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그날 저녁,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살짝 놀란 표정으로 보던 권세현이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뭐요.”
“상처가 다 사라졌잖아.”
“아. 민아린 씨… 그러니까, 힐러에게 치료받았습니다.”
민아린이라는 이름을 들은 권세현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민아린이라는 힐러가 있었지.”
“네. 실제로도 두어 번 봤잖아요. 대화는 안 해 봤지만.”
처음 이 공간에 떨어졌을 때와 유시혁이 가게에 처음 들이닥쳤을 때. 두 번 다 민아린과 통성명을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신기하네. 이렇게 완벽하게 나을 수 있다니.”
“감기 같은 병은 고칠 수 없지만, 외상 같은 경우는 모두 치료 가능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외상이라…….”
“크게 다치면 치유 능력을 쓰기 전에 의사가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래도 대단한 건 사실이죠.”
내가 하는 설명을 잠자코 듣던 권세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참 좋은 능력이네.”
“…….”
그걸 끝으로 사무실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버릇처럼 창밖을 응시하던 권세현이 곧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네가 전해 준 정보를 듣고 계속 생각해 봤는데.”
툭툭, 권세현이 검지로 서류가 올려진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리가 먼저 치는 게 확실히 좋아 보이네.”
“그쪽으로 결론을 내릴 거라 예상했습니다.”
“뭐, 어차피 그 외에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기도 하잖아.”
그렇긴 하지. 이쯤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었다.
“박석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거절해야지. 우리로도 충분하니까.”
“아뇨.”
나는 여기 와서 다시 만난 박석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얼굴 위로 죽기 직전에 봤던 얼굴이 겹쳐졌다.
“거절하지 말고 박석재도 불러 주세요.”
“뭐?”
“아랫놈들은 제외하고 박석재만요. 우리가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거짓을 흘리면 쉽게 넘어올 겁니다.”
“음… 잠깐, 정리 좀 해 보자.”
입가를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권세현이 곧 말문을 열었다.
“한이결, 넌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배신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지. 그럼 현재 박석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분명 알 텐데.”
“당연히 눈치챘습니다.”
“그런데도 박석재를 그 자리에 부르라고?”
“네. 박석재 혼자만 부른다면 괜찮습니다.”
“지금으로도 안전할 텐데. 박석재를 부르면 우리 계획이 새어 나갈 수도 있어.”
우리 쪽 정보라면 나와 내 사람들을 말하는 거였다. 적의 숫자가 60명이 넘어 우리의 도움 없이는 권세현이 이길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출구가 열리면 이곳을 떠날 거니까 정보가 새어 나가도 상관은 없지만…….’
이걸 권세현에게 그대로 설명해 줄 수는 없지.
“위험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잘만 한다면 박석재가 정말로 배신자인지 아닌지 이번 싸움으로 알 수 있을 겁니다.”
“…….”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박석재가 제일 거슬리는 놈 아닙니까? 저를 믿고 불러 보세요. 더는 박석재가 주변에 어슬렁거리지 못하도록 해 줄 테니까.”
박석재를 부르는 방법은 간단하다. 권세현이 먼저 박석재에게 연락해서 일부러 다른 정보를 흘리고 함께 가 줄 수 있냐고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닷새 후에 공사장에서 경성과 사청화가 30명 정도 모인다는 소식을 얻어 냈다. 그 정도 인원이면 싸워 볼 만하니 먼저 습격을 하려는데, 네가 내 곁을 지켜 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흘리면 박석재는 옳다구나 하고 미끼를 물 것이다.
그 정도는 권세현에게 맡겨도 잘해 오겠지. 내 얘기를 듣고 한참을 갈등하던 권세현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애당초 닷새 후에 그놈들이 모인다는 정보도 네가 얻어 온 거니 그 정도 제안은 받아들여야겠지. 박석재 혼자만 불러내는 거라면 크게 걱정할 일도 없을 것 같고.”
“현명한 판단이시네요.”
나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은 권세현이 책상 서랍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가져가.”
“뭡니까?”
직사각형 형태의 검은 상자였다. 권세현의 눈짓에 상자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자 다소곳이 놓여 있는 핸드폰이 드러났다.
“무슨… 설마 핸드폰입니까?”
“고동주가 구해 온 거다. 녀석이 자기 명의로 개통한 거니까 편하게 써.”
“오.”
이건 나쁘지 않은데? 전화번호부에는 권세현과 고동주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낯익은 권세현의 번호를 바라보던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저랑 연락이 안 돼서 어지간히 답답하셨나 보네요.”
