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입을 열게 하는 건 성공했습니다만, 찝찝한 부분도 여럿 있습니다.”
가게 영업이 끝난 이른 아침, 권세현의 명령으로 지하실로 내려갔던 고동주가 사무실로 다시 돌아온 것은 2시간이 지난 후였다.
권세현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던 고동주는 이내 큰 신경 쓰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일단 경성 소속자 말고도 다른 놈들이 끼어든 건 확실해 보입니다. 사청화라는 세력입니다.”
“박석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거군.”
“예. 하지만 실장도 몇 명이 끼어들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사청화 뒤에 누가 있는지도요.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보면 우연히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잠깐 손을 잡은 느낌입니다.”
“더 알아낸 건?”
“엊그제 형님께서 확인하셨던 모텔처럼 경성과 사청화가 몰려들고 있는 장소가 한 군데 더 있다고 합니다. 서울 외곽에 있는 공사장입니다.”
고동주가 핸드폰으로 지도를 켜서 정확한 위치를 짚어 줬다.
“확인해 보니 법 문제로 일정이 무기한 연기된 공사장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나옵니다.”
“우리 쪽에 모텔을 발각당했으니 새로 모여들 장소를 찾은 거겠지. 아니면 애초부터 두 군데를 사용하고 있었다거나.”
권세현이 말하는 동시에 내게 시선을 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여서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나랑 대화하고 싶으면 고동주를 내보내든가. 그러자 권세현이 한숨을 푹 내뱉으며 다시 고동주에게 물었다.
“…장소 말고는 다른 얘기 없었나?”
“큼. 그게 말이죠, 형님.”
고동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그놈이 하는 말로는 나흘 뒤에 공사장에서 모두 모이나 봅니다. 모여서 우리 가게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습격이라…….”
“숫자가 50명이 훌쩍 넘을 거라 합니다.”
권세현의 반듯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가게 인원이 30명도 채 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거의 배로 차이가 났다.
“나흘 후 습격이라 해도 무작정 믿기는 어렵군.”
“맞습니다. 실장을 잡은 지 벌써 이틀째… 경성에서도 실장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을 겁니다.”
날짜나 장소가 변할 가능성이 컸다. 결국 실장을 건드려서 얻은 거라고는 사청화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형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정도 숫자가 움직이는 거면 당장 쳐들어올 수는 없을 테니 좀 더 고민해 봐야겠지.”
“혹시 석재 형님 애들이랑 합치는 걸… 고려해 보고 계십니까?”
“글쎄.”
고동주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동주는 예전부터 박석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썰미가 나보다 좋은 녀석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해서 박석재에게 틈만 나면 시비에 걸리고는 했고.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다. 박석재가 데리고 있는 애들이 많다고는 해도 우리와는 관련 없는 일이지. 우리는 이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알아서 해야 해.”
“형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기다려 봐. 실장은 나중을 위해서 일단 내버려 두고.”
“알겠습니다.”
허리 숙여 인사한 고동주가 사무실을 나갔다. 방 안에 나만 남자 권세현은 지친 숨을 길게 쉬며 소파 등받이에 뒷머리를 댔다.
“복잡하네.”
“어쩔 수 없죠. 실장이라 불렸다고는 해도 결국 잔챙이들을 담당하는 중간 관리자일 뿐이니까.”
“그럼 다른 놈을 더 잡아내야 한다는 건가.”
“잡아내든가… 찾아가든가.”
그 말에 권세현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봤다.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제 능력을 잊은 건 아니시겠죠?”
“경성 놈들 미행이라도 하려고?”
“가게 주변이나 어제 갔던 모텔 근처에 아직 몇 명 남아 있을 겁니다. 그 뒤를 밟으면 뭐라도 더 얻겠죠. 겸사겸사 숨어서 대화하는 것도 좀 듣고.”
“그럼 나도 같이 가.”
“그 덩치를 어떻게 데리고 다닙니까? 혼자가 편합니다.”
“덩치라니. 너무하네.”
픽 웃은 권세현이 잠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네 말대로 녀석들이 모여든 위치를 알아내고 그곳을 우리가 먼저 습격한다면… 상황은 조금 나아지겠지.”
“예.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려 두면 얼마간은 안전할 겁니다. 50명이 넘는 인원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려야 하는 게 문제지만.”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내 얘기를 듣던 권세현이 답답한지 목을 죄는 검은 넥타이를 쭉 당겨 풀었다.
“그럼 나머지는 경성을 찾아본 이후에 다시 정해야겠군. 실장도 계속 지하에 놔둘 수는 없어.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흠…….”
나는 앉은 채로 권세현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고 소파 등받이에 옆머리를 툭 기대며 말했다.
“왜 저한테 물어보지 않는 겁니까?”
“뭘 물어보라는 거지?”
“미래 정보 말입니다. 사청화의 존재나 경성이 모이는 위치나… 언제 습격을 하면 좋을지 그런 정보요. 왜 물어보지 않습니까?”
