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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53)화 (253/394)

253화

64. 마주 보기

잡음이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문을 닫고 그 앞에 서자 유시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놀라지 않는군. 고동주가 말해 줬나?”

“아닙니다.”

뒷짐을 진 채로 허리를 바르게 폈다. 그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동주 형님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냥 저 혼자 운 좋게 알아챘습니다.”

모른 척 뻔뻔하게 대답하자 유시혁이 픽 웃고는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내가 순순히 반대편 소파에 앉자 그가 쭉 뻗은 다리를 꼬며 발끝을 까딱였다. 사무실 전등불에 검은 구두 끝이 매끈하게 빛났다.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괸 유시혁이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 또한 입을 다물자 사무실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30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유시혁이 그제야 입을 뗐다.

“내게 물어볼 것 있지 않나? 이를테면… 권세현이 어디 갔는지 알고 싶다거나.”

무슨 핑계를 대든 어차피 권세현은 이 사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쯤 그도 내가 유시혁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잠깐 일이 있어서 나가셨겠죠.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유시혁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세현이가 정말 재밌는 걸 주워 왔네… 이름은?”

“…한이결입니다.”

“그래, 한이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유시혁이 명백하게 비웃음을 단 채로 말을 이었다.

“한이결 직원은 몸값이 참 비싼가 봐. 아니면 진창에 처박힌 싸구려든가.”

“…….”

“너를 포함해서 그때 홀에서 봤던 새끼들… 한 9명 되던가. 내가 개인적으로 좀 궁금해서 알아봤거든.”

잔잔히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일상 이야기를 하듯이 높낮이가 없었다.

“9명이 모조리 신원 불명에 호텔에서 현금으로 생활하고 있더군. 이전 기록은 아무것도 없이.”

아주 당연하게 뒷조사를 했다고 얘기하는 유시혁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나한테만 집중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짧은 사이에 뒤에 있는 다른 이들의 얼굴도 모두 확인한 건가. 이건 명백한 내 실수였다.

“어느 날 뜬금없이 강남에 나타나서 다이스에서 일을 하는 신원 불명의 집단… 어때? 한이결 직원. 굉장히 흥미롭지 않나?”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떼지 말고 편하게 설명 좀 해 주지 그래. 내가 이런 개판을 참 좋아해서.”

나는 머릿속으로 급히 화제를 돌리거나 얼버무릴 방법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유시혁은 그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왔다.

“상황을 보아하니 다른 놈들은 우리 한이결 직원의 명령을 따르는 거로 보였는데. 개새끼를 무려 8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젊은 친구라.”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권세현에게 유시혁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미리 물어볼 걸 그랬다. 설마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터라 굉장히 난감했다.

“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 모두 권세현 사장님의 아래에서 가게 일을 도울 뿐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습니다.”

결국 내가 뱉어 낼 답은 속이 텅 빈 겉껍질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가게 일을 도울 뿐이다…?”

“권세현 사장님께서 직접 고용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정당한 다이스의 직원입니다.”

다이스는 이제 권세현의 소유였다. 그러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유시혁이 관여할 수 없다.

내 말이 끝나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바라보던 유시혁이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

흉터가 진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로 텅 빈 웃음을 흘리는 남자의 모습에 오싹한 소름이 올라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유시혁이 시선을 올렸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씨발…….”

빛 한 점 들지 않은 은회색 눈동자가 뱀 같았다. 온몸이 공포로 바싹 굳었다.

덜컹, 쾅!

유시혁이 발로 후려치자 앞에 있던 무거운 테이블이 굉음을 내며 저 멀리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머리가 채 따라가기도 전에 멱살이 잡혀 몸이 붕 떠올랐다.

쿠웅!

“크윽…!”

나를 짐짝처럼 바닥에 집어 던진 유시혁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그래. 내가 너무 우습게 봤다, 응?”

“컥, 허억……!”

복부에 강한 충격과 동시에 화끈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가차 없이 내 배를 걷어찬 유시혁이 기침을 쏟아 내는 내 멱살을 다시금 잡아 들어 올렸다.

“사과할게.”

눈가를 찌푸린 탓에 흐려진 시야로 유시혁의 화사한 미소와 커다란 주먹이 보였다. 곧이어 타격음이 귀를 울리며 고개가 휙 돌아갔다. 반사적으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삐이, 이명이 옅게 들려왔다.

‘미친 새끼…….’

연달아 이어지는 고통에 본능적으로 기운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눈꺼풀을 내린 채로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흔들리는 기운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이 순간이 무사히 지나갈 때까지 버텨야 했다.

내가 아무런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맞는 것을 본 유시혁이 멈칫했다. 때리는 것을 멈춘 그가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은 채로 눈을 깜빡였다.

“뭐지?”

