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바에 서서 잔을 진열하며 오픈 준비를 하던 우서혁은 2층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 붙지 마. 붙지 말라니까?”
“뭐 얼마나 붙었다고 그러는 건지.”
티격태격하며 1층 홀로 내려오는 두 사람은 예상대로 한이결과 천사연이었다. 제 딴에는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천사연에게 반말을 속삭이는 한이결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해진 채로 혼자 계단을 내려오던 저번 주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짜증스러운 말투와 달리 표정은 밝은 것을 보면 기분이 제법 괜찮다는 게 느껴졌다.
“…….”
그리고 그걸 보던 우서혁은 한이결과 반대로 제 기분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눈을 느리게 두어 번 깜빡였다.
우서혁은 이 사실이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대체 어째서?
잔뜩 지친 기색으로 자신이 만든 칵테일을 마시는 한이결을 걱정했다. 그 뒤에는 천사연과 서먹하게 구는 행동을 보고 원인이 제 상사임을 확신했다.
둘 사이 문제이니 굳이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원만히 해결되어 한이결의 기분이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바라는 대로 됐는데 왜 이렇게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인가. 우서혁의 반듯한 미간이 아주 짧은 순간 스치듯 찌푸려졌다가 돌아왔다.
‘이건… 좋지 않다.’
우서혁은 자연스럽게 제 안에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되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서혁 씨.”
영문 모를 마음을 들키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숨겨 버린 우서혁이 보통 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바 테이블로 다가온 한이결이 천진하게 물었다.
“뭐 도와드릴 거 없습니까? 저 청소하라고 쫓겨나서요.”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바닥이라도 쓸어야겠네.”
제 허리로 슬금슬금 올라오는 천사연의 손을 매섭게 쳐 낸 한이결이 청소기를 가지러 청소함으로 향했다. 천사연은 그를 뒤쫓아 가지 않고 바 의자에 앉았다.
팔짱을 낀 채로 한이결의 등을 응시하던 천사연이 눈을 접으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장난치려고 준비하는 고양이 같았다.
여태껏 권세현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더니 왜 갑자기 한이결로 목표를 변경한 건지 모르겠다. 천사연이 변덕스러운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지만…….
‘또 한이결 씨만 고생하겠군…….’
자신은 그저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아무리 기분이 나빠진다 해도.
한이결이 청소기를 드르륵 끌며 홀로 나오던 그때였다. 권세현이 1층으로 다급하게 내려왔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고동주, 와 봐.”
“형님?”
심상치 않은 권세현의 목소리에 고동주가 한걸음에 달려갔다.
평온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걸 예민하게 알아챈 한이결이 청소기를 던져두고 권세현에게로 걸어갔다.
“직접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올 테니까 가게 좀 맡아라.”
“하지만 형님, 혼자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애들이라도 데려가는 게 안전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 낮춰 대화하는 권세현과 고동주 사이로 한이결이 불쑥 끼어들었다.
“뭐야? 쪼그만 놈, 네가 끼어들…….”
“고동주, 그만. 한이결은 괜찮아.”
한이결에게 한 소리를 하려는 고동주를 막아선 것은 권세현이었다. 설마 허락할 줄 몰랐는지 잔뜩 당황한 고동주를 내버려 두고 권세현이 한이결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줬다.
“모텔로 감시를 보낸 녀석이 와 달라는 요청 메시지를 보내왔어.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니 바로 가 봐야 해.”
“누구를 보낸 겁니까?”
“규태식.”
권세현의 말을 듣고 잠시간 입가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한이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그래도 혼자 가시는 거면 깊게 들어가지는 말고요.”
“설마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덧붙인 말에 픽 웃은 권세현이 빠르게 가게를 떠나갔다. 입을 떡 벌린 채로 구경만 하던 고동주가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너, 너… 쪼그만 놈! 너 정체가 뭐냐? 진짜 형님의 잃어버린 동생이냐?”
“우리 동주 형님 또 헛소리하시네.”
“형님이라고 부르지 마, 인마! 그럼 대체 뭐야? 우리 형님이 왜 널 이렇게 믿는 거냐고?”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이고, 두야.”
장난치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한이결의 행동에 고동주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조용히 그걸 바라보던 우서혁이 고동주와 떠드는 한이결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 낮춰 질문했다.
“마스터. 한이결 씨 말입니다.”
“말해.”
“여기 가게 주인과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래 보이긴 하지.”
“내버려 둬도 괜찮겠습니까?”
“나도 짐작 가는 부분이 없으니 일단은 두고 보는 게 낫겠군.”
느긋한 천사연의 반응에 잠시 머뭇거리던 우서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다가 며칠 전처럼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흐음.”
바 테이블에 턱을 괸 천사연이 묘한 미소를 달고서 우서혁에게 시선을 줬다.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군. 한이결 능력자가.”
“…병원을 갈 수 없는 상황이니 스트레스받을 요소는 줄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나? 한이결 능력자가 순순히 대답해 줄지는 모르겠다만.”
“…….”
확실히 그건 그렇지. 일단 숨기고 보는 한이결의 성격을 우서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천사연에게는 어느 정도 솔직해지지 않던가. 그래서 말이라도 꺼내 본 건데, 잘못 짚은 모양이다. 씁쓸한 입 안을 느끼며 우서혁은 한숨을 삼켜 냈다.
***
권세현이 가게를 떠나간 지 40분 정도가 흘렀다. 모텔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다른 문제가 없다면 지금쯤 규태식을 만나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가게 오픈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0분. 청소와 정리도 끝냈으니 평소처럼 영업하며 권세현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가슴에 손을 올리자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권세현에게 모텔 위치를 알려 줘서 그런 건가? 경성의 은신처를 알아내고, 그곳에 직원을 보낸 이후부터는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미래였다.
