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48)화 (248/394)

248화

“한이결.”

“…….”

불안정한 내 상태를 알아챈 하태헌이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 왔지만,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지금…….’

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나는 당황한 고동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경성부터 해결하죠. 본사에서 사람이 오기 전에 정리해야 합니다.”

“뭐? 아, 그, 그래.”

“최대한 빨리 사장님께 여기 상황부터 전달하고 문 앞에 오늘 영업 안 한다고 안내문 붙이세요.”

그 남자의 방문 사실을 전하러 왔던 직원이 내 말에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한시가 급한데 왜 얼 타고 있지? 짜증이 나서 말이 절로 날카롭게 나갔다.

“뭐 합니까? 못 들었어요? 상황 전달하라고.”

“아, 네! 알겠습니다.”

깜짝 놀란 직원이 급히 핸드폰을 들고 권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어서 뒷문이 거칠게 열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여럿 울렸다.

“어이고야, 여기 권 사장님 계십니까?”

몰려드는 남자 중 선두에 선 이가 입술을 길게 찢어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화려한 꽃무늬의 매끈한 셔츠를 입고 검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상대를 본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경성에서 실장이라고 불리는 놈으로, 만만하게 봐선 안 될 상대 중 하나였다.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팔 안쪽에는 경성 소속을 뜻하는 경(硬)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실장을 마주한 고동주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험악해졌다. 고동주가 경성에서 가장 싫어하는 이가 바로 저 실장이었다.

“이 십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발을 들이밀어?”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나? 말 참 섭섭하게 하시네잉.”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껄렁거리며 걸어온 실장이 홀을 한번 둘러보더니 픽 비웃음을 지었다.

“시팔, 여기 꼬라지는 무슨… 우리 권 사장님은 이제 남자도 팔아먹으려고 하나?”

“개짓거리 그만하고 퍼뜩 꺼져라. 엉?”

호출을 전해 들은 직원들이 굳은 얼굴을 하고 홀로 모여들었다. 고동주와 실장을 선두로 서른이 넘는 사내들이 홀에 가득 찼다. 고동주의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본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우리도 어느 정도 나서야 정리가 빠르겠는데.’

다른 때라면 굳이 나서지 않았겠지만, 그 남자가 오고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최대한 빨리 경성을 처리한 다음에 모두를 데리고 가게를 빠져나가야겠다. 그 남자를 마주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하이고, 형님. 성격도 급하셔라. 말 좀 들어 보지?”

실장이 손짓하자 뒤에서 얼굴이 멍으로 퉁퉁 부어오른 남자가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이 녀석이 댁네 애들한테 아주 제대로 깨져서 돌아왔더라고? 처맞고 온 이 새끼가 불쌍하지도 않아? 응?”

“지금 뭐라 지껄이는 거냐?”

“곱게 CCTV라도 보여 달라는 거다. 뒤에 애새끼들은 치우고.”

뻔뻔한 요구에 고동주의 굵은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리며 이마에 혈관이 치솟았다. 나는 실장에게 붙들려 공포 어린 표정으로 바싹 굳어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이게 뭔 쌍팔년도 수법이야…….’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저딴 영양가 없는 헛소리 들어 줄 여유 없다. 나는 벌써 5분이 훌쩍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냥 치워 버리죠. 더 질질 끌 시간 없습니다.”

“뭐? 야, 인마. 쪼그만 놈. 넌 왜 자꾸…….”

“그럼 뭐 어쩌실 겁니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

고동주를 믿고 가게를 맡겼는데 고작 저딴 놈들 하나에 이 정도로 휘둘릴 줄은 몰랐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고동주를 힐책했다.

“지금 경성 저 새끼들이 문제 같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가게 정리할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어디로 머리 굴립니까.”

“그건…….”

“쓰레기부터 치워 버리고 생각하자고요. 실장은 지하에 던져둬야 하니까 최대한 잡아 두고 나머지는 도망쳐도 상관없습니다.”

“…….”

미간을 찌푸린 고동주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에 서 있는 직원들에게 턱짓했다. 주위를 둘러싼 분위기가 순식간에 혈기로 끓어올랐다.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 우리를 본 실장이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참… 형님요, 후회할 짓은 하지 맙시다? 뭔 깡으로 고놈들 갖고 덤비는 거요?”

확실히 직원들로는 이기기 힘들었다. 상대는 아예 계획을 하고 들이닥친 상태라 품에 무슨 무기를 지니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저러다가 갑자기 칼을 꺼내 들어 휘둘러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우리는 수도 훨씬 적고 권세현도 없는 상황. 심지어 그 남자가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 시간까지 촉박했다.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김우진, 좀 도와줘. 우서혁 씨랑 팀장님도요.”

아무리 경성이라 해도 일반인은 맞으니 SS급인 천사연과 하태헌은 제외했다.

내 곁에 서서 나만 바라보고 있던 김우진과 흥미롭게 사태를 관전하던 박건호, 조용히 서 있던 우서혁이 내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우리가 끼어도 되는 건가?”

“네. 죽이지는 말고 기절만 시키세요. 도망치면 굳이 쫓을 필요는 없고.”

내 얘기에 세 명 다 별말 없이 앞으로 나섰다. 김우진은 그렇다 쳐도 박건호와 우서혁이 순순히 도와주다니. 이유야 모르겠지만 고맙긴 하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의 길드원은 참 잘도 부려 먹는군.”

“이 정도는 눈감아 주시죠.”