“네가 알고 있는 미래 정보는… 경성이 하루 일찍 쳐들어온 순간부터 끝난 거로 알고 있는데.”
“…….”
“그건 너도 모르는 미래였겠지. 그럼 미래가 바뀌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고.”
“눈치가 제법 빠르시네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굳이 아니라고 반박할 필요도 없으니 가볍게 긍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주변 정찰을 한번 나가 보죠.”
“기다려.”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려던 내 손목을 권세현이 잡아 왔다.
“네 할 말만 하면 다냐? 나도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왜 날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지?”
손목에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나를 정확하게 응시해 오는 검은 눈동자에는 희미한 경계의 기운이 감돌았다.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여전히 싫어합니다. 근데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권세현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여 말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아마 사장님도 나중에는… 똑같이 저를 싫어하게 될 겁니다.”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될 거라고?”
“네. 지금도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겁니다.”
나는 그에게 잡힌 손목을 천천히 빼냈다.
“사장님을 돕는 이유는 저도 나름대로 그 과정에서 얻는 정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요한 것을 얻는 김에 사장님도 돕겠다는 거죠. 제겐 별로 힘든 일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고… 소설을 봤으면 아시겠지만, 전 일반인보다 훨씬 강합니다.”
특히 여기는 셔터 아이템처럼 능력자를 붙잡아 둘 만한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일반인들 눈만 피한다면 활동하기에는 더 편했다.
“그리고 이제 더 알려 드릴 정보도 없으니 거래를 이어 나가려면 저도 다른 쪽으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게 다라고? 도와주는 이유가?”
“네. 이제 가 보겠습니다. 나머지는 내일 하죠.”
“…….”
대화를 끊어 내며 등을 돌리자 이번에는 권세현도 차마 붙잡지 못했다.
사무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하태헌과 김우진, 박건호가 고개를 들었다. 먼저 호텔로 가 있으라니까, 하여튼 다들 말을 안 듣는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괜찮다.”
옷은 미리 갈아입어 둔 상태라 바로 호텔로 돌아가면 된다. 다이스를 나서자 하늘 높이 떠오른 아침 햇살이 머리 위를 비췄다.
“얘기는 어떻게 됐지?”
“음…….”
내 얼굴을 힐끔거리며 옆에 찰싹 달라붙어 오는 김우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하태헌의 질문에 대답했다.
“짐작했던 대로 실장에게서 얻은 건 딱히 없습니다.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제가 직접 경성 관련자를 찾아다녀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도와줄게.”
김우진이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확실히 김우진의 분신 능력은 여기저기 쓸 곳이 많겠지만…….
“안 돼. 이미 가게 바텐더로 얼굴이 알려졌잖아. 경성에서 우리를 모를 리가 없어.”
단칼에 거절하자 녀석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잠자코 내 얘기를 듣던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능력으로 날아다니면서 살필 생각인가?”
“늦은 밤이라면 쉽게 들키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그놈들도 대로변을 돌아다니진 않을 테니까요.”
뭐가 됐든 내일이 되어 봐야 한다. 상황이 또 달라질 수 있으니.
나는 선선하게 불어오는 아침 바람을 맞으며 얼굴을 들었다. 새파란 하늘을 흘러 지나가는 하얀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
다음 날, 천사연과 우서혁, 권정한과 함께 별문제 없이 출근을 마친 나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정찰을 나간다 해도 밤이 늦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전까지는 해 오던 대로 권세현의 곁에 있거나 서빙을 도울 생각이었다.
“쪼끄만 놈.”
“예?”
사무실을 향해 2층을 막 지나가려던 그때였다. 그 근처를 서성이던 고동주가 나를 막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크흠, 그…….”
그가 괜히 헛기침하고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너 어디 나갔다 올 곳 없냐?”
갑자기? 방금 막 도착했는데.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심부름시키실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아… 됐다.”
갑자기 거칠게 숨을 내쉰 고동주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동주 형님?”
“…미안하다, 쪼끄만 놈.”
장난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제야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눈가를 좁혔다.
“뭡니까. 전 괜찮으니 설명해 주세요.”
“설명 못 해. 이건… 그러니까… 일단 올라가 봐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가게 불빛 아래 서 있는 고동주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표정은 나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온몸의 피가 발아래로 빠져나간 것처럼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
입술을 깨물고 고동주를 지나쳐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주변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흐려졌다.
눈앞에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그 앞에 서자 긴장감에 어깨가 절로 뻣뻣하게 굳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 낀 어느 날 밤. 나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와인 병을 들고 문 앞에 섰었다. 그 남자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로.
그 옛날과 지금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다.
문손잡이에 올린 손이 옅게 떨렸다. 억지로 힘을 줘서 밀자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익숙한 사무실 내부가 느리게 드러났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입꼬리를 유려하게 끌어 올려 웃었다. 옆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으로 그의 백금발에 주홍빛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