그래서 권세현에게 알려 주는 게 과연 맞는 선택인지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 끝이 죽음이라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시도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쨌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되돌릴 수도 없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권세현이 규태식과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청소기를 치우고 돌아오자 고동주가 안절부절못하며 홀 중앙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나보다 배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동주 형님.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계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을 혼자 보냈으면 안 됐던 것 같다. 내가 따라가야 했는데.”
권세현이 정말로 걱정되는지 고동주가 이번에는 ‘형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따위의 태클을 걸지 않고 제 속마음을 털어놨다.
“동주 형님까지 없으면 가게는 누가 보고요? 사장님이 동주 형님을 믿고 가신 거잖아요.”
“크흠.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가볍게 위로하자 고동주가 헤벌쭉 웃었다. 쉽다, 쉬워. 그렇게 고동주의 등을 두드리는데, 친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결 씨!”
“한이결.”
놀라서 돌아보자 민아린과 에드워드가 가게 문 앞에서 내게 손 인사를 보내왔다. 그 뒤로는 오늘 일을 쉬는 하태헌과 김우진, 박건호도 함께였다.
“다들 여긴 어떻게…….”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민아린이 에드워드와 함께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가게 안을 기웃거리며 살폈다. 피익, 민아린의 어깨 근처에서 여우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투명화를 한 상태로 따라왔구나.
그러고 보면 이 둘은 다이스를 와 보는 게 이번이 두 번째인가. 처음 공간에 도착했을 때는 워낙에 정신이 없던 데다 바로 쫓겨났으니 제대로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거다.
나와 마찬가지로 민아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천사연과 권정한이 다가왔다.
“다 같이 출구를 살펴보고 오는 길인가 보군.”
“어제와 뭐 달라진 점이 있던가요?”
권정한의 말에 에드워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런가.
“뭐야, 쪼끄만 놈. 네 친구냐? 뒤에 있는 놈들은 신입이고.”
“안녕하세요.”
불쑥 나타난 커다란 덩치의 고동주를 본 민아린이 미소와 함께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놀랄 만도 한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니. 대단하다.
“흠흠, 인사성이 아주 밝은 아가씨구만.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와, 그래도 되나요?”
“그래. 술을 파는 가게라 오래는 못 있겠지만. 크흠.”
민아린의 웃음 한 번에 무장 해제 된 고동주가 자꾸만 헛기침하며 문을 활짝 열어 줬다. 그러고는 짜게 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쪼끄만 놈, 여자 친구냐?”
“예? 누가… 설마 민아린 씨요?”
“이름도 예쁘고만.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무슨 오해를… 그런 사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하긴! 우리 와이프도 저렇게 곱고 예뻐. 성격도 좋고. 하긴… 나 같은 놈이랑 결혼해 줄 정돈데 천사 중에 천사지.”
“아, 예.”
권세현의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고동주가 아내 자랑을 읊기 시작했다. 그걸 무시하며 와인 바를 구경하고 있는 에드워드에게 다가갔다.
“출구 외에 별다른 사항은 없었습니까?”
“네. 아무 문제 없었어요.”
에드워드가 내게 대답하며 홀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두 눈동자에 빛 무리가 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여기도 능력을 써서 봐 두려는 건가? 우리야 딱히 수상한 점은 찾지 못했지만, 에드워드의 능력이라면 뭔가 다른 걸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이결.”
“예?”
1층을 설렁설렁 돌아다니던 박건호가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가게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한데. 무슨 일 있었나?”
그걸 벌써 알아챘다고? 새삼 박건호의 빠른 눈치에 놀라며 적당한 답을 내놓았다.
“딱히 없었습니다. 가게 주인이 자리를 비우긴 했어요.”
“아, 그 관리자.”
“왜요?”
어쩐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박건호의 태도에 경계심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박건호는 일전에 클럽 사건을 통해 ‘권세현’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으니 조심해야 할 상대였다.
“아니, 그냥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길래. 그보다 힘들면 일 대신 해 줄까?”
“필요 없어요.”
다행히 아무 의미 없이 꺼낸 질문이었나 보다. 속으로 안도하며 한숨을 내쉰 그 순간이었다. 옆에 서 있던 하태헌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하태헌 씨?”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군.”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가게 뒷문이었다. 하태헌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직원 한 명이 지저분해진 옷차림에 코피를 흘리며 홀로 뛰어 들어왔다.
“혀, 형님! 동주 형님!”
“뭐야?”
“경성 이 새끼들이 뒷문으로 몰려왔어요!”
잔뜩 분한 목소리로 외친 말에 고동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경성이 벌써 왔다고?’
내일이 아니라 오늘 왔다니,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설마 권세현을 일부러 모텔로 불러들인 건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습격하기 위해?
‘가능성 있어.’
그러고 보면 오늘따라 유독 경성에서 고용한 놈들이 많이 보였지. 다 이유가 있던 건가.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걷어차서… 윽!”
직원은 코뼈가 부러졌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코피를 계속 흘리며 덧붙여 설명했다. 그 꼴을 본 고동주가 혀를 찼다.
“쯧, 애들 불러모으고 넌 바로 가서 치료받아. 그리고…….”
“동주 형님!”
고동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2층에 있던 다른 직원이 핸드폰을 든 채로 황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본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 지금 가게로 오고 계시다고…….”
“뭐? 본사에서?”
“……!”
일순간 호흡이 끊겼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서늘한 감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직원이 말하는 ‘본사’가 뜻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그 남자가…….’
오고 있다. 지금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