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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54)화 (254/394)

254화

정각이 넘어간 시각. 생각보다 오래 자고 일어난 나는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어 내고 초승달이 떠 있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슬슬 출발해야겠네요. 아마 한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밤바람이 훅 불어왔다. 흩날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마스크로 얼굴 아래를 가렸다.

“혼자가 편해요. 누구를 데려가면 기운도 그만큼 써야 해서.”

다른 사람과 몇 시간이고 함께 날아 본 경험도 없어서 괜히 데려갔다가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었다. 영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권세현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바로 돌아와. 너 지금 상태도 나쁘잖아.”

“사장님이 챙겨 줘서 그런가, 제법 멀쩡해졌어요.”

“헛소리하지 말고.”

“헛소리라니, 너무하시네.”

픽 웃으며 모자를 눌러썼다. 마스크에 모자까지 쓰니 겉모습은 마치 범죄자 같았지만, 얼굴만큼은 확실히 안 보였다.

창틀을 밟고 올라선 나는 천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후웅, 바람이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며 창문 바깥으로 나간 내 몸을 둥실 띄웠다.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권세현이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을 봐도 현실감이 안 느껴진단 말이지…….”

“이젠 슬슬 익숙해지셔야죠. 그럼 다녀올게요.”

권세현을 뒤로하고 바깥으로 날아오른 나는 곧장 가게 뒷문에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우선 모텔 근처부터 살펴볼 계획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몇몇 간판 불빛 말고는 주변은 새까맣게 어두웠다. 나는 속도를 높여서 편하게 하늘을 날았다.

***

권세현은 서류를 보다 말고 창문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벌써 몇 번째인지 도저히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한이결이 경성 관련자를 찾아 정보를 모아 보겠다고 밖으로 날아간 지 1시간 정도가 흘렀다. 굳게 닫힌 창문 너머는 어두운 밤하늘만 보일 뿐 한이결이 돌아올 낌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결국 펜을 놓은 권세현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괜히 보냈나.

속 내용물이 어떻든 일단 겉모습은 연약하고 어려 보이지 않나. 게다가 유시혁과의 갑작스러운 충돌로 몸 상태도 좋지 않을 텐데.

핸드폰도 없으니 그만하고 돌아오라는 연락조차 보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핸드폰이 있었으면 유시혁이 가게를 찾아왔을 때 오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겠지만.

연락이 바로 안 되니까 이래저래 불편한 게 많았다.

‘차라리 하나 구해서 손에 쥐여 줘야 하나?’

전화나 메시지 정도만 오갈 수 있는 핸드폰은 쉽게 구할 수 있으니 하나 장만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고동주에게 얘기해 놔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권세현이 겨우 다시 펜을 든 그때였다.

똑똑.

“예.”

정갈한 노크 소리에 권세현이 대답하자 문이 천천히 열리며 천사연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권세현을 향해 입꼬리를 살짝 올린 천사연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일하고 있었나 보군.”

둘이 있을 때면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을 하는 천사연의 행동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권세현이 심드렁히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무슨 일입니까?”

“한이결은 어디 있지?”

“잠깐 심부름 좀 보냈습니다.”

“경성을 살펴보는 일을 말하는 건가?”

“알고 계시네요.”

무성의한 답에 천사연이 싱긋 웃었다.

“그거랑 별개로 한이결이 오늘은 종일 아래로 내려오지 않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

날카로운 질문에 곧장 대꾸하지 못한 권세현이 눈가를 좁혔다.

‘어쩐다…….’

솔직하게 유시혁이 와서 애를 팼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무작정 거짓말을 하기에도 이상했다.

얼굴이 그 지경이 됐으니 자신이 모른 척해 준다 해도 얼마 안 가 금방 들킬 테지만, 일부러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울 만큼 상처를 숨긴 한이결의 마음을 섣불리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권세현은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을 선택했다. 그를 잠시간 응시하던 천사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미안하군.”

“아닙니다. 사과하실 건…….”

“이사라고 부르던가? 그 사람이 3층에서 내려오는 것을 봤는데, 그 뒤로 한이결이 내려오지 않아서 다들 불안해하고 있는 터라.”

불안… 그제야 권세현은 아래층에서 일하고 있을 나머지 두 명을 떠올렸다. 이름이 우서혁과 권정한이라고 했던가. 천사연뿐만 아니라 그 두 명도 한이결을 그 정도로 걱정하고 있나.

“…다들 한이결을 많이 신경 쓰나 봅니다.”

“그럴 수밖에. 우리 리더나 마찬가지니까.”

리더라고?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답변에 놀란 권세현을 뒤로하고 천사연은 사무실을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권세현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천사연이나 하태헌이 팀을 이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한이결이었나.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 경성을 정찰하러 간 것도 그렇고… 한이결이 대부분 일을 도맡아 하긴 했지.

사무실까지 올라와서 행방을 물어보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다들 한이결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공감이 갔다. 권세현 본인도 한이결이 나간 이후부터 줄곧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니까.

