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44)화 (244/394)

244화

  

이틀을 쉬고 사흘째에 나타난 나를 본 권세현은 짧게 한마디 했다.

“생긴 거 보면 더 쉬어야 할 것 같은데.”

“…….”

병원까지 입에 올릴 정도로 나를 걱정했다기에는 지극히 담백한 반응이었다. 아니, 오히려 시비를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생긴 게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상태는 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좋아졌습니다.”

딱딱하게 대답하자 픽 웃은 권세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태도는 쓰러졌을 때보단 확실히 낫네. 그래도 오늘까진 무리하지 말고. 또 쓰러지면 해고할 거다.”

“돈도 안 주면서 해고는 무슨… 그보다 거래 내용이나 정리하죠. 어제 제가 안 와서 정보 하나를 못 들었지 않습니까.”

“아, 맞아.”

내 말에 그제야 거래를 떠올린 권세현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어떻게 그걸 잊습니까?”

“잊을 수도 있지. 이번에도 들어 봤자 쓸데없는 내용일 거고.”

“그건…….”

확실히 첫날 빼고는 대충 때우려고 고동주가 넘어진다거나 술이 부족해질 거라든가 그런 걸 말하긴 했지.

“이번에는 꽤 중요한 내용인데요?”

“그거참 기대되네. 이따 퇴근 전에 두 개 다 알려 주면 되겠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 봤지만 이미 내게 당할 대로 당한 권세현은 건성으로 듣고 넘겼다.

‘재수 없네, 저 녀석…….’

대놓고 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러면 누워서 침 뱉기니 기분만 찝찝할 거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짜증 나.

***

자정이 넘은 늦은 밤, 손님이 꽉 찬 홀에서 벗어나 옥상으로 향했다. 저번처럼 맥주 캔 하나라도 들고 가고 싶었지만… 민아린에게 경고도 들었으니 참는 게 좋을 것 같다.

천사연에게 간호를 맡긴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엄청나게 끔찍했다. 역시 민아린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뭐,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기도 하고…….’

내가 술 근처에만 다가가도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김우진을 떠올리며 옥상 난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상이 잠길 정도로 무섭게 내리치던 비는 그친 지 오래라 하늘은 검푸른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달을 올려다본 나는 난간에 걸터앉았다.

높지는 않지만 그나마 야경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다. 서늘함을 품은 바람을 맞으며 건너편에서 반짝이는 새하얀 불빛을 바라봤다.

그렇게 10분여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옥상 문이 열리며 예상 못 한 상대가 나타났다.

“팀장님.”

“여기 있었군.”

홀과 2층에서 번갈아 가며 쉬지 않고 서빙을 한 박건호는 살짝 피로한 기색으로 걸어왔다. 역시 S급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일을 이틀 연속으로 하는 것은 부담이긴 하구나.

“옥상은 처음 와 보는데, 시원하고 좋군. 아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좀 더웠는데.”

“가을 초반이니까 실내는 좀 덥긴 하죠.”

“나야 그렇다 치고. 한이결, 넌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지 않나? 이번에 또 감기에 걸리면 민아린 힐러한테 크게 혼날걸.”

“이 정도는 봐주시죠. 이미 술도 금지당했으니까.”

“술은 당연히 그만 마셔야 하는 거고.”

내 곁으로 다가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선 박건호가 팔짱을 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뭐겠어요. 그냥 야경이죠.”

“옥상에 꽤 자주 올라오는 것 같더군.”

“쉴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습니까?”

오늘따라 답지 않게 왜 이리 질문이 많지? 이상함을 느낀 나는 시선을 돌려 박건호를 바라봤다.

“왜 그러시는데요? 무슨 일 있어요?”

“대단한 건 아니고…….”

박건호가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평소에는 날카로운 질문도 툭툭 던지면서 뭐야?

“안 어울리니까 빨리 말하세요.”

“여태껏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 건지 알겠군.”

어딘가 허탈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은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마스터가 이 가게 주인과 사이가 제법 좋던데.”

“아아…….”

난 또 뭔가 했네. 망설일 만한 대화 주제이긴 했다.

“전에 한번 만난 사이라고 했으니까 친해질 수도 있죠.”

“그래 봤자 만들어진 가짜이지 않나.”

“상관없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알아낼 게 있다고 했으니 천사연 마스터도 뭔가 계획이 있는 거 아닐까 싶고요.”

내가 어쩌다 천사연의 옹호나 해 주고 앉아 있나 모르겠다. 원래 내가 의문을 제기하고 박건호가 편을 들어 주곤 했었는데.

그래서 천사연을 의심하는 박건호의 태도가 제법 의외였다. 이전부터 봐 온 박건호는 천사연이 무슨 짓을 하든 이유가 있을 거라며 믿어 주지 않았던가.

“혹시 천사연 마스터가 이곳에 과하게 몰입할까 봐 걱정되시는 겁니까?”

“아니. 내가 걱정하는 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쉰 박건호가 어색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가 아니라 너야, 한이결.”

“예?”

…잘못 들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요?”

“널 걱정하고 있다고.”

“저요? 갑자기요?”

