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흐뭇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단 채로 나와 권세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진짜 짜증 나…….

“그럼 나랑 반 나눠 마셔.”

“나 참… 마음대로 하세요.”

이러고 더 있다간 진짜 웃음거리가 되겠다 싶어서 먼저 손을 놓았다. 맥주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에드워드가 조심히 물었다.

“여기 주스 남았는데 드릴까요, 한이결 씨?”

“…아뇨, 괜찮습니다.”

“푸하하학!”

결국 고동주가 우렁차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가게 직원들이 저마다 하하하 웃어 댔다.

슬쩍 몸을 돌린 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천사연과 박건호, 권정한도 웃고 있을 게 뻔했다.

“야야, 빨간 친구! 이거 마셔 봐.”

어느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온 김우진을 향해 훌쩍 다가온 박주원이 술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또 음료수랑 술을 섞어서 뭔가를 만들었나 보네. 바텐더인 박주원이 심심할 때면 하는 짓이었다.

“노려보지 말고 마셔 봐, 어? 내가 독약이라도 주냐?”

미간을 살짝 구기며 성가셔하는 김우진의 모습에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박주원이 재차 졸랐다. 찝찝한 표정으로 잔을 받아 간 김우진이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달아.”

“맛있지? 음료수랑 섞은 건데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도수도 낮아.”

“…어떻게 만드는데?”

“이리 와 봐.”

이어지는 설명에 관심이 생겼는지 김우진이 박주원의 뒤를 졸졸 쫓아가 실시간으로 섞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진짜 맛있었나 보다.

“흠흠, 그때 만난 그 아리따운 여성분이 지금은 제 아내가…….”

“와아. 로맨틱하네요~!”

“이야, 신입 술 좀 하네?”

“이런 날에는 고삐 풀고 마셔 줘야지 않습니까?”

“형씨, 싸울 때 맞은 뒤통수는 멀쩡한겨?”

“괜찮습니다.”

민아린에게 본인 연애사를 줄줄 읊는 고동주와 직원과 술을 물처럼 들이켜는 박건호, 자신을 걱정해 주는 직원에게 담담히 대답하는 우서혁을 차례로 구경했다. 그것만으로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한 감정이 들었다.

“자, 마셔.”

김우진 비운 옆자리를 채운 권세현이 마시던 맥주병을 내게 줬다. 내용물이 반절 정도 남은 것을 본 나는 픽 웃으며 병을 입에 가져갔다.

“다들 언제 저렇게 친해졌냐.”

“사장님이랑 저도 친해졌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어렵겠습니까?”

내 답을 들은 권세현이 조금 놀란 것처럼 나를 응시하다가 어딘가 어색한 기색으로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뭐… 그것도 맞는 말이네.”

나는 천천히 맥주병을 기울여 마시면서 에드워드를 살폈다. 나와 권세현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에드워드는 남들 시선을 피해 틈틈이 권세현을 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 빛무리가 반짝거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여기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

예상 못 한 질문에 에드워드에게서 시선을 돌려 권세현을 바라봤다.

“갑자기 그건 왜요.”

“지금도 다 같이 호텔에서 지내고 있잖아. 그걸 보면 애초에 오래 있을 계획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언제까지 있을 건지 나도 대충은 알고 있어야지.”

“그런 걸 알아서 쓸 곳이 어디 있다고요. 그냥 갔구나, 하고 잊으면 되죠.”

“진심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렇긴 하지. 얼굴 만면에 미소를 단 채로 김우진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박주원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 떠날지 모른다고?”

“네. 하지만 떠나야 하는 건 사실이긴 해요.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간 바깥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에드워드가 사라져서 크게 걱정하고 있을 클로에부터 한국이나 프라우스 신도단 문제까지. 우리에겐 남아 있는 일이 아직 많았다.

권세현에겐 이 장소가 현실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게는 새로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에드워드를 이곳으로 부른 거고.’

에드워드가 이전에 내게 부탁했던 대로 권세현을 다시 만나게 해 줬으니 이다음부터는 그의 몫이었다. 권세현에게서 출구와 관련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사소한 거라도.

“떠나기 전에 말이라도 해 주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는 가능하겠네요. 알겠습니다.”

