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감기가 어느 정도 낫고, 다시 일을 나가게 된 지 사흘이 지났다. 이른 아침에 퇴근하고 호텔로 돌아오자 웬일로 깨어 있던 에드워드가 내게 다가왔다.
“한이결 씨, 함께 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괜찮으세요?”
“그럼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을 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매일같이 호텔 밖을 살피고 있는 에드워드가 괜한 요청을 할 리가 없었다.
“다른 분들도 괜찮으신가요?”
“새 단서를 찾은 모양이군.”
“네! 이번에는 제법 큰 단서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에드워드가 두 주먹을 꾹 쥐며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회색 선을 발견했을 때도 이 정도로 기뻐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천사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흠, 그만큼 중요한 거라면 다 같이 가는 게 좋겠군.”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에드워드의 안내에 따라 호텔을 나섰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쳐다보네요.”
민아린의 말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 아침 출근길. 스쳐 지나가는 사람마다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인원이 9명이나 되는 데다 다들 외모가 범상치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번에는 에드워드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지만… 다음부터는 절대 몰려다니면 안 되겠다.’
아무리 만들어진 공간이고 저 사람들도 다 가짜라지만 너무 부담스러웠다. 김우진도 비슷한 기분인지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여기예요.”
다행히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가리킨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뭐지?”
횡단보도 건너편, 평범한 거리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타원형의 빛 무리가 보였다. 게이트 입구와 아주 흡사한 생김새에 당황한 내가 물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계속 저 장소에 있는 겁니까?”
“네.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아요.”
그제야 나는 주변에 있는 일반인이 아무도 저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심지어 아예 뚫고 지나다니기도 했다.
저건 마치 환상이나 연기처럼 일렁거리며 계속 그 자리 그대로 떠 있었다.
“혹시 몰라서 건드려 봤지만, 손이 그대로 통과하더군.”
일을 쉬는 대신 에드워드를 도와 밖으로 정찰을 다녀왔던 하태헌이 덧붙여 설명했다. 눈에 보이지만 만질 수 없다니…….
“가까이 가 보죠.”
초록 불로 변한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처음 느껴 보는 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피이익, 픽!
투명화한 상태로 내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여우가 파르르 떨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게이트 입구랑 정말 비슷한데.’
검푸른 빛이 가득 차 있는 게이트 입구와 달리 이건 그저 새까만 검은색일 뿐이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은 모두 동일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하태헌의 말처럼 손은 아무것도 만지지 못하고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천사연과 민아린도 나와 같았다.
“혹시 이것도 공간이 만들어 낸 가짜… 그런 겁니까?”
내 질문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진짜 맞아요. 이게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예요.”
유일한 출구라고? 이게?
“그저 출구의 기능이 발동되지 않았을 뿐이에요.”
“조건을 채워서 발동을 시켜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죠. 그 조건만 알아낸다면 바로 나갈 수 있어요.”
“이번에도 선을 찾아야 하는 건가요?”
“아직 확실치 않긴 한데… 발동 조건에 선은 별로 관련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입가를 매만지며 열리지 않은 출구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에드워드가 능력으로 호텔에서 ‘회색 선’을 찾아냈고, 그 선을 따라와 보니 출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제는 출구를 발동할 ‘조건’을 찾아야 한다.
“조건이라는 게 선보다 찾기 어려운 겁니까?”
“으음… 글쎄요. 일단 시간을 들여서 출구를 살펴봐야 하는 건 확실해요. 그래도 처음 선을 찾을 때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쁘지 않군요.”
우리가 이 공간에 들어온 지 15일이 되어 간다. 나가기 위해서는 한 달이 걸릴 것 같다는 초반과 달리 15일 만에 마지막 단서인 출구까지 찾아냈으니 속도가 굉장히 빠른 건 사실이었다. 그만큼 에드워드와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는 거고.
“에디가 매일 이곳을 와야 할 테니, 최소한 두 명씩 호위하도록 하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출구를 응시하던 천사연이 우리에게 명령했다. 나는 그런 천사연에게서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가지 않아 이 공간을 나갈 수 있다. 그건 곧 권세현과의 이별을 뜻했다.
***
출구를 확인한 그날 저녁. 천사연, 우서혁, 권정한과 함께 다이스로 향하던 나는 묘하게 낯익은 남자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경성에서 고용한 놈인가.’
아무 용건도 없으면서 괜히 주변을 맴돌고 다이스에서 일하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오는 것까지. 경성 관련자가 확실했다.
“경성…이라고 했던가요? 본격적으로 자리싸움을 하려는가 보네요.”
얼마나 허술한지, 천사연과 우서혁은 물론이고 권정한까지 알아챌 정도였다. 나와 같은 것을 본 권정한이 하는 말을 들으며 혀를 찼다.
심증과 물증이 넘쳐 나지만, 녀석들을 잡아내거나 쫓아낼 구실은 없다. 우리가 먼저 건드려 봤자 손해만 볼 게 뻔했다.
