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그날 오후, 5시에 맞춰 가게로 출근을 하며 근처를 살펴봤다. 확실히 가게 주변을 얼쩡거리던 경성 놈들이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어, 쪼끄만 놈. 손은 어떠냐?”
옷을 갈아입고 권세현의 사무실로 올라가는 나를 2층에서 발견한 고동주가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고동주는 이제 우리가 꽤 편해졌는지, 대하는 태도가 가게 직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벽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동주 형님이 치료해 줘서 그런가 보네요.”
“이놈 봐라, 쓸데없는 아부는.”
붕대가 감긴 손을 보란 듯이 들며 대답하자 고동주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아부라고 하지만 아닌 척 으쓱거리는 어깨를 보아하니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잭나이프에 베였던 손은 민아린의 능력으로 완치되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 사실을 모를 테니 아예 붕대를 감아 둔 참이었다.
유시혁에게 얻어맞아서 생긴 상처는 권세현만 봤으니 괜찮지만, 박석재가 휘두른 잭나이프를 맨손으로 잡은 건 고동주를 포함한 모든 가게 직원들이 본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관리 잘해라. 고작 손바닥 좀 베였다고 생각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뭐야, 오늘 출근한 놈들 말고 다른 놈들은 바쁘다냐?”
“다른 놈들이요?”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눈을 굴렸다. 오늘은 하태헌과 박건호, 김우진이 출근했으니 천사연과 우서혁, 권정한이 바쁜지 묻는 거겠지?
출근 외에 할 거라고는 에드워드와 함께 외출하는 것뿐이니 따지고 보면 한가했지만… 무엇 때문에 묻는 건지 모르니 섣불리 그렇다 대답하는 건 애매했다.
“바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뭔 답이 그렇게 어정쩡하냐?”
“저도 물어봐야 해서요. 왜요?”
“오늘은 1시까지만 영업하기로 했다. 그 뒤로는 우리끼리 술 좀 마시려고.”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1시까지만 일하고 그 뒤는 놀고 먹겠다는 겁니까?”
“놀고 먹는다니! 이 새끼는 하여간 말을 해도. 다 형님이 먼저 제안한 거야!”
“사장님이요?”
“그래! 그 재수 없는 경성 새끼들한테 한 방 먹였으니 자축이라도 하자는 거지.”
“아하.”
일이 끝나면 곧장 지하에 던져둔 박석재를 심문할 줄 알았는데. 하긴, 이제 급할 필요 없지.
자축이라. 그런 거라면 우리도 환영이다.
“좋아요. 다른 사람들도 올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우리 눈치 볼 것 없이 그 뭐야, 저번에 귀여운 여자분! 그분도 부르고 동생도 불러라.”
“그래도 됩니까?”
“원래 다 같이 놀고 마실 때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거야, 인마.”
“예, 뭐…….”
상관없다면야. 때마침 깜빡하고 핸드폰을 호텔에 두고 온 참이라 연락할 방법이 있었다. 권세현이 핸드폰 어쨌냐고 물어보면 핑곗거리도 생겨서 아주 괜찮네.
“웬만하면 빼지 말고 오라고 해. 이럴 때 끼어서 공짜 안주 먹고 술도 마시고, 얼마나 좋냐?”
“예에.”
아저씨 같은 말을 하는 고동주에게 대충 대꾸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고동주가 싸가지 없는 새끼라며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세현이 먼저 제안했다고?’
공사장에서 내게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던 권세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쁘지 않네.’
고동주에게 축하 파티를 열자고 얘기하는 권세현을 상상하자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
“자자, 술 있는 거 다 올려!”
제일 신난 고동주가 길게 이어 붙인 테이블 위로 갖가지 술을 마구잡이로 올렸다. 소주와 맥주부터 꽤 값나가는 와인과 양주, 보드카까지. 순식간에 테이블은 술병과 안주들로 가득 찼다.
“오, 본격적인데?”
“술집이니까 술 부족할 일은 없겠네요.”
휘파람을 부는 박건호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권정한이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나는 한 걸음 뒤에서 시끌벅적하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다 같이 모여서 술 마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구나.’
예전에 박건호의 집에서 우서혁과 셋이 마신 기억밖에 없으니 이 정도로 단체는 처음인 게 분명했다.
왜 진작 술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나이 다 찬 성인들끼리 경계심을 허물고 친해지는 데에 술만 한 게 없는데.
‘나중에 공간을 빠져나가면 시간 내서 자리를 한번 더 만들어야겠는데?’
아직도 틈만 나면 쓸데없는 거로 경쟁하는 천사연과 하태헌이나, 아직 서먹한 우서혁과 김우진이나… 사이가 딱딱한 놈들이 많으니 충분히 해 볼 만했다. 권세현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네.
“애기는 우유 마셔라. 여기 주스도 있다.”
“가, 감사합니다…….”
“큼큼. 그쪽 분은… 어떻게, 애들한테 칵테일이라도 만들어 오라고 할까요?”
“괜찮아요. 저 소주 좋아해요.”