그가 억센 힘으로 내 턱을 붙잡아 억지로 얼굴을 올렸다. 맞은 곳이 엄지손가락으로 사정없이 눌리자 아릿한 통증이 솟구쳐 절로 눈물이 맺혔다. 그걸 본 은회색 눈동자에 이채가 띠었다.

“너…….”

“이사님!”

유시혁이 입을 연 동시에 권세현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들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떨어트린 권세현이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와 나와 유시혁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를 놓친 유시혁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빨리 왔네. 뛰어왔어?”

“제 직원입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쯧, 잔소리는.”

주먹을 휘두른 손을 가볍게 두어 번 휙휙 털어 낸 유시혁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러게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면 좀 좋아? 제 주인을 닮았나, 멍청한 건 둘이 똑같네.”

“이사님.”

“알았어. 알았다고.”

미간을 짜증스럽게 구긴 유시혁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거 좀 건드렸다고 시팔, 아주 지랄을 하네. 잘하면 둘이 배도 맞겠어?”

“이상한 트집 잡지 마십시오. 가게로 찾아오지 말라는 제 부탁을 두 번이나 거절하셔 놓고 직원까지 건든 건 이사님입니다.”

“말이 많아졌네, 세현아. 저 새끼랑 이미 한바탕 뒹굴었나 봐?”

“…….”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 좆같이 만만해진 건지… 아, 불쌍한 내 신세.”

“가세요. 아래에 차 대기 중입니다.”

“응. 안 그래도 꺼지려던 참이었어. 배웅은…….”

나와 권세현을 향해 눈길을 한 번 던진 유시혁이 짧게 실소를 내뱉고는 등을 돌렸다.

“해 줄 리가 없지.”

훅 퍼져 나온 담배 향과 함께 유시혁이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권세현이 무릎을 꿇으며 내 상태를 살폈다.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거야?”

“별로… 심한 건 아닙니다.”

권세현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헛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맞은 건 제법 오랜만이라 적응하는 게 영 어려웠다.

“하… 약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권세현이 사무실 구석에 처박아 둔 약상자를 찾는 동안 비틀비틀 걸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왼쪽 허벅지 부근이 아파서 거동이 꽤 불편했다. 아무래도 바닥에 잘못 부딪힌 것 같은데.

“윽.”

거울로 얼굴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많이 맞지도 않았는데 한이결의 얼굴은 유독 다친 티가 심하게 났다. 뭐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부어오르는 건지.

‘망했다…….’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집중적으로 맞은 오른쪽 입가와 눈이 붓고 찢어져서 피가 났다. 부위도 넓어서 도저히 남들에게 숨길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피를 대충 닦은 후에 손을 씻고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권세현이 제 앞자리를 툭툭 쳤다.

“앉아.”

그냥 약만 받아서 혼자 치료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다 귀찮아진 나는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갔다. 권세현과 마주 보는 자세로 앉자 그가 연고를 면봉에 짜냈다.

“눈 감아.”

순순히 눈을 감으니 입술에 면봉이 톡톡 닿아 오는 느낌과 함께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다. 찢어진 상처에 빠짐없이 약을 바른 권세현이 밴드를 꺼내며 말했다.

“얼음찜질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기다려 봐, 고동주를 시켜서 얼음을…….”

“아뇨. 약 바른 거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진짜 괜찮습니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이 꼴을 보이고 싶지도 않고.”

“쓸데없는 고집은.”

밴드 포장지를 뜯어낸 권세현이 상처 위에 밴드를 두어 개 붙여 줬다. 찢어진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분명 하루도 안 가서 다 들킬 텐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 정도 상처야 민아린의 치유 능력이면 바로 나을 수 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험난할 것 같았다. 얼굴에 붙은 밴드를 만지작거리며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는데, 권세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그 사람과 단둘이 둬서.”

“뭐… 괜찮습니다. 다시 찾아올 거라고 예상 못 했던 건 저도 마찬가지라서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전 정말 괜찮은데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권세현이 사무실 문 근처에 떨어져 있는 봉투를 챙겨 왔다.

“자.”

그가 내게 검은 마스크와 모자를 건네줬다. 그 외에 봉투에 담겨 있는 건 모두 담배였다. 유시혁이 사 오라고 시킨 게 담배였나 보군.

이 근방에서는 구할 수 없는 담배라 사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만했다.

“나간 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챙긴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빨리 올 걸 그랬네.”

“아닙니다. 쓸 만하겠네요.”

얼굴이 이 지경이니 가릴 필요가 있었다. 마스크와 모자를 받은 나는 권세현에게 부탁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서 시간 좀 보내도 되겠습니까?”

지금 상태로 가게 안을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이해한 권세현이 허락과 함께 진통제를 꺼내 줬다.

“소파에서 좀 자. 아무도 들어오지 않게 할 테니까.”

그렇게까지 휴식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약을 먹고 소파에 지친 몸을 뉘니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르게 흐려지는 의식에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권세현이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내게 덮어 줬다. 나는 거절할 새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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