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63. 각자의 사정
“이, 이사님.”
뒤늦게 유시혁의 등장을 본 고동주가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나를 제 몸으로 가렸다.
“오셨습니까? 그게, 이건…….”
“고동주.”
“예?”
유시혁이 턱을 까딱였다. 성가시게 하지 말고 알아서 비키라는 뜻이었다. 의미를 곧바로 이해한 고동주가 잠시간 머뭇거린 끝에 조심히 내게서 비켜섰다.
쿵쿵, 귓가에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에 옅은 현기증이 일었다. 제멋대로 덜덜 떨리는 손에 겨우 힘을 주며 생각했다.
‘저건 가짜다.’
입 안을 강하게 짓씹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거칠었던 숨소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저건 가짜야…….’
진짜가 아니야. 진짜는 이제 없어.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나는 밀려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권세현일 때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아무 감정도 없는 은회색 눈동자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한겨울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등줄기에 오한이 일었다.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던 유시혁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뼈가 도드라진 길고 새하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검은 담배에 수행원이 불을 붙여 주고 뒤로 물러섰다.
“만나러 온 놈은 안 보이고, 참…….”
심드렁한 어조로 중얼거린 유시혁이 연기를 훅 내뿜어 냈다.
“고동주. 상황 설명해.”
“아, 예! 그…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누가.”
“경성…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추측?”
픽 웃은 유시혁이 다시 한번 담배를 볼이 패도록 깊게 빨아들였다.
“깡패 새끼 다 됐네, 고동주. 추측 하나로 가게 찾아온 사람을 이렇게 다 죄 패 놓고.”
“……죄송합니다.”
“권세현이 그러라고 시켰나?”
유시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 끝났다.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다른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아파졌다.
‘이럴 것 같아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권세현의 이름은 반드시 숨겨야 할 정보 중 하나였다. 권세현 본인만 입단속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 아닙니다, 이사님.”
“그럼 네가 말해 볼래?”
“읏……!”
유시혁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아 낸 나는 등 너머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알아챘다.
‘멈춰!’
안 돼. 이 사람만큼은 절대 공격할 수 없다.
머리카락이 잡힌 채로 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달려오려던 하태헌과 김우진, 박건호, 우서혁이 내 눈빛을 알아채고 즉시 행동을 멈췄다.
“흠.”
내가 아무 소리 없이 얌전히 잡혀 있자 유시혁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기색을 품고 올라갔다.
“이, 이사님. 이 녀석은 아무 상관 없는 신입이라…….”
“하하, 아무 상관 없는 신입이라…. 권세현이 그렇게 말했나 봐?”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흘린 유시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래, 뭐… 세현이가 그렇다면야. 그럼 우리 신입이 대신 설명 좀 해 볼까?”
두피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바늘이 되어 신경을 쿡쿡 찔렀다. 실수라도 미간을 구기지 않도록 애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설명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 우리 세현이가 애새끼 교육 하나는 제법 잘 시켰네.”
“…….”
“네 주인이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라고 하던가?”
이어지는 말에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거짓을 답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고동주가 아닌 내 판단으로 경성을 처리했다는 것을 유시혁은 이미 눈치챈 게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삼켜 내며 말했다.
“경성과 대치 중에 이사님의 방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맞이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경성이라 판단한 근거는?”
“경성 소속으로 알려진 실장이라는 남자와 팔 안쪽에 새겨진 문신을 확인했습니다. 경성이 아닐 확률은 없습니다.”
내 대답을 끝까지 들은 유시혁이 싱긋 미소 지었다.
“완벽한 대답이네. 거슬릴 정도로.”
이마에 맺혀 있던 차가운 식은땀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가는 것을 느낀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눈가를 좁혔다. 그때였다.
“이사님.”
헉, 가쁜 숨을 내뱉으며 홀로 빠르게 뛰어 들어오는 권세현이 보였다. 그의 뒤로는 미간을 찌푸린 천사연도 함께였다.
“안녕, 세현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따져 물으면 내가 너무 슬픈데.”
유시혁이 담뱃재를 툭 털며 내 머리를 밀치듯 놓았다. 힘에 밀려 비틀거리는 내 팔을 잡은 권세현이 다급히 제 등 뒤로 보냈다. 권세현에게 가려져 유시혁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제 직원입니다. 왜 함부로…….”
“응, 그래 보이더라.”
