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뒷정리에 여념 없는 고동주와 직원들을 뒤로하고 다 같이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방에 모였다.
덕분에 복잡한 감정들로 잔뜩 뒤엉킨 속을 진정시키고 샤워까지 끝낸 나는 좀 더 차분한 상태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제가 아는 데까지만 말해 보자면… 다이스는 본래 다른 사람이 주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는 게 뒤늦게 왔던 그 남자인가?”
“네.”
피익, 여우가 가냘픈 울음소리를 내며 내 볼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우울한 내 기분을 눈치채고 위로를 해 주려는 그 몸짓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어쩐지. 그래서 계속 사장이 아닌 관리자라고 불러 달라고 한 거였군.”
박건호가 입가를 매만지며 이해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컵에 담긴 따듯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다이스가 경성에게 견제를 받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합니다. 물론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건 처음이지만요.”
“그 경성이라는 놈들이 노리는 건 뭐지? 가게?”
하태헌의 질문에 시선을 내려 잠시간 고민한 나는 곧 입을 열었다.
“네. 다이스가 맞습니다. 정확히는 다이스가 있는 땅을 노리는 겁니다.”
“땅이라.”
“경성은 어느 정도 이름난 건설사입니다. 오늘 찾아온 놈들은 경성이 뒤에서 이용하는 조직이고요.”
건설사라는 말에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던 모두의 눈빛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하긴,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땅을 갖고 싸우는 이야기는 낯설고 새로울 만했다.
“다이스 뒷문 쪽에 낡은 골목길이 있는 건 다들 보셨으니 알 겁니다. 거기도 따지고 보면 다 경성이 투자한 땅입니다. 그리고 다이스는 경성이 써먹으려는 땅에 반절 정도 걸쳐 있는 상태입니다.”
“으음, 그래서 가게 사람들을 협박해서 억지로 쫓아내려고 하는 건가 보네요.”
“경성으로서도 번거로운 일이죠. 원래라면 본 주인과 거래를 해서 수월하게 넘겨받을 계획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유시혁과 거래를 진행하고 있기도 했다. 그 남자야 저런 가게 하나 팔아 버리는 일은 눈 깜빡이는 것만큼 쉬웠을 테니.
하지만…….
“거래가 미처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가게 주인이 바뀌어 버렸고, 지금 주인은 경성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됐죠.”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그건…….”
민아린의 물음에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박건호가 대신 입을 열었다.
“가게를 꽤 아끼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직원들과 분위기도 좋고.”
“아하. 주변 사람을 굉장히 아끼는 분인가 보군요.”
나를 보며 대단하다는 듯이 얘기하는 민아린의 모습에 괜히 머쓱해졌다. 박건호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군.”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듣고 있던 천사연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나와 권세현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겠지.’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일들을 알려 준다 해도 다들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대한 솔직하게 설명하자고 마음을 먹은 나는 긴장한 채로 천사연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우리에게 말을 해 줘야지.”
“예?”
하지만 뒤이어 나온 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긴장한 게 무색해진 나는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이 공간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무엇을 할지 묻는 게 아니었다. 어깨를 굳힌 내게 천사연이 이어 물었다.
“권세현, 그 사람을 돕고 싶나?”
“…….”
권세현을 돕는다. 그 말에 담긴 뜻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내가 이제껏 만나 온 권세현은 그저 내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이 공간이 만들어 낸 환상 같은 존재였다. 숨을 쉬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니며, 만진다 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저는…….”
그저 끔찍한 악몽의 일부분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한순간의 꿈이 바로 이 공간의 권세현이었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 어설픈 실수와 후회로 점철되어 죽고 나서도 잊지 못하는 순간. 남은 거라고는 질척한 미련과 고통뿐인 텅 비어 버린 삶.
하지만…….
“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같은 선택을 하고 만다.
“…돕고 싶습니다.”
나와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이곳에 있는 권세현은 조금이라도 편안한 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그래서 그 아이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올바른 형태로 지킬 수 있기를.
끝내 나는 권세현을 밀어낼 수 없었다. 아무리 볼품없는 형태여도 결국 나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내가 허망하게 죽지 않도록 힘이 닿는 데까지 돕는 것뿐이었다.
“그래.”
꾹꾹 담아 놓고 외면했던 진심을 더는 참지 못하고 뱉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천사연은 입술을 유려하게 끌어 올려 웃었다.
“좋군.”
예상과 다른 그의 반응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천사연만이 아니라 그 옆에서 내 얘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뭐가… 좋다는 겁니까?”
“권세현을 도울 거라는 그 결정에 동의한다는 거다.”
“예? 아니, 그… 저만 도와도 충분합니다. 다른 분들은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어차피 공간을 나가기 전까지 그 가게에서 계속 일해야 하는데, 그렇게 선 긋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그런가? 반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내게 하태헌이 말했다.