천사연의 장난을 대충 쳐 내며 권정한에게 눈짓을 보냈다. 의미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권정한이 민아린과 에드워드를 데리고 바 뒤로 숨었다. 그것과 동시에 다이스 직원과 경성이 격돌했다.

순식간에 싸움터로 변한 1층 홀은 욕설과 고함과 함께 무언가 부딪히고 넘어지고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내 예상대로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경성은 대부분이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은 직원에게 미처 제대로 휘둘러 보기도 전에 김우진과 박건호, 우서혁에게 얻어맞고 그대로 뻗었다.

“씨팔, 뭐야? 이 새끼들이, 잘 좀 해 봐!”

자기네 애들이 뭘 해 보기도 전에 픽픽 쓰러지자 실장이 당황스러운 낯으로 고함쳤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라 새삼 놀라운 것도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게 더 급했으니 나는 양옆에 서 있는 하태헌과 천사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태헌 씨. 바 근처에 있는 세 명 지켜 주실 수 있습니까?”

여우가 곁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저들만 두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러지.”

“네. 상황이 정리되면 바로 호텔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천사연 마스터.”

과연 이걸 말해도 될지 고민했지만, 안전이 달린 일에 더 망설여 봤자 의미가 없었다. 마음을 굳힌 나는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나가자마자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서 쭉 가다가 세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낡은 모텔 건물이 나올 겁니다. 그 근처에 가게 주인이 있을 거예요. 아까 연락을 했으니 가는 길에 만나실 수도 있고요.”

차분히 내 얘기를 듣던 천사연이 눈가를 좁혔다.

“그 사람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가서 지켜 주세요. 경성에서 인원을 둘로 나눴을 수도 있으니까.”

“흠, 나보고 그 사람에게로 가라?”

“…그럼 뭐 어떻게 합니까? 여긴 괜찮으니 빨리 다녀오세요.”

가뜩이나 급한데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있네. 진지하게 재촉하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쉰 천사연이 섭섭하다는 기색으로 답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다른 사람이나 찾아가라고 등을 떠미니… 이것 참, 서운하군.”

“당장 꺼지세요.”

개소리를 가차 없이 쳐 내자 어깨를 으쓱인 천사연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평소에는 권세현 옆에 그렇게나 붙어 있더니 오늘따라 진짜 이상하네.

그래도 천사연을 보냈으니 더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한시름 놓은 나는 고개를 돌려 홀 상황을 확인했다. 그 짧은 새에 싸움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 있었다.

간만에 몸을 움직인 김우진과 박건호, 우서혁은 나름 개운하다는 기색이었다. 게이트를 돌며 몬스터와 싸워 오던 저 세 명에게 이런 싸움은 아침 조깅만도 못하겠지만.

“끄으윽…….”

“으으…….”

저마다 신체 한 부위씩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경성에 비해 우리 직원들은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몇 명이 도망쳤는지 본 놈 있냐?”

“저는 세 명 정도 놓쳤습니다.”

“저는 두 명이요.”

“쯧, 일단 남은 놈들이라도 다 묶어. 실장 이 새끼는…….”

“아뇨.”

나는 경성 소속자들을 묶어 두려는 고동주를 막았다.

“실장 빼고 나머지는 다 보내요.”

“그래도 곧 도착할 형님께 보여야 하지 않냐?”

“사장님이 오기 전에 본사에서 먼저 도착할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줘 봤자 사장님께 도움 될 리도 없고, 이놈들은 어차피 말단이라서 쓸모도 없어요. 실장만 잡아 두면 됩니다.”

내 설명에 고동주가 찝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직원들에게 명령했다.

“대충 밖에 던져 버려. 알아서 꺼지겠지. 그리고 형님한테 연락 온 거 있는지…….”

“한이결!”

고동주의 말을 끊고 김우진이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 순간, 등 뒤에서부터 서늘한 감각이 확 퍼졌다.

“시발 새끼들!”

고개를 돌리자마자 양손으로 잭나이프를 쥔 채로 내게 달려오는 실장이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동주를 밀치며 몸을 실장을 향해서 정면으로 돌렸다.

가게 조명에 잭나이프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나는 침착하게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잭나이프를 쥔 손을 강하게 후려쳤다.

“크윽!”

실장이 놓친 잭나이프가 바닥을 뒹굴었다. 당황한 그의 멱살을 낚아채서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은 후, 가까운 테이블에 얼굴을 그대로 처박았다.

빠악, 머리가 깨진 실장이 기절한 채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아 묶어 놓고 지하실에 던져두면 충분할 것이다. 이따 권세현이 돌아와서 살펴보겠지.

“동주 형님, 이놈…….”

묶어 놓으라고 말하려던 나는 코끝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향을 알아챘다. 담배와는 미묘하게 다른 향. 그걸 깨닫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확 끼치며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닫혀 있던 정문이 열리며 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려온다. 차갑게 식은 주먹을 움켜쥐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고동주.”

낮고 부드러운 음성. 매끈히 빛나는 새까만 구두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전등 빛에 환하게 빛나는 백금발 아래로 드러난 수려한 얼굴. 흉터 가득한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던 남자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려 웃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수행원 두 명을 뒤에 거느린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정확히 나를 응시하는 은회색 눈동자에 목이 조이는 것처럼 숨이 절로 거칠어졌다.

남자, 유시혁.

내가 오랜 시간 동안 곁을 지켰던… 유일한 사람.

그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