미소를 띤 낯으로 말을 끊어 낸 유시혁이 반절 정도 남은 담배를 권세현의 어깨에 꾹 누르고 비볐다. 칙, 검은 정장에 회색빛 담뱃재가 묻어났다.
“싸우는 방식부터 말버릇까지 아주 너랑 똑같이 가르쳐 놨던데. 대단해, 그 짧은 사이에.”
그 얘기에 권세현이 힐끔 내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제가 이곳에는 다신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잖습니까.”
“하…….”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짜증스러운 웃음을 지은 유시혁이 수행원을 향해 구겨진 담배를 던지듯 버리며 이죽거렸다.
“말 한번 참 좆같이 하네, 우리 세현이는.”
“…….”
“나와. 차 대기시켜 놨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선 유시혁은 수행원을 이끌고 가게를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떨리는 숨을 깊게 내뱉은 권세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늦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별일 없었습니까?”
내 물음에 잠시 천사연을 보던 권세현이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규태식은 바로 병원으로 보냈어.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천사연을 보낸 거, 너 맞지?”
“네. 큰 문제 없었다면 다행입니다.”
“여기 상황은?”
“경성에서 습격을 왔습니다. 원래는 내일 왔어야 하는 건데… 이건 저도 짐작조차 못 했던 부분이에요. 그래도 어느 정도 처리는 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기절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실장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실장은 잡아 놨습니다. 나머지는 일부러 풀어 줬고요.”
“잘했네. 실장 한 놈이면 충분해. 하필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경성이 만들어 낸 상황이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실장을 잡았으니 우리 쪽도 꽤 이득입니다.”
“그건 그렇지…. 오늘은 영업 안 할 테니까 이만 돌아가서 쉬고 내일 와. 뒷정리는 내가 다녀와서 할 테니.”
상체를 다시 세운 권세현이 바싹 긴장한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동주에게 명령했다.
“애들이랑 홀 정리해. 잠깐 다녀올 테니까. 신입들은 이만 퇴근시켜.”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내일 보자.”
내 어깨를 힘주어 잠깐 잡았다가 놓은 권세현은 바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유시혁과 오해를 풀어야 하니 아마 금방 돌아오지는 못할 거다.
측은한 마음은 딱히 들지 않았다. 나 또한 꽤 난감한 상황이었으니까.
“정리부터 마저 하죠. 실장 빼고 나머지 놈들은 대충 밖에 던져두고 다친 직원들은 바로 병원에 다녀오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러는 게 좋겠다. 그… 너는 괜찮은 거냐?”
“당연히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나 참… 형님 말씀이 맞네. 넌 퇴근하는 게 낫겄다.”
복잡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던 고동주가 의미 불명한 숨을 깊게 푹 내쉬더니 직원들에게 외쳤다.
“몸 멀쩡한 놈들은 홀 정리를 돕고 다친 놈들은 퍼뜩 병원 다녀와라. 한 명은 규태식한테 괜찮냐고 전화해 보고.”
고동주가 실장의 옆구리를 무성의하게 구둣발로 퍽 치며 이어 말했다.
“이 새끼만 잘 묶어서 지하실에 던져 놔. 이따 형님 돌아오시면 어떻게 처리할지 정해 주실 테니까.”
“네!”
유시혁의 등장으로 바짝 굳어 있던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한 시간 정도 뒤면 무너진 테이블이나 술병들도 모두 깨끗하게 치워질 것이다.
한시름 놓은 나는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모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그걸 보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유시혁이 가게에 왔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마주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누군가 따듯한 손으로 손목을 잡아 왔다.
“한이결.”
놀라서 고개를 드니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김우진이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어?”
“이제 가까이 가도 돼?”
예상치 못한 말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이번에는 옆에서 이마를 가볍게 쓸어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행히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군.”
곁에 다가온 하태헌이 하는 말에 뒤따라온 박건호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남의 집 귀한 애 머리채를 그렇게 험하게 잡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영업을 안 한다고 했으니 이대로 다 같이 호텔로 돌아가는 게 좋아 보입니다.”
“이결 씨! 다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형, 비서님 말대로 이만 호텔로 가요. 에드워드 씨도 있으니까.”
피이익, 픽!
어느새 모두 내 주변에 모여들어 한 마디씩 떠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간다고? 당황한 내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그때였다.
볼과 눈꼬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매만진 천사연이 평소와 같이 얘기했다.
“쉬러 가자, 한이결.”
“…….”
그 말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마치 나비 수백 마리가 가슴속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우면서도 울렁거리는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감정을 겨우 삼켜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