“나도 저 의견에는 동의한다. 무엇보다 출구를 가동할 ‘조건’을 찾지 못한 지금, 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심을 두는 편이 단서를 놓치지 않을 거고.”
“하태헌 부마스터가 내 의견에 동의하는 날도 다 오고. 놀랍군.”
천사연의 장난을 무시한 하태헌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나가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이득이라는 거다, 한이결. 그러니 바라는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
잔잔한 하태헌의 목소리가 불안해하는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쓰게 미소 지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놓였다. 하태헌의 말처럼 권세현이 앞으로 겪을 사건에 공간을 빠져나갈 실마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일도 이제껏 했던 대로 일하러 가면 되겠군.”
“가게를 습격했던 일당 중 한 명을 잡았으니 주인도 무언가 정보를 더 얻어 냈을 겁니다.”
박건호와 우서혁의 대화를 들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얌전히 앉아 있던 에드워드가 내게 다가왔다.
“저어… 한이결 씨.”
“네?”
“혹시… 그…….”
에드워드가 약간 창백해진 안색으로 한참을 뜸을 들였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자 그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가게 주인분 한 번만 더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가게 주인이요?”
에드워드가 권세현을 왜 보려고 하는 거지?
‘설마…….’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무엇을 떠올렸는지 눈치챈 에드워드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그분이 유독 다르게 느껴져서요.”
“다르게 느껴졌다는 게 기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으음, 워낙 희미한 데다가 저도 뭔지 잘 몰라서 지금은 설명이 어렵네요. 그래서 다시 만나 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그 사람에게 물어볼게요. 아마 상관없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바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그건 괜찮아요! 저도 어차피 출구를 아직 더 봐야 하고… 방금 얘기하신 걸 들어 보니까 다른 문제도 있어 보이니까 이해해요. 제 요청은 천천히 들어주세요.”
내가 불쾌해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을 본 에드워드가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나도 찝찝한 기분은 일단 밀어 넣어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답변을 얻는 대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이제껏 단서는 공간 전체에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 사람에게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권세현도 결국 나로 인해서 만들어진 존재니까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겠는데.’
에드워드가 새로운 가능성을 짚어 준 셈이었다. 내일부터 권세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
“아직 제대로 얻어 낸 정보는 없어. 실장이 제법 버티기도 했고, 어제는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던 터라.”
다음 날, 내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권세현이 인사도 생략하고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마치 어제의 나와 같았다.
“예.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실장을 잡았다 해도 가장 중요한 권세현이 자리를 비우면 아래 애들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권세현은 유시혁에게 불려 갔으니 금방 돌아오지 못했겠지.
“…….”
“…뭡니까?”
탈의실에서 들고 온 넥타이를 목에 걸던 나는 얼굴을 뚫어질 기세로 응시하는 권세현의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낀 채로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권세현이 입을 열었다.
“어제 돌아가고 나서는 별일 없었나?”
“당연하죠. 우리가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넥타이를 마저 매며 건성으로 대꾸하자 그가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우리? 나는 네 상태를 물어본 건데.”
“저요?”
갑자기 내 상태는 왜? 넥타이 매듭을 쭉 올려서 목을 살짝 조인 나는 픽 웃으며 권세현과 눈을 맞췄다.
“뭐, 걱정이라도 하셨습니까?”
“조금은?”
내 비웃음에도 권세현도 지지 않고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재수 없다.
‘걱정이라니… 어이없네. 해도 내가 하는 게 맞지.’
그 남자에게 끌려간 주제에 내 걱정 할 여유도 있고. 옷매무새를 마무리한 나는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그럼 실장이라는 놈에게서 제대로 된 정보는 언제 얻을 계획입니까?”
“이따 일이 끝나고 나서.”
나쁘지 않네. 어차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실장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달력을 바라봤다. 내 기억대로라면 오늘은 중요한 사람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똑똑.
때마침 밖에서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나와 권세현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형님, 손님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권세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고동주를 제치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상대의 얼굴을 본 나는 가슴속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세현 형님. 시간 괜찮습니까?”
“당연히 괜찮지. 들어와.”
“근처 지나가다가 형님 보고 가려고 잠깐 들렀습니다. 형님 마시라고 커피도 사 왔어요.”
사무실로 들어온 이가 커피 트레이를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는 얼음과 함께 새까만 아메리카노가 담겨 있었다.
“근데… 먼저 온 손님입니까?”
“아, 이쪽은…….”
난감한 듯 잠시 망설이던 권세현이 곧이어 설명했다.
“내가 따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야. 이름은 한이결.”
“세현 형님이 따로 알고 지내는 분이 계셨습니까? 신기하네요. 아무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상대가 내게 악수를 청해 왔다. 거칠고 커다란 손, 회색 정장, 각진 어깨와 오른쪽 눈썹 끝에 새겨진 베인 흉터.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인사에 답했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박석재. 드디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