권세현이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얼굴 한번 보고 떠나려고 했다. 여길 나가면 이제 앞으로 살면서 두 번 다시는 권세현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가게 안을 둘러봤다. 출구를 가동할 조건을 찾아서 이 공간을 빠져나가게 되면 권세현과 마찬가지로 이 가게도 다시는 올 수 없겠지. 새삼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와 권세현을 포함한 모두가 떠나지 않고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각자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나는 이따 오후에 평소처럼 출근해야 하니 씻고 좀 자 둘 필요가 있었다.

“저, 한이결 씨.”

방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조용한 목소리로 붙잡은 에드워드가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혹시… 이따가 출근하기 전에 잠깐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나요? 다른 분들하고 다 함께요.”

그 부탁에 나는 에드워드가 권세현이나 잭나이프를 통해 무언가 알아냈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금은 다들 술도 마셨고 시간도 늦어서 피곤할 테니 자고 일어나서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에드워드 씨. 푹 쉬고 이따가 봐요.”

에드워드도 어른들 사이에 껴서 새벽을 보내느라 힘들었을 거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대답하며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태헌, 김우진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나는 씻고 침대에 누웠다. 머리맡에 놓인 협탁에 올려진 핸드폰이 시야에 들어왔다.

‘핸드폰을 받아 둬서 다행이네.’

만약 얼굴을 볼 시간도 없이 이곳을 급하게 떠나야 하는 상황이 오면…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인사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편할 것 같아서 받아 둔 건데 의외로 쓸모도 많았고.

피이익, 피익.

새벽 내내 혼자 호텔에 남아 있던 여우가 칭얼거리며 품에 안겨 왔다. 녀석이 잘 때 이렇게 안겨 든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제법 외로웠던 모양이네.

조금 미안해져서 여우를 안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편안한 숙면이었다.

뒤척이거나 중간에 깨는 일 없이 푹 자고 일어나자 시계는 오후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들기 전 자세 그대로 안겨 있던 여우가 내가 깨어나자 손을 핥아 왔다.

“잘 잤어?”

픽!

여우를 놔주며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둘러봤다. 같이 잤던 하태헌과 김우진은 벌써 일어나서 다른 방에 가 있는지 침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온 나는 살짝 젖은 머리를 하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여우가 날아와 어깨에 올라앉았다. 뺨을 간지럽히는 여우의 풍성한 꼬리를 느끼며 창밖을 구경했다. 슬슬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는 호텔 앞거리는 언제나처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방금까지 길에 서 있던 사람 한 명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눈을 깜빡였다.

‘뭐지?’

잘못 본 건가? 하지만 분명 저기 있었는데. 그저 착각이라기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피부를 찔러 왔다. 그 불쾌감에 눈가를 좁힌 그때였다.

“……!”

이번에는 횡단보도 앞에 있던 여자가 순식간에 액체로 변해 바닥에 녹아내렸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자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사람만이 아니었다. 거리에 가로등도, 건물도,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모든 것이 방금 여자처럼 액체로 변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숨이 막혀 왔다.

피이익, 픽! 하아악!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여우가 털을 바짝 세우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제야 겨우 정신이 든 나는 급히 몸을 돌려 협탁으로 달려가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미처 권세현에게 연락하기 전에 손에 올려진 핸드폰도 마찬가지로 회색 액체로 변해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곧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게 대체…….”

“한이결!”

“이결 씨!”

핸드폰이 사라진 바닥을 내려다본 채로 서 있자 방문이 열리며 하태헌과 민아린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들어왔다.

“이결 씨, 방금 보셨어요? 사람이…….”

“호텔 측에서 준비해 준 음식이 그대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공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군.”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한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네, 저도 봤습니다. 지금 당장 출구에 문제가 생겼는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뇨.”

가장 뒤에 있던 에드워드가 내게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공간이 무너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출구가 아니에요.”

“에드워드 씨?”

내 앞에 다가와 선 에드워드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거칠고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두 눈동자에는 짙은 체념이 담겨 있었다.

“…한이결 씨.”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서글픈 표정을 지은 에드워드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나를 정확히 응시하며 이어 물었다.

“이제 결정을 내리셔야 해요.”

에드워드의 작은 손 위에 올려진 것은 박석재의 잭나이프였다. 그걸 본 나는 온몸이 차갑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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