“요즘 세상에 핸드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우린 다 없어요.”
정확히는 있는데 먹통인 거지만. 그렇지 않아도 전자 기기를 쓰지 못해서 불편하던 참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진심을 담아 인사하자 권세현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됐으니까 전화하면 제때 받기나 해.”
“그건 확답드리기 힘든데요. 저도 바쁜 사람이라서요.”
“헛소리 말고 가서 고동주나 불러와. 계획 정리하게.”
“네에.”
그대로 사무실에서 쫓겨난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살짝 웃었다.
***
닷새 후, 8인승 차량 다섯 대가 줄지어 가게 뒷문으로 들어왔다. 박석재가 소유한 차량으로, 본인이 먼저 나서서 빌려준 것이다.
“덕분에 다 같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겠어. 고맙다, 박석재.”
“아이고, 형님. 뭐 이런 거로 고맙다 그러십니까. 저도 함께 가는데 이 정도야 당연하죠.”
목적지인 공사 현장까지는 차를 타고 1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그래서 차가 생긴 것은 좋았지만, 운전자 네 명 모두 박석재가 부리는 아랫사람이라 조금 거슬렸다.
이런 식으로 꾀를 부릴 줄이야. 죽어도 혼자 오는 건 싫다 이거군.
나는 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박석재나 다른 사람한테 들리지 않도록 소리 낮춰 말했다.
“일단 차를 타고 공사장까지 가죠. 권세현 옆에는 제가 붙겠습니다.”
“괜찮겠어?”
김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차 타고 이동하는 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럴 확률은 낮을 거야. 우리가 경성과 싸우는 것을 박석재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잠자코 내 설명을 듣던 하태헌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저 박석재라는 남자는 무언가 이득을 보기 위해서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건가?”
고민 좀 해 보겠다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답을 미루던 박석재가 권세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그래서 나도 미처 모두에게 박석재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대충 비슷합니다. 박석재는 우리가 상대보다 수적으로 밀린다는 것을 알고 끼어든 거니까요. 저 사람은 우리가 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흠…….”
권세현의 옆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박석재의 옆모습을 하태헌이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여러모로 멍청해 보이긴 하지.
며칠 전에 권세현에게 받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화요일 자정이 지나고 수요일이 된 새벽 1시.
“제 짐작대로라면 공사장에 도착한 이후에는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상황이 끝날 겁니다. 상대는 다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권정한에게 민아린과 에드워드, 여우를 맡기고 나온 터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내 말에 짧게 휘파람을 분 박건호가 씩 미소 지었다.
“조폭들의 영역 다툼에 끼어들어서 싸워야 한다니, 벌써 기대되는데.”
“예, 예. 어차피 아침 운동만도 못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차에 타세요.”
다들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하고 권세현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박석재는 열심히 권세현을 꼬드기고 있었다.
“차가 넉넉하니까 아랫놈들이랑 같이 타지 말고 저랑 둘이 타고 가시죠, 형님. 여러 명이랑 같이 타면 복잡하지 않습니까?”
“어? 세현 형님 저랑 같이 타고 가기로 했는데요.”
물론 박석재의 뜻대로 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권세현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해맑게 끼어들자 박석재의 굵은 눈썹이 일순간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제가 낯을 좀 가려서 그런가, 아직 세현 형님 말고 친한 분들이 없었거든요. 그렇죠, 형님?”
환하게 웃으며 묻자 권세현이 내 어깨에 팔을 턱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이 녀석이 좀 예민한 성격이라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해.”
팔 장난 아니게 무겁네. 권세현이 순순히 동의하자 박석재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크흠… 그렇습니까?”
“우리 셋이 따로 타고 가면 되겠네요. 저도 석재 형님이라면 그렇게 불편하지 않아요.”
“그거 괜찮겠네.”
내가 뻔뻔하게 ‘석재 형님’이라고 부르자 박석재의 미간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일부러 잔뜩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같이 타고 가도 되죠?”
“쯧… 마음대로 해.”
결국 거절하지 못한 박석재가 질린 기색으로 내게서 등을 돌렸다. 역시 이럴 때 한이결 얼굴만큼 쓸 만한 건 없다니까. 내심 속으로 뿌듯해하는 나를 권세현이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뭐야.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박석재한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놈은 처음 봐서.”
“사장님도 같이 해 놓고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따져 묻는 말에 권세현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너랑 내가 같냐?”
그러고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차를 타러 가 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어이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같아, 멍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