내 연락을 받고 가게로 놀러 온 에드워드와 민아린도 큰 불편함 없이 테이블에 껴서 가게 직원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가게 직원들이 워낙 험악하게 생겨서 좀 걱정스러웠는데 벌써 적응했는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오히려 긴장해서 고장 난 기계처럼 뚝딱거리는 건 직원들이었다. 어이구, 저런.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던 나는 뒤늦게 권세현이 없는 것을 알아챘다.
“사장님은 안 내려오십니까?”
내 질문에 주변을 두리번거린 고동주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엉? 그러게. 형님이 왜 안 내려오시지?”
아직 사무실에 있는 건가? 자기가 먼저 마시자고 사람 모아 놓고 뭐 하는 거야.
“…….”
사무실로 올라가 볼까, 고민하던 나는 이내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쩐지 권세현은 사무실이 아닌 그곳에 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제가 찾아볼게요.”
“그래라.”
테이블 끝에 놓인 맥주 두 캔을 들고 홀 계단을 올라갔다. 3층에 있는 사무실을 그대로 지나쳐 옥상까지 멈추지 않고 올라간 나는 곧장 옥상 문을 열었다.
“술자리 시작했는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옥상 가장 끝, 난간에 두 팔을 올린 채로 야경을 구경하고 있던 권세현이 내 말에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얼굴을 돌렸다. 마치 내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알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벌써? 한둘 모이는 게 아니니까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놀고 먹는 자리인데 늦을 리가 있나요.”
권세현에게 다가가 들고 있던 맥주 캔 하나를 넘겼다. 순순히 받아 든 그가 캔을 따며 말했다.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술 마셔도 되는 건가?”
“당연히 되죠. 아니 잠깐, 애초에 술 마시면 안 된다는 소리를 누구한테 들은 겁니까?”
“네가 지금 머릿속에 떠올린 그놈.”
역시 천사연이냐. 이 자식이 권세현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닌 거야?
내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지자 권세현이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천사연 말고 다른 사람들도 싫어하는 것 같던데. 저번에 쓰러졌을 때 몰래 술 마시고 그랬다며.”
“그건 술이 문제가 아니라 비를 잘못 맞아서… 아, 됐습니다.”
여기서 구구절절 변명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혀를 차며 맥주 캔을 따서 벌컥 들이켰다.
맞은편에 보이는 병원에서 새어 나온 하얀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권세현도 나를 따라 맥주를 마시며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새벽에 한바탕 비가 쏟아져서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이 어제보다 훨씬 더 서늘했다. 그렇게 한참을 권세현과 나란히 서서 야경을 보던 나는 맥주 캔이 절반 정도 비워졌을 때쯤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계획이던데요.”
“뭐?”
“다 같이 모여서 축하 파티 하는 거요. 파티치고는 소소하지만.”
“아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한 권세현이 픽 웃었다.
“고민해 보겠다고 했으니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한 번도 이런 걸 나서서 해 본 적이 없더라고. 고동주나 애들이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일찍 했을 텐데.”
“뭐… 이런 것도 상황이 받쳐 줄 때 가끔 해야 좋은 거죠.”
“그럼 축하 파티를 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필요 없어요.”
하여간 무슨 얘기를 못 하겠네. 남은 맥주도 단숨에 마셔 버리고 빈 캔을 구겼다.
“내려가죠. 그래도 사장님이 주인공인데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한이결.”
병원으로부터 먼저 등을 돌린 나를 권세현이 나지막이 불렀다. 무심코 돌아본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후련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저번에 말했었지. 네가 나를 싫어하듯이 나도 나중에는 너를 싫어하게 될 거라고.”
“…….”
“그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권세현의 낮은 목소리엔 조금의 장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밤하늘 저편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에 나와 권세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글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틀렸다고 알려 주고 싶어서.”
이어지는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권세현은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상태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궁금해졌다. 권세현이 어떤 결론을 내렸고 무엇을 받아들였는지.
“어느 부분이 틀렸습니까?”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될 거라는 거.”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권세현이 짙게 미소 지었다.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을 싫어할 정도로 양심 없진 않거든, 내가.”
“허…….”
“어때, 너는?”
어이없어서 허탈한 숨을 내쉬는 내게 권세현이 새롭게 물었다.
“나는 네가 싫지 않은데, 너는 아직도 내가 싫은지.”
이번에는 명백하게 놀리는 어투였다.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아직도 싫냐고?’
뭐 이런 멍청한 질문이 다 있나.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와서 권세현을 만났을 때는 그저 모든 게 다 끔찍하고 불쾌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부정적인 감정이 좀 덜해졌을 뿐이지, 싫은 건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결코 도와주지 않았을 거다. 싫어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좀 더 복잡하고 깊은 감정이었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애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내게 권세현은 애증이었다.
“저도 협력했던 사람을 무작정 싫어할 정도로 양심 없진 않은데요?”
“허…….”
권세현이 했던 얘기를 그대로 따라 하자 이번엔 그가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이번 건 좀 칭찬합니다.”
“…….”
“계속 그렇게 살아가세요.”
나와는 다른 미래를 가지게 된 권세현이었다. 이제는 완벽히 같은 존재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그러니 진심으로 그가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거짓일 뿐인 공간도 그에게는 현실이니까.
과거에 우리가 했던 끔찍한 죄는 모두 내가 가져갈 테니, 너는 그렇게 다른 삶을 계속 살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