‘큰 문제 없이 돌아와야 할 텐데.’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드러난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사무실을 나온 천사연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가게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층 홀로 내려왔던 백금발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침 옷을 갈아입고 바 근처에 서 있던 천사연은 고개를 돌린 남자와 시선이 부딪혔다. 조명 아래에서 선명하게 빛나던 은회색 눈동자로 천사연을 응시하던 남자가 이내 짙은 미소를 지었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남자가 보였던 비웃음을 상기한 천사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스터?”

마침 서빙을 끝내고 돌아오던 권정한이 1층으로 내려오는 천사연을 발견하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3층에도 한이결은 없더군.”

“예? 아… 그러고 보니 경성이었나, 그쪽을 살펴보러 간다고 했었죠. 능력으로 빠져나갔나 보네요.”

뒤늦게 한이결이 했던 말을 떠올리던 권정한도 어딘가 찝찝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봤던 그 외국인 남자가 아까 오픈 전에 3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나요?”

가뜩이나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신경 쓰이는데, 그 남자가 왔다 간 이후로 한이결이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은 데다 능력으로 정찰하러 나갔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천사연이 저처럼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권정한에게 간단하게 명령했다.

“이후에 한이결을 보게 되면 바로 말하도록.”

“알겠습니다. 우서혁 비서님에게도 전달해 두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덧붙여 대답한 권정한이 우서혁이 있는 바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어이, 신입! 이거 좀 밖에 내놓고 와라.”

삐걱거리는 의자를 살펴보던 직원이 권정한을 불렀다. 걸음을 멈춘 권정한은 바쁘게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우서혁을 한 번 본 후에 직원에게 다가갔다.

“뒷문으로 가면 되나요?”

“엉, 다리 하나가 아예 맛이 갔어. 못 써먹겠다.”

어차피 우서혁은 지금 밀려드는 칵테일을 만드느라 정신없으니 의자부터 정리하고 들르면 되겠다. 의자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턱 걸친 권정한이 뒷문으로 향했다.

끼익, 기름칠이 덜 된 철문이 열리며 서늘한 가을 밤공기가 느껴졌다. 부서지거나 망가진 물건을 쌓아 두는 곳에 의자를 내려 둔 권정한은 맞은편에 급히 물러서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

부스럭, 바닥에 버려진 비닐봉지를 잘못 밟은 상대가 흠칫 놀라며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더 깊게 누르며 뒷걸음질 쳤다.

가게 불빛이 닿지 않아 그림자가 진 골목 입구, 그 앞에 서 있는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챈 권정한 재빨리 다가가 팔을 잡았다.

“이결 형?”

아무리 어둡고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해도 한이결을 몰라볼 권정한이 아니었다. 팔이 잡힌 한이결이 머쓱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 나와 있었네.”

“의자가 망가져서 내놓으라고 해서요. 형은 여태 나가 있다가 지금 들어온 거예요?”

평소와 같은 목소리에 비해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에 눈썹 한쪽을 치켜올린 권정한이 상체를 숙였다.

“어, 응. 방금 막…….”

“근데 왜 뒷문에서 이러고 있어요?”

“옥상에 고동주가 있더라고. 잠깐만 쉬다가 날아서 올라가려고 했지.”

“굳이 또 날아서요? 그냥 들어오면 되잖아요.”

자꾸만 눈을 마주하려는 권정한을 피해 한이결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손님도 많은데 이 차림새로 들어가는 건 조금 그렇잖아.”

“아~ 그래요? 그럼 모자랑 마스크를 벗으면 되죠.”

“그…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먼저 들어가 봐. 나는 옥상으로…….”

“형, 잠깐만요.”

한이결의 말을 끊어 낸 권정한이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모자를 휙 벗겨 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놀란 듯 살짝 커진 한이결의 두 눈이 보였다. 더불어 새빨갛게 물든 채로 부어 있는 오른쪽 관자놀이와 눈가도 훤히 드러났다.

“…뭐야. 진짜로 다쳤네요?”

“…….”

“설마 실수로 넘어졌다는 그런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죠? 밴드도 붙어 있는 걸 보면 이미 누가 한번 치료해 준 것 같은데.”

“음…….”

권정한이 짜증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이죽거려도 한이결은 반박 한 번 똑바로 하지 못하고 시선만 피했다. 그래도 숨기려고 한 본인 행동이 잘못된 건 아나 보다.

“됐으니까 모자 다시 쓰고 같이 들어가요. 아까 나가서 여태 능력 쓰고 날아다녔으면 피곤할 텐데 무리하지 말고.”

“옥상으로 가도 괜찮아.”

빼앗았던 모자를 한이결 머리에 조심스럽게 다시 씌워 준 권정한이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한이결의 손이 쏙 들어갔다.

“어차피 저한테 들켜서 끝났어요. 전 형 비밀 지켜 줄 마음 조금도 없으니까.”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경호원 없는 데서 맞고 온 형이 더 매정하다고 생각 안 해요? 어서요.”

단호한 말에 머뭇거리던 한이결이 손을 뿌리치지 않고 뒤를 쫓아왔다.

‘화도 마음대로 못 내겠네.’

기가 죽어서 제 눈치를 살피는 한이결을 본 권정한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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