“갑자기라니.”

내 떨떠름한 반응에 박건호가 실소를 흘리며 설명했다.

“처음부터 우리가 여기 가게 주인과 엮이지 않도록 여러모로 신경 쓰지 않았나? 일 시작한 첫날에 하태헌 부마스터 때도 그랬고.”

역시 눈치챘었군. 정확히는 어비스에 등장한 하태헌과 천사연을 신경 쓴 거지만.

“천사연 마스터가 그런 부분을 세세하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았으니 별 상관 없습니다.”

“사람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닐 텐데.”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박건호 팀장님.”

맞은편에서 찬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어지럽혔다.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박건호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제가 쓰러졌던 타이밍과 천사연 마스터의 행동이 겹친 탓에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

“제가 컨디션이 저조했던 건 천사연 마스터와 연관 없습니다. 그러니 팀장님도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세요.”

“쓸데없는 걱정이라.”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뇌는 박건호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복잡함이 느껴져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일부러 좀 강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는데.

“그런가. 내가 지나쳤군.”

“아니, 사과하실 것까지는… 저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한 겁니다.”

주변 공기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온몸에 느껴지는 어색한 분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박건호와 이런 상황이 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다른 주제라도 꺼내야 하나, 눈치 있게 먼저 자리를 떠나 줘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는데, 때마침 옥상 문이 열리며 고동주가 등장했다.

“엉? 뭐야. 둘이서 나란히 농땡이 치는 거냐?”

다른 때라면 귀찮았을 고동주의 등장이 이번만큼은 너무나도 반가웠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적당히 대답했다.

“에이, 가끔 이렇게 쉴 때도 있어야죠.”

“가끔은 무슨. 너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 올라오는 거 내가 다 안다.”

…그건 어떻게 아는 거지? 나를 향한 고동주의 관심이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저를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얼씨구. 찔리니까 헛소리하는구만. 넌 형님이랑 성격이 아주 똑 닮아서 파악하는 게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워, 인마.”

권세현과 성격이 똑 닮았다는 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생각해 보면 고동주도 아예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었지. 사람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나보다 눈썰미가 좋기도 했고.

‘조심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네, 정말로.’

내가 대답 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만 쓸어 만지자 고동주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식 공간도 따로 있는데 감기에 걸렸다는 놈이 왜 여까지 올라와 청승맞게 바람을 맞고 있냐.”

“하하…….”

“여기서 보이는 게 저 병원 말고 뭐가 또 있다고.”

팔짱을 낀 채로 나와 고동주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박건호가 의아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병원? 혹시 저쪽에 보이는 저 건물 말입니까?”

“그래. 저거 맞다.”

“흠, 근처에 큰 병원이 있다는 얘기는 어제 듣긴 했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가깝긴 가깝군요.”

“엄청나게 가까운 거지. 덕분에 다쳐도 금방 치료할 수 있어서 꽤 편해.”

설명을 들은 박건호가 묘한 시선으로 병원을 바라봤다. 색색이 반짝이는 야경 불빛 사이로 병원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빛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저 방향에는 병원 말고는 다른 건 없는 겁니까?”

“병원 말고 다른 거라. 글쎄. 딱히 없는 것 같구만.”

입가를 매만지며 잠시간 눈동자를 굴리던 고동주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도 근래에는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오곤 하시던데. 서 있는 위치도 이쯤이고.”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박건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쪼그만 놈, 너 진짜로 우리 형님이랑 무슨 사이냐? 뭐 예전에 잃어버린 형, 동생 사이라거나… 그런 거냐?”

“예? 그럴 리가요. 우리 동주 형님 상상력도 뛰어나시네.”

“그만 느물거리고 솔직히 말해 봐라. 너희처럼 수상한 놈들을 바로 받아 주신 것부터가 이상한 거라고. 그리고 형님이라고 부르지 마!”

“어? 사장님도 맨날 사장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혼내던데. 이렇게 보니까 동주 형님도 사장님이랑 똑같네요.”

“이 자식이… 너 내가 우습냐?”

“음, 조금요?”

“아오, 이 새끼… 쪼끄매서 때릴 수도 없고.”

적당히 친 장난에 제대로 말려든 고동주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더니 결국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됐다, 인마!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 그만 쉬고 내려와서 일이나 해!”

풍부한 성량 덕분인지 그의 외침이 옥상 가득 울려 퍼졌다. 휙 등을 돌린 고동주는 콧김을 훅훅 내뿜으며 황소처럼 쿵쿵거리며 옥상을 떠나갔다.

그래도 고동주가 와 준 덕분에 딱딱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졌다. 나는 난간에서 내려오며 박건호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만 내려갈까요? 더 놀다간 정말로 혼나겠네요.”

“그러지.”

순순히 따라오는 박건호를 뒤에 달고 옥상 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내가 문손잡이를 잡기 직전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반대편에서 문이 먼저 벌컥 열렸다.

“……뭐야?”

옥상을 찾아온 상대는 권세현이었다.

하필 이럴 때에 권세현과 마주치다니. 난감한 건 그도 마찬가지인지, 나와 박건호를 한 번씩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3