그래도 보고 정도는 해야겠지. 어쨌든 뭐… 난 지금 권세현에게 고용된 몸이니까.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곧장 3층으로 올라간 나는 권세현을 향해 인사 대신 본론부터 꺼냈다.
“감시하는 숫자가 어제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제가 출근하면서 눈으로 본 것만 2명이네요.”
내 태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권세현은 날 보지도 않고 서류를 넘기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어, 그래. 좋은 아침.”
“지금이 무슨 아침입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지? 어째 경성 관련 문제로 내가 더 안달을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설마, 아니겠지.
“모텔로 직원은 보냈습니까?”
“보냈어.”
“누구 보냈는데요?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서…….”
“한이결, 나가. 내려가서 청소나 도와.”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쫓겨난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다 자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쫓아내? 남은 기껏 험한 꼴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려고 하는데.
‘공간이 사라지기 전에 조금은 협조해 주려고 했더니…….’
출구를 발견해서 좋아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딱히 권세현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무리 가짜라도 다이스가 경성에 넘어가는 꼴을 보기 싫었다.
당장 쳐들어가서 권세현을 두드려 패고 정신을 차리게 해 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였다. 3층으로 올라온 천사연이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살짝 웃었다. 반대로 내 미간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출근 도장을 찍네, 아주.’
천사연은 다이스에 올 때면 하루에 몇 번이고 권세현을 찾아갔다. 그것도 권세현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만 골라서. 그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대체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길래…….’
거기까지 떠올리던 나는 급히 생각을 끊어 냈다. 됐다. 신경 써 봐야 나만 스트레스지.
시선을 맞춰 오는 천사연의 눈길을 피하며 옆을 지나쳐 가려는데, 서늘한 손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거지?”
“알 바냐? 놔.”
뿌리치려고 힘을 줬지만 잡힌 손목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힘 차이.
“한이결, 나 봐.”
천사연이 반대편 손으로 볼을 쓸어 왔다. 고개를 틀어서 그 손길을 피했다.
“이거부터 놓고 말해.”
“보면 놓을 테니까, 제발 나 좀 봐.”
그의 입에서 나온 ‘제발’이라는 단어에 가슴속이 태풍이라도 몰아치듯이 일렁거렸다.
입술을 깨무는 내 얼굴로 다시 한번 손이 닿아 왔다. 그 손을 따라서 지금껏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
권세현을 만나러 가는 천사연을 처음 막아섰을 때. 그때 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게 된 천사연의 얼굴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뻔뻔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은 무참히 깨졌다. 어딘가 서글픈 감정이 담긴 검은 눈동자와 입가가 살짝 굳은 채로 쓰게 웃고 있는 천사연의 표정을 본 나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화는 좀 풀렸나?”
“…화난 적 없는데.”
“나를 그렇게 피해 놓고?”
“그건 그냥 좀… 불편해서 그런 거고.”
변명처럼 들렸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화를 내다니, 내가 대체 무슨 권리로.
권세현과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건 천사연의 마음이니 내가 끼어들어서 화를 낼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그럼 그 불편한 감정은 좀 풀렸나?”
“풀리겠냐? 지금도 이딴 짓을 하는데?”
바로 앞에 사무실이 있어서 큰 소리를 내면 권세현이나 다른 사람이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천사연이 하듯이 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대답하자 그가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그대로 내버려 뒀다간 한참을 더 그럴 것 같아서.”
“…….”
그렇게 말하는 천사연의 목소리는 제법 쓸쓸해 보였다. 그걸 들으니 나도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긴, 천사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황스러울 만도 하다. 예전부터 해 오던 가벼운 장난에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뒤로는 대놓고 피했으니까.
‘천사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길 빠져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겨우 정리한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았어. 이제 안 그럴 테니까 손 놔.”
“진심인가?”
“거짓말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흠, 그건 그렇지.”
순순히 동의한 천사연이 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엄지손가락이 눈꼬리를 짓누르듯 쓸며 볼을 지나 귀로 향했다.
그대로 귓바퀴를 따라 둥글게 움직인 천사연의 손이 아래에 있는 귓불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오싹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읏, 무슨…….”
귀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자 천사연이 이번에는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손가락끼리 깊게 엉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떨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느릿하고 선명하게 지나갔다. 그걸 깨닫자 얼굴로 뜨거운 열이 확 치솟았다.
일부러 이런 게 틀림없었다. 진짜 미친놈인가? 나는 천사연에게서 등을 돌려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뭐, 뭐야?”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하나 더 들려왔다.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천사연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따라와?”
“음?”
싱글싱글 웃으며 내게 바싹 붙어서 내려오던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따라오냐니. 무슨 뜻이지?”
“사무실에 용건이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 처음부터 널 만나러 간 거였는데.”
“…….”
겨우 조금 사그라들었던 열이 또다시 화르르 타올랐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늘어놓으며 손으로 뜨끈한 얼굴을 가렸다.
쿵쿵거리며 계단을 거칠게 내려가는 내 발소리 뒤로 천사연의